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 home
  • 주일설교

제목 에스더강해9 ‘무엇’보다 ‘어떻게’ 
본문 에스더 8:1~17(구약757) 
날짜 2018-04-22 
설교자 전용표 목사 

   제가 어렸을 적 여행이라는 말은 우리나라 사람 거의 모두에게 생소한 말이었습니다. 지금은 여행이란 말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친숙한 말이자 가장 인기 있는 말이 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평생 한 번 가볼까 말까하던 제주도가 초등학생들의 수학여행지가 되었고 동남아는 기본이고 유럽도 동유럽 서유럽 북유럽 나눠서 여행을 다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휴가 때 갈 여행지를 미리 고르고 준비해 놓는 모습은 이제 낯선 풍경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디를 가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가는가도 중요합니다. 마치 학생들 수학여행 다니듯이 여행사가 짜놓은 빡빡한 일정 따라 다니다보면 이것이 여행인지 중노동인지 분간이 가질 않습니다. 낯선 곳에서 다른 내가 되어 보는 경험이라든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우리의 인생과 나의 인생을 돌아본다든가 하는 배움의 시간을 갖는다든지 하는 것은 생략되기 일쑤입니다.

 저는 주로 TV를 통해 세계여행을 다닙니다. 얼마 전 TV 여행프로에 라오스가 나오는데 라오스의 한 소수민족 축제가 열렸습니다. 마을의 처녀총각들이 운동장에 모여서 공개데이트를 합니다. 남자 한줄 여자 한 줄 길게 늘어서서 서로 마주보고 공 던지기를 합니다. 공을 놓치면 벌칙으로 상대편의 소원을 하나씩 들어줘야 합니다. 한 아가씨가 공을 놓쳤습니다. 총각이 아가씨의 모자를 달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연애감정이 싹트면서 서로를 알아가기도 하면서 인연이 맺어지는 겁니다. 보면서 요즘 우리나라 연애와 결혼문화와 묘하게 겹쳐집니다. 우리는 지금 상대가 가진 조건을 먼저 봅니다. 학력, 직장, 연봉, 신혼집을 어느 수준까지 장만할 수 있는가, 뭐 이런 물질 중심적 조건을 우선순위로 따집니다. 라오스는 동남아시아에서도 가장 못사는 가난한 나라입니다.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저들이 지금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우리가 지금 못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물질이 풍요롭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니지요. 인간다운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고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입니다. 어디를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가는가도 중요합니다.

 에스더서는 악인 하만이 처형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이후 하만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어떻게 하였는가가 이어서 나옵니다. 우선 하만에게 주어졌던 모든 권세가 모르드개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효력이 그대로 살아있는 유다인 진멸조서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모르드개가 왕의 이름으로 새로운 조서를 내립니다. 모르드개가 민족을 부당하고 악한 학살로부터 구해냅니다. 그리고 모르드개는 왕과 방불한 존재가 되어 존경을 받습니다.

 

 

 

1. 사사로운 욕심에 끌리지 않아야 합니다

 

 왕은 하만의 집을 에스더에게 주는데, 에스더는 그 집을 모르드개에게 줍니다. 조선말 흥선대원군의 저택인 운현궁은 그 규모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특별하게도 개인 집에 궁(宮)자를 붙였습니다. 대제국의 최고 권력자였던 하만의 집은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이것이 모르드개에게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왕은 하만에게서 거둔 자신의 인장반지를 모르드개에게 내어줍니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자기들 문제는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지극한 영광까지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감당해야할 사명을 잊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민족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왕에게 나아가서 하만이 유다인을 진멸하라고 내린 조서를 철회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왕은 이미 내려진 조서는 페르시아의 법도 상 철회는 불가능하고, 대신에 하만이 내린 조서를 무력화 시키는 조서를 새로 써서 반포하라고 방법을 알려 줍니다. 그리하여 모르드개가 왕의 인장반지로 하만이 내린 조서를 무력화시키는 조서를 내립니다. 조서의 내용이 11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습니다.

