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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린도전서강해2 하나됨,오해인가 이해인가 
본문 고린도전서 1:10~31(신약263) 
날짜 2018-05-06 
설교자 전용표 목사 

 

   병적으로 빨강색을 좋아해서 모든 것을 빨강색으로 맞춰서 입는 아저씨가 있습니다. 빨간 티셔츠, 빨간 점퍼, 빨간 바지, 빨간 양말, 빨간 구두, 스카프, 모자, 심지어 팬티까지 빨강색입니다. 일 년 365일 하루도 안 빠지고 빨강색만 입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아주 독특한 자기 취향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그 사람이 가족들에게 ‘우리 가족은 하나가 되어야 해!’라고 하면서 빨강색을 강요해서 입힌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싫은데 억지로 입은 가족들의 마음은 불만이 생기고 마음이 더 갈리게 되겠지요?

 교회가 하나 되어야 한다, 국론이 하나 돼야 한다는 말은 너무 자주 들어온 말입니다. 이제 아무도 거절할 수 없는 진리적 명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하나가 될 수 있는지, 그리고 하나됨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해 볼 일입니다.

 

 

 

1. 고린도교회의 분열상

 

 우리가 익히 아는대로 고린도교회는 네 개의 분파(分派)로 나뉘어 분쟁하는 교회였습니다. 11, 12절을 봅시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11,12)

 

 고린도교회는 분쟁 있는 교회, 즉 치열하게 싸우는 교회였습니다. 네 개의 분파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였습니다. 바울파 개척멤버들입니다. 이들은 바울을 통해 예수를 믿고 온갖 핍박을 이겨내며 교회를 세웠던 교인들입니다. 개척하면서 고생하고 힘들었던 이야기를 안 할 수야 없겠지요. 그런데 너무 자주하면 곤란합니다. 자주 이야기하면서 바울을 하나님 떠받들 듯이 합니다. 개척멤버로서 자부심이 너무 과도해서 우월의식이 되었습니다. 개척멤버들이 이렇게 하면 나중 온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고 소외감을 느낀 사람들끼리 하나로 뭉치려는 심리가 발동하는 것 또한 당연합니다. 소외감을 느꼈던 사람들이 뭉쳐서 또 하나의 분파가 되었는데, 이들이 아볼로를 추종하면서 아볼로파가 만들어진 겁니다. 자기들은 바울은 잘 모르고 아볼로가 사역할 때 교회 다니기 시작해서 아볼로에게서 배웠거든요. 아볼로는 전통적인 헬라식 교육을 받은 목회자로서 지식이 풍부하고 가르치고 양육하는 것을 참 잘했습니다. 이들이 볼 때 개척멤버들은 자기들처럼 제자훈련 받지 않은 겁니다. ‘제자훈련도 안 받은 사람들이, 맨날 옛적 신앙만 우려먹으면서’ 이런 마음으로 자기들이 받았던 소외감을 갚아주는 겁니다. 게바파는요? 게바는 베드로인데, 이 베드로가 고린도교회에 다녀간 적이 몇 차례 있던 것 같습니다. 와서는 직접 예수님 따라다닌 목격담을 이야기 하지 않았겠습니까? 오병이어 기적, 물위를 걸으신 사건, 죽은 나사로 살리신 이야기,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 만난 체험,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사건, 오순절 성령 받은 간증 등 원조에게서 직접 들으니 얼마나 감동이 됩니까? 가슴에 불이 붙는 겁니다. 그러면서 신앙체험이 일어나고 방언도 터지고 하니까 이것이 또 한 분파가 된 겁니다. 이것이 게바파입니다. 마지막으로는 그리스도파가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 추종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만 믿고 따른다는 사람들입니다. 제일 괜찮은 것 같지만, 정말 그리스도만 따르고 하면 되는데, 그게 쉽지가 않습니다.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교인들을 싸잡아서 자꾸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만 올바르고 의롭다는 ‘자기의(自己義)’에 빠지는 겁니다. 그래서 이것도 하나의 분파가 되어 버린 겁니다. 이것이 고린도교회의 분열의 모습입니다.

 

 

 

2.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하나님을 높여야 하나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분열의 표면적 이유일 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분열된 모습을 안타까워 하면서 뜬금없이 십자가의 도를 18절부터 말합니다. 18~19절을 봅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18,19)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의 도는 19절에 나오는 것 같이 지혜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는 하나님이 능력입니다. 무슨 말이냐? 내가 잘 났다, 내가 똑똑하다라고 하는 인간의 교만을 깨뜨려 나는 미련하고 어리석을 뿐 아니라 고집스러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능력이라 이 말씀입니다. 여기까지 가야 그 사람이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은 잘 보는데, 십자가 달린 나는 못 보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님만 달린 것이 아니라 나도 같이 달렸습니다. 거기에 예수를 십자가에 죽게 한 죄 많은 내가 달려 있습니다. 자존심 강한 내가 달려 있습니다. 옹졸한 내가 달려 있습니다. 잘 난 체 하는 내가 달려 있습니다. 알아달라고 떼쓰는 내가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 옆에 달려 있는 강도가 바로 나입니다. 십자가에 달려서 내가 죽었는데 여전히 내가 잘 났고 내가 똑똑하고 하면 그 사람은 예수와 함께 죽지 않은 사람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지 않으면 예수와 함께 살지도 못합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봐야 내가 보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백날 천날 나를 봐도 진짜 내가 안 보입니다. 나는 누구냐?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게 만든 장본인입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십자가를 믿는다하면서 십자가를 달린 자기는 볼 줄 모르는 몽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아직 십자가를 통과하지 못한 신앙입니다. 십자가 통과하면 내가 못 난 사람으로 보여야 합니다.

