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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린도전서강해1 그래도 교회인가? 
본문 고린도전서 1:1~9(신약263) 
날짜 2018-04-29 
설교자 전용표 목사 

   오래 전 부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반찬거리를 싣고 다니면서 파는 1톤 트럭 기사가 신호 위반을 했습니다. 삐보 삐보 경찰이 따라와서 차를 세우라 합니다. 차를 세웠더니 딱지를 떼는 게 아니라 ‘쫌 있으면 점심때인데 만원만 주고 가시오!’ 그럽니다. 예전에는 경찰이 뒷돈 요구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뒷돈도 나름 규칙이 있었습니다. 트럭은 오천 원, 자가용은 만 원이었습니다. 그런데 만 원을 달라는 겁니다. 부식장수 아저씨가 신경질을 내면서 트럭인데 왜 만원이냐며 5천원 깎아 달라 해서 결국 오천 원으로 하기로 했는데 지갑 열어보니 오천 원짜리는 없고 만 원짜리와 천 원짜리 밖에 없어요. 만 원짜리 주면서 오천 원 거슬러 달라고 기다리는데, 경찰이 만원 받아가지고 차를 타고 그냥 가버리는 겁니다. 화가 난 부식장수 아저씨가 트럭 몰고 뒤 따라 가면서 ‘싱싱한 배추 무 대파 잔파 당근 오이 왔습니다.’하는 확성기로 볼륨 최고로 크게 틀고 방송을 시작합니다. “아아, 앞에 가는 경찰차, 오천 원 줄이 주고 가라, 오천 원 줄이 주고 가라!” 부산 경남 쪽에서 거스름돈을 줄이라고 합니다. 올바른 법집행을 하면 되었을 것을 부당한 돈을 요구했다가 망신(亡身)을 당하였습니다.

 뭐든지 그에 걸맞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교회가 그렇습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면 정도 이상의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이상하게도 세상 사람들은 교회나 교회 다니는 사람에게는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면서 그 수준을 갖추지 못하였을 때 더 가혹한 비판을 가합니다. ‘왜 우리한테는 더 심하게 비판하느냐’며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만큼 교회에 더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미움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사랑이 남아있다는 말입니다. 그 미움까지 다하면 그다음은 무관심입니다. 그렇게 볼 때 교회를 향한 가혹한 비판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교회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스라엘이 자정능력을 잃어버려 스스로 고치지 못할 때 이방나라를 통해 회초리를 대셨듯이 오늘날 교회가 스스로 고치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해 우회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부터 고린도전서를 살펴보겠습니다. 고린도전서는 교회에 대한 종합진단서라고 보시면 됩니다. 한국교회 역사상 더없는 망신을 당하고 있는 요즈음 의미 있는 공부가 되리라 봅니다.

 

 

 

1. 교회는 한 순간에 엉망이 될 수 있습니다

 

 한 교회 이야기로 시작하겠습니다. 이 교회는 네 패로 갈라져 싸우는 교회였습니다. 기득권을 행사하는 개척멤버들이 한 패를 이루었는데, 이들은 교회를 개척하신 목사님을 못 잊어하면서 입만 열면 ‘그 목사님이 최고다’, ‘우리가 예전에 그 목사님과 개척할 때 이렇게, 이렇게 충성했다, 거기 비하면 지금 성도들은 신앙생활 하는 것도 아니다’라고 하면서 자신들의 우월권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면 나중 온 성도들은 당연히 소외감을 느끼지요. 그 사람들도 자꾸 뭉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성경공부를 체계적으로 잘 시켰던 2대 담임목사님을 추종하면서 자기들은 그분 밑에서 체계적인 양육을 받은 것을 자랑스러워하였습니다. 또 어떤 성도들은 부흥회 인도하러 오셨던 목사님에게서 은혜를 받은 뒤로 그 목사님을 추종하여 자주 모이기도 하면서 또 한 그룹을 형성하였습니다. 또 한편에서는 방언을 하면서 뜨겁게 기도하는 성도들이 한 패를 이루었는데, 이 사람들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다른 사람들과는 영적으로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소위 ‘영파(靈派)’입니다. 이런 파들이 서로를 인정하면서 조화롭게 지내면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저마다 저 사람들 신앙은 뭔가 이상하고 부족하고, 우리 신앙이 올바르다, 뛰어나다 그러는 겁니다. 교회가 평안할 날이 있겠습니까?