 

조서에는 왕이 여러 고을에 있는 유다인에게 허락하여 그들이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지방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그들을 치려하는 자들과 그들의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되(11)

 

 조서는 유다인을 치려는 대적을 유다인이 먼저 치고 철저히 진멸하라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은 오해하기 쉬운 부분입니다. 하만이 유다인 치는 것은 나쁜 짓이고 유다인이 하만패거리 치는 것은 괜찮다는 말입니까? 과연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인가? 11절을 보면 ‘세력을 가진 자들’이었다고 말씀합니다. 하만과 함께 유다인을 진멸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자 했던 이들은 무지막지한 권력을 휘두르던 악인들입니다. 하만과 함께 권력을 휘두르면서 힘없는 양민들을 때로는 힘으로 협박해서 빼앗고, 때로는 교묘하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착취하면서 살아온 자들입니다. 이들을 처단하는 일은 ‘사사로운 보복’이 아닌 ‘정의의 심판’입니다. 9장에는 모르드개가 유다인들을 통해 이 세력들을 처단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을 처단한 후 그들의 재산에는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는 언급이 세 번씩(9:10,15,16)이나 나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일이 사사로운 보복이나 재물을 노리고 한 일이 되지 않고 끝까지 정의의 심판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되도록 초심을 지켰다는 말입니다.

 사사로운 욕심을 철저히 배제하고 임하십시오. 대개 사람은 연약한 본성으로 인해 처음에는 순수한 마음으로 시작했다가 갈수록 사사로운 욕심에 빠집니다. 좀 가다보면 어떻게 하면 이것이 나에게 덕이 되는지, 어떻게 하면 이 일도 하고 내 이익도 챙기고 일거양덕이 되는지 길이 훤히 보이거든요. 그러다보면 자꾸 사사로운 욕심을 개입시키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지옥의 출입구입니다. ‘나를 따라 오너라’는 부름에 배도 버리고 안정된 직업도 버리고 따라 나섰던 제자들이 주님을 부인하고 도망치는 실패자가 되었던 것은 사사로운 욕심에 붙들렸기 때문입니다.

 길게 가야 합니다. 길게 가는 길은 사사로운 욕심을 버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가는데 있습니다. 머리 잘 굴려서 이것저것 자기 것 잘 챙기는 사람 보면 나는 바보 같고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좀 바보스러워도 됩니다. 바보처럼 우직하게 가십시오. 나중에는 바보가 이깁니다.

 

 

 

2. 내가 잘 될 때 주변이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르드개는 푸르고 흰 조복(朝服)을 입고 금관을 쓰고 왕 앞에 나아가는 자가 됩니다. 15,16절을 읽습니다.

 

모르드개가 푸르고 흰 조복을 입고 큰 금관을 쓰고 자색 가는 베 겉옷을 입고 왕 앞에서 나오니 수산 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고 유다인에게는 영광과 즐거움과 기쁨과 존귀함이 있는지라(15,16)

 

 조복은 관리들이 궁궐에 출근할 때 입는 관복입니다. 모르드개가 입은 푸르고 흰 조복은 페르시야에서는 정승들의 조복이었을 것입니다. 거기다가 금관을 썼습니다. 왕도 아닌데 무슨 금관이냐 하시겠지만 조선의 고위 관리들도 정복에는 금관을 착용하였습니다. 궁궐문지기였던 모르드개가 대제국 페르시아의 최고 실권자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르드개가 왕 다음 가는 권력자가 되어 왕 앞에 나아갈 때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15절 말미에 보면 ‘수산성이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였다고 나옵니다. 전에 하만의 경우는 3장 15절에 보면 ‘수산성이 어지러웠다’고 나옵니다. 하만이 권력을 잡았을 때 일반 백성들에게 기쁨이 없었습니다. 모르드개와 하만 두 사람은 백성들의 반응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남이 잘 될 때 진심으로 기뻐하는 것이 부모 말고는 어려운 일입니다. 부모야 자식이니까 조건 없이 기뻐합니다. 남이 잘 될 때 같이 기뻐해주는 경우는 두 가지 정도입니다. 첫째는 그 사람이 나에게 유익을 주는 경우입니다. 두 번째는 그 사람이 정말 올바른 사람일 때입니다. 정말이지 굽히지 않고 올바르게 하는 사람이 잘 되면 ‘그 사람 언젠가 잘 풀릴 줄 알았어! 그런 사람이 잘 되는 게 세상이 바로 돌아가는 거야!’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까운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내가 힘들 때 위로가 되어줄 사람들도 가까운데 사람들이고, 나를 제일 못 살게 굴 사람도 가까운데 사람들입니다.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바르게 하십시오. 참 안타까운 것이 좋은 일이 있는데 부를 사람 없는 것이고 그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초청받아 온 사람들이 돌아서서 욕하는 것입니다. 이런 인생이면 곤란합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바르게 하십시오. 그래서 내가 잘 될 때 시샘하는 사람보다는 진심으로 기뻐해주는 사람이 많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러해야 합니다.