 

이것을 이야기 한 다음 바울이 고린도교인들을 어떤 사람이라고 부르는지 보십시오. 26~29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26~29)

 

 세상의 미련하고 능력없고 못 배우고 약하고 천한 자들이라고 합니다. 기분 좋겠어요?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은 기분이 안 나빠야 합니다. 고린도교인들은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못 배우고 신분이 미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입만 열면 누구 자랑을 합니까? 자기 자랑을 합니다. 내가 이래 봐도 바울선교사님에게서 세례 받은 사람이야! 나는 제자훈련의 대가 아볼로목사님에게서 직접 제자훈련 받았어! 바울을 높이고 아볼로를 높이고 게바를 높이는 이유가 결국 누구를 자랑하기 위함입니까? 자기를 자랑하기 위함입니다. 바울파 사람들은 교회 자기들이 세웠다고 합니다. 아볼로파는 교회 체계 자기들이 세우고 교회 부흥 자기들이 시켰다고 합니다. 다 자기들이 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이것이 하나님의 교회입니까 사람의 교회입니까?

그래서 31절에 뭐라고 합니까?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31)

 

 주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은 주님을 자랑하라는 말입니다. 29절에 이미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십자가를 진 사람은 사람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 자랑하지 않습니다. 사람 높이지 않습니다. 자기 높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높입니다. 교회는 일하다가 일 생기는 곳입니다. 뭐 하나 하자 그러면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의견 갈려서 싸우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어쨌든 그 일이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거 누가 한 겁니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성도들이 헌금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많은 헌금을 하면서 이름 없이 합니다. 또 성도들이 나와서 묵묵히 일을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미안해서 밤에 나와서 그 일을 위해 기도합니다. 사람이 한 것입니까? 누가 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저거 그 때 내가 했다!’ 이런 말이 많아지면 그 교회는 인간의 교회가 되고 ‘미련하고 부족하고 지혜도 없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결국 해 내셨다!’ 이런 말이 자연스러운 교회라야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사람 자랑, 사람이 한 일이 많은 교회는 하나되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 많은 교회라야 하나 됩니다.

 

 

 

3. 조화를 이루어야 하나됩니다

 

 고린도교회의 분열과 분쟁을 안타까워 하면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최종 결론은 너무도 쉽습니다. 하나 되라는 것입니다. 맨 앞에서 그 말을 하지요. 10절을 봅시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10)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같은 마음,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이것이 하나됨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다른데 어떻게 똑같이 말하고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은 뜻을 품습니까? 기계처럼 똑같아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모두가 빨강색만 입어! 그런 말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것은 하나됨이 아니라 획일화입니다. 진정 하나됨은 각자의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 각자 자기 생각이 있으면서, 그것이 분쟁으로 가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됨은 획일화가 아니라 조화입니다.

 자 보십시오. 고린도교인들은 모두가 바울만 좋아해야 합니까? 아볼로만 좋아해야 합니까? 다 자기 취향에 맞는 목회자 좋아합니다. 자기가 은혜 받은 목회자 좋아합니다. 당연한 겁니다. 저는 부흥사스타일의 외부강사가 오셔서 말씀 전하실 때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저보다 강사분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그게 기분 나빠해야 할 것이 아니라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내가 줄 수 없는 것을 그 분이 주고 가기 때문입니다. 예배 전 찬송인도하시는 전도사님은 할렐루야 아줌마 스타일입니다. 가만 못 있습니다. 방방 뛰어야 합니다. 그분에게 제가 전도사님, 찬송인도 이렇게 차분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그 분 병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제 스타일대로 맞출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 나하고 똑같은 스타일만 있으면 우리교회가 될 것 같습니까? 나 하고 다르다고 싫어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다양성을 발휘해서 다양한 솜씨와 은사 재능이 교회에 쏟아질 교회가 풍성해 지는 겁니다. 다른 것이 복입니다. 미성숙한 사람이 다른 것을 틀렸다며 정죄합니다. 미성숙한 목사가 교인들에게 자기 색깔을 강요합니다. 미성숙한 교회가 모든 교인에게 한 가지 색깔의 유니폼을 입히려고 듭니다. 그건 독재고 전체주의(全體主義, totalitarianism)입니다.

 예수님 공동체를 보십시오. 색깔이 다양했습니다. 열심당원 시몬이 있었습니다. 입만 열었다하면 ‘혁명을 해야 한다. 세상을 뒤집어야 한다. 기득권들을 몰아내야 한다!’ 요즘으로 치면 적극적인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기장측 정도 됩니다. 나다나엘 같은 경건파도 있었습니다. 오로지 기도하고 묵상합니다. 예수님이 이들을 한 가지 색깔로 ‘깔맞춤’을 시도하셨습니까? 아니다. 다들 제 색깔에 맞도록 신앙생활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그릇의 크기입니다. 다 담아냅니다. 교회에는 아볼로파 같이 지적인 신앙인도 있어야 하고 게바파처럼 체험적 신앙인도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모두가 자기 색깔을 낼 수 있고, 그래도 정죄 받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서로 어울려서 조화를 이루며 함께 나아가는 성숙함이 넘실거리는 나라입니다.

 

 

 

맺는 말

 

 오늘 삼대예배여서 어린 주일학교 아이들도 이 자리에 함께 참석하고 있습니다. 어릴 때 받은 실망과 상처는 평생가고 어릴 때 받은 감동과 자긍심도 평생 갑니다. 다음세대들에게 더 이상 기독교와 교회들의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 됩니다. 이들이 어른들의 신앙생활 모습을 보면서 교회와 기독교에 대한 자긍심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성숙함을 보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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