 교회가 이렇게 되면 그 교회 성도들에게는 사실상 하나님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 경외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것 아닙니까? 자기의 옳음만을 주장하고 다른 이를 부정하는 것은 하나님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으로서 하나님 없는 마음입니다. 그런 교회에는 자기 자신을 깊이 성찰하는 신앙을 가진 성도가 극히 드물어 집니다. 그러다보면 경건성(敬虔性)이 현저히 떨어져서 갖가지 수준 낮은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곤 하는데, 이 교회도 두 가지 사건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윤리도덕의 문제였습니다. 남자 집사 한 사람이 동네의 어떤 여자와 바람이 난 겁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바람 난 여자가 몰래 자기와 바람 난 남자 집사의 아들과 또 붙어 다닙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와 놀아난 겁니다. 그러면서도 주일 되면 아무렇지도 않게 나와서 예배드리고 다합니다. 그게 동네에 소문이 파다하게 났습니다. 교회는 가정문제고 사생활문제라고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는데 실은 제재를 못하는 것입니다. 영적 권위가 떨어진 교회는 교인들의 잘못을 바로 잡지 못합니다. 그런 교회에 전도가 되겠습니까? 두 번째는 돈 문제였습니다. 집사 두 사람이 돈거래를 했는데, 그게 잘못되어서 하나가 다른 하나를 경찰에 고소를 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끼리 재판이 붙어버렸습니다. 교회가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리면 세상일들이 교회 안으로 치고 들어오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이 교회가 바로 고린도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총체적으로 타락한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 1년 반 동안 머물면서 갖가지 어려움을 겪어가면서 개척한 교회가 고린도교회입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남부 아가야지방의 수도로서 대도시였습니다. 거기에 교회가 세워진 것이 주후 50년에서 51년경이고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에서 고린도교회의 사정을 전해 듣고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것이 주후 55년경입니다. 자, 교회가 얼마 만에 이렇게 타락해 버렸습니까? 겨우 4, 5년 만에 이렇게 타락했습니다. 순식간입니다. 교회가 건강히 세워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허물어지는 것은 순식간입니다. 경건의 능력을 잃어버리면 한 순간입니다. 작은 구멍이 제방을 허무는 법입니다. 우리교회는 좋은 교회다, 안전한 교회다? 아닙니다. 500년 거목도 병이 들면 1, 2년이면 죽습니다. 절대 방심하면 안 됩니다. 겸손해야 합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 거룩한 성도입니다

 

 자, 여기서 질문을 해 봅시다. 이사를 갔는데, 가까운 곳에 고린도 교회 같은 교회가 있다면 가시겠습니까? 모르고는 가도 알고는 못 갑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 봅시다. 고린도교회 같은 교회도 교회입니까? 교회라고 부를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하나님의 교회’, ‘거룩한 성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2절을 봅시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2)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은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말이고, ‘거룩한 성도’라는 말은 ‘세상과 구별되게 살도록 부름 받은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평안을 비는 첫인사를 하려고 쓴 상투적인 인사말 같지만 깊이 생각해서 쓴 말입니다. 첫 인사말을 얼마나 신중하게 생각해서 쓰는지 연애편지를 써 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오늘 뒤뜰에 진달래가 피었소. 누구보다 일찍 꽃을 피운 진달래꽃의 영롱함은 당신을 꼭 닮은 듯하오!’ 고민하고 생각해서 이렇게 쓰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교회’ ‘거룩한 성도’라고 부르는 것은 고린도교인들에게 헛된 만족감을 주기 위함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안에 어떤 문제가 있건 간에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야!’ ‘어떻게 살든 간에 우리는 이미 거룩해진 성도야!’ 이런 확신을 가지라고 쓴 말이 아니란 거예요. 썩은 물이 가득 고여 있는데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야, 자부심을 가져야 돼!’라고 한다면 희망은 점점 묘연해 지는 것이고 우스운 꼴이 됩니다. ‘교회가 이렇게 타락하고서 정말 교회라 할 수 있습니까?’라고 누군가 정당한 비판을 하는데 거기에 대고 ‘하나님의 교회를 비판하면 저주를 받는다’라고 응수한다면 그것이야 말로 병을 안고 죽기로 작정을 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은 편지를 쓰면서 고심 끝에 고리도교회를 향해 ‘하나님의 교회’ ‘거룩한 성도’라 부르는 것은 돌아보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로 부름을 받고, 거룩한 성도로 부름을 받았는데, 여러분은 과연 하나님의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답게 가꾸어 왔는가? 거기에 온갖 사람의 욕심을 썩고 온갖 계산을 썩고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뜻 인양 둔갑시켜 사람의 교회로 만들지 않았는가? 남이 하는 일은 사람의 교회 만드는 일이라 하면서 내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라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지는 않았는가? 여러분은 과연 세상과 구별된 생활을 하고 있는 성도가 맞는가, 세상에 나가서는 온갖 추잡한 말과 생각과 행동을 다 하면서 주일 아침 교회 올 때는 거룩한 가면을 뒤집어쓰고 나타나 성도흉내를 내지는 않았는가? 한 주간 살면서 싸울 것 다 싸우고 화낼 것 다 내고 온갖 거짓말 다 하고 와서 성도의 가면을 덮어 쓰고 앉아 있는 건 아닌가? 일주일을 살아도 말씀 한 장 읽지 않고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춰보는 일 하나 없이 살다 와서 하나님의 백성인척 앉아 있지는 않았는가? 예수를 주로 부르면서도 예수가 어떤 분인지 관심도 없고 본받으려는 노력도 없이 그저 처음 믿을 때 가졌던 초보단계의 예수 이해를 평생 우려먹고 있지 않은가?’ 이런 의미입니다. 고린도교회의 상황을 훤히 아는 바울이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교회’ ‘거룩한 성도’라는 말을 쓸 때 굉장히 아픈 가슴으로 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이것을 쓴 것이라면 여기에 하나님의 심정(心情)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어떤 하나님의 심정입니까? ‘너희가 지금 이렇게 엉망인 상태지만 그래도 너희가 끝까지 하나님의 교회로 남아주기를 바란다. 거룩한 성도로 남아주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이자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음성입니다. ‘반계교회야, 너희가 진정 하나님의 교회로 남아주시를 바란다!’ ‘누구누구야, 네가 성도다운 성도로 남아주시를 바란다!’