 모르드개는 힘이 주어지고 역할이 주어졌을 때 다윗처럼 했던 것 같습니다. 힘만 믿고 날뛰는 자들에게는 족쇄를 채우고, 불의한 방법을 써야 살 길이 열리는 사회에 만연한 구조적인 모순들을 거둬치우며, 환난 당한 자, 원통한 자, 빚진 자들을 품어 주고, 정직한 땀을 흘리면서 사는 보통사람이 잘 사는 세상을 열어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모두가 모르드개의 권세를 기뻐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뼈저린 반성의 거울로 삼아야 할 대목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힘을 가지고 대체 어떤 역할을 했었는가 반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계기독교역사에 그 유래가 없을 정도로 한국교회에 복을 주셨습니다. 수적인 부흥도 주셨고, 좋은 예배당도 주셨고, 물질도 주셨고, 사회적인 지위와 힘도 주셨습니다. 그것 가지고 한국교회가 뭘 했나요? 선교도 물론 했지만 알게 모르게 갑질도 많이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겸손의 조건(7:7,10:16 6:8 3:8,9)으로 여기지 않고 우월감의 조건으로 착각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기보다는 업신여길 때도 많았습니다. 하나님은 고아들의 아버지요 과부의 재판장(68:5)이신데 교회는 세상 힘 있는 자들 가까이 붙어서 강자의 논리를 주장하여 힘없는 약자들을 실족시킬 때도 많았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은 다시는 죄에 종노릇하지 말라(5:1)시는 주님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죄를 막 지어도 회개만하면 또 용서해 주신다는 착각을 불어넣었습니다. 그 결과 죄에 대해 무감각한 싸구려 성도를 대량생산해 낸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다보니 불교는 이 땅에 들어와 1000년간 주도권을 행사하다 쇠퇴해 갔고, 유교는 6~700년 주도권을 행사하다 쇠퇴했지만 우리 기독교는 겨우 150년도 되지 않아 주도권을 상실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역할을 주셨을 때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반성해야 합니다. 안 그러면 촛대를 옮기십니다. 이제라도 한국교회가 강자가 되려는 욕심을 버리고 겸손히 바르게 주신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여러분도 강자가 되려 하지 마시고 겸손하고 바른 자가 되려고 하십시오. 그럴 때 주님께서 길게 가도록 해주십니다.

 

 

 

3. 희생한 자에게 맡겨주시는 주도권이 있습니다

 

 모르드개는 궁궐수비를 하던 자리에서 일약 제국의 2인자가 되고, 민족을 위기 가운데서 구해 내며, 하만이 엉망으로 망가트린 나라를 개혁하고 안정시킵니다. 참 멋진 역할이지요. 누구나 한 번 이 땅에 와서 짧은 인생을 사는데 이런 역할을 감당하고 간다는 것은 정말 부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누가 어떤 사람이 이런 역할을 감당하게 되느냐 하면 희생(犧牲)을 치른 사람입니다. 모르드개는 누구보다 큰 희생을 치른 사람입니다. 어떻게 보면 모르드개가 하만에게 굽혔으면 편하게 갔을 것인데 굽히지 않아서 자신도 민족도 위기에 빠졌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만약 그랬다면 세상이 개혁되고 올발라 질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여전히 하만 같은 악인과 그 패거리들이 등골 빼먹는 세상이 계속되었겠지요. 그렇게 볼 때 모르드개는 의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희생을 치른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를 운행하시는 것을 보면 뭔가 희생을 치른 사람, 남은 짊어지지 않는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에게 나중에 주도권을 맡기십니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망치는 신세였을 때 그일라라는 성읍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약탈당하는 것을 보고는 외면치 않고 가서 목숨 걸고 싸워서 도와줍니다. 자기 코가 석 잔데 동족을 외면치 않고 희생합니다. 그 모진 세월이 지나자 하나님께서 나라를 맡기셨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가 나라가 일제 압제에 시달릴 때 큰 희생을 치뤘습니다. 그러자 해방이후 교회가 급속도로 성장하고 세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마을마다 교회는 문화를 주도하는 곳이었고 어떤 마을도 교회를 무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후 한국교회가 풍요에 취하고 또 민주화과정에서 희생보다는 기득권세력에 붙음으로 인해 90년대 이후 한국교회는 사회에서 주도적 위치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희생을 많이 치른 타종파가 사회적인 주도적 위치를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희생의 자리로 내려가야 합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희생하는 자가 무게중심이 되게 하십니다. 제가 아는 한 권사님은 스물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맏며느리로 시집을 갔는데 시댁은 장남보다는 차남을 하늘 떠받들 듯이 합니다. 도시로 내보내 공부를 시키고 남편과 자기는 열심히 농사지어서 뒷바라지 합니다. 둘째 셋째 시동생도 공부시킵니다. 나중에 서울에 나가서 살게 되었는데 시간 내서 꼬박꼬박 내려 가서 어른들 섬깁니다. 그토록 공부시켜놓은 시동생들은 잘 내려오지 않습니다. 시골 집 고장 난 것 수리와 보수도 권사님이 도맡아서 다 합니다. 야속한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야속하게만 흐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동생들이 그럽니다. ‘형수님이 우리 집안에 보배입니다!’ 집안에 대소사가 있을 때 어김없이 형수인 권사님의 의견을 물어봅니다. 생략하는 법이 없습니다. 권사님의 자녀들이 있는데, 이 자녀들이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이가 어머니라고 합니다.