 

 

 

3. 바울은 악조건 하에서도 고린도교회를 인해 감사합니다

 

 4~9절까지는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감사가 나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4~7)

 

 죽을 힘을 다해 개척해 놓은 고린도교회가 채 5년도 되지 않아 엉망으로 타락했는데, 그런 교회를 향해 무엇을 감사하는지 한 번 봅시다. 먼저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한 것을 감사한다고 합니다. 실제로 고린도교회는 언변과 지식이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고린도 도시 자체가 말을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하는 것을 굉장히 높게 치는 풍토가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언변을 가르치는 학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리고 원래 싸우는 교회가 논리와 말솜씨가 뛰어납니다. 초보들의 싸움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지만, 중급 고급들의 싸움은 목소리 큰 것으로 절대 이기지 못합니다. 논리가 분명해야 하고 명분이 있어야 합니다. 네 파로 나뉘어 치열히 싸워온 교회이니 논리가 얼마나 발달했겠으며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는데 얼마나 전문가가 되었겠습니까? 그러니 언변과 지식이 풍성할 수밖에요. 그런데 고린도전서 420에서 바울이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 질책하는 것으로 보아 고린도교회가 실상은 말만 번지르르 하게 잘하고 말씀을 실천하는 능력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러면 곤란하지요. 그런데도 바울은 일단 고린도교회가 언변이 뛰어난 것을 칭찬하면서 감사합니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된 것을 감사한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체험이 많이 일어났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감사합니다. 세 번째는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는 것을 감사한다고 합니다.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은사가 너무 풍성해서 누구 은사가 더 좋으냐고 싸움이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바울은 먼저 칭찬하고 감사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배울 것은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감사할 것은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교회가 바울에게 어떻게 했는가를 알면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향해 먼저 감사한 것이 더욱 놀랍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세웠지만 바울 가슴에 대못을 박은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진짜 사도가 아니라며 가장 잔인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비난했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가 다름 아닌 바울이 자신이 진짜 사도가 맞다며 자신을 변호하는 내용의 서신입니다. 얼마나 공격을 해 댔으면 그랬을까요? 그런 데도 감사합니다.

 여러분, 어떤 악조건 하에서도 감사의 조건을 먼저 찾으십시오. 없지 않습니다. 있습니다. 그 의미를 깨닫고 감사할 때 새로워집니다. 제 모교회 목사님은 장남을 일찍 잃었습니다. 장남이 스물 일곱 살 때 교회에서 교사위로회로 바닷가에 놀러 갔다가 물에 빠진 사람 둘을 구해 내고 파도에 휩쓸려 명을 달리했습니다. 아주 장래가 촉망되는 아들이었습니다. 그 아픔을 안고 주일에 설교를 하러 올라오셨습니다. 참 독한 분입니다. 그때 그 분이 생전 처음으로 교인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셨는데, 감사를 하시더군요. ‘아들이 부끄러운 죽음 하지 않고 주님의 뜻대로 생명을 살리다가 죽은 것을 감사합니다!’ 그건 그야말로 원자탄 같은 충격이었고 감격이었습니다. 온 교우들은 감당하기 힘든 감동을 받고 그 자리를 뜨지 못한 채 한동안 안아 있어야 했습니다. 어떤 악조건 하에서도 감사의 조건을 먼저 찾아야 내가 삽니다. 다른 사람을 살립니다. 교회가 삽니다.

 

 

 

맺는 말

 

 오늘 8절에는 교회를 향하신 우리 개인을 향하신 주님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8)

 

 주님의 간절한 바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남는 것입니다. 어떤 부모가 아들을 군대에 보내면서 요즘 군대 월급 많이 올랐다고 돈 모아 오길 바라겠습니까? 공을 많이 세워 휴가 자주 나오기를 바라겠습니까? 그저 몸 성히, 건강히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지요. 주님이 우리교회에 바라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업적을 많이 이루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흠 없는 교회로 남아주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저 거룩한 성도라는 이름에 걸 맞는 참 성도의 모습으로 남아주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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