 유독 남들보다 희생의 자리가 주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힘든 인생이고 야속한 세월이 흘러갑니다만 주님께서 나를 무게중심으로 삼아가시는 시간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희생을 값지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맺는 말

 

 어디로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가는가도 중요합니다. 사사로운 욕심을 뿌리치고 가십시오. 주변을 돌아보며 가십시오. 희생의 자리로 가십시오. 주님의 영광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번호 제목 본문 날짜 설교자
318 성탄절 설교) 마구간 예수 마구간 신앙 누가복음 2:1~7 (신약 89)  2017-12-25  전용표 목사 
317 사도행전강해25 진짜 살이 사도행전 19:8-20 (신약 219)  2017-12-31  전용표 목사 
316 사도행전강해26 미지의 길을 가는 사람 사도행전 20:17-38 (신약 222)  2018-01-07  전용표 목사 
315 사도행전강해27 예수의 길을 가는 사람 사도행전 21:17-36 (신약 225)  2018-01-14  전용표 목사 
314 사도행전강해28 섭리로 사는 사람 사도행전 23:11-35 (신약 228)  2018-01-21  전용표 목사 
313 사도행전강해30 한 길 가는 순례자 사도행전 28:1-15절, 30-31절 (신약 236)  2018-02-04  전용표 목사 
312 사도행전강해29 소망이 되는 사람 사도행전 27:22-44 (신약 234)  2018-01-28  전용표 목사 
311 에스더강해2 높아짐과 잊혀짐이 다 은혜라 에스더 2:1-23(구약750)  2018-02-18  전용표 목사 
310 에스더강해1 앞 서 가시는 하나님 에스더 1:1-22(구약750)  2018-02-11  전용표 목사 
309 에스더강해5 기도와 익명의 하나님 에스더 5:1-8(구약754)  2018-03-11  전용표 목사 
308 에스더강해3 한밤 중에 부르는 노래 에스더 3:1-15(구약752)  2018-02-25  전용표 목사 
307 에스더강해4 에스더 4:1-17(구약753)  2018-03-04  전용표 목사 
306 에스더강해6 악인과 익명의 하나님 에스더 5:9-14(구약754)  2018-03-18  전용표 목사 
305 거룩함과 은혜의 예식. 세례 마태복음 28:19-20(신약52)  2018-03-25  전용표 목사 
304 부활의 신앙 요한복음 20:19~23(신약183)  2018-04-01  전용표 목사 
303 에스더강해8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에스더 7:1~10(구약756)  2018-04-15  전용표 목사 
302 에스더강해7 새벽은 어떻게 오는가 에스더 6:1-14(구약755)  2018-04-08  전용표 목사 
» 에스더강해9 ‘무엇’보다 ‘어떻게’ 에스더 8:1~17(구약757)  2018-04-22  전용표 목사 
300 고린도전서강해1 그래도 교회인가? 고린도전서 1:1~9(신약263)  2018-04-29  전용표 목사 
299 고린도전서강해2 하나됨,오해인가 이해인가 고린도전서 1:10~31(신약263)  2018-05-06  전용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