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 home
  • 주일설교

부활의 신앙

2018.04.04 13:37

양승훈전도사 조회 수:34

제목 부활의 신앙 
본문 요한복음 20:19~23(신약183) 
날짜 2018-04-01 
설교자 전용표 목사 

 

  ‘길인주처시명당(吉人住處是明堂)’이란 말이 있습니다. ‘명당이란 산 좋고 물 좋은 좌청룡우백호의 지형이나 배산임수(背山臨水) 같은 지세에 있지 않고 어진 사람이 사는 그곳이 바로 명당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아픔이 있는 자리지만 성령을 받아 이겨나가고 있는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로 명당자리입니다. 복된 인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로 거듭 나고 예수의 부활의 능력을 이어받아 내 앞에 험산준령을 넘어가는 인생이 복된 인생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은 날짜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매년 바뀝니다. 춘분 후 보름이 지난 첫 주일을 부활절로 지켜오고 있습니다. 대략 3월 말에서 4월 말 사이에 잡힙니다. 작년에는 부활절이 4월 16일이었는데 올 해는 4월 1일입니다.

 예수님은 금요일 오전 9시에 예루살렘 성 밖 골고다라는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6시간 지옥 같은 고통을 겪으시고 오후 3시에 숨이 끊어지셨습니다. 로마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물과 피를 모두 쏟게 하여 확인사살을 하였습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라는 사람이 용감히 나서서 반역죄로 죽은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여 자신의 집안 묘지에 장례를 치렀습니다. 제자들은 극도의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대인공포증 무기력증 등에 시달리며 문을 닫아 잠근 채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제자들이 나중에는 예수를 증거 하다가 하나씩 죽어갑니다.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저주하고 부인하던 베드로는 예수를 전하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죽습니다. 야고보는 목이 잘려 순교를 합니다.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던 의심병자 도마는 인도까지 가서 예수를 전하다가 톱에 잘려 죽습니다. 바돌로매는 에디오피아에서 창에 찔려 죽고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이 순교의 제물이 됩니다. 예수를 거짓선동가 사이비교주로 알고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명예롭게 여기던 바울은 그 좋던 출세가도(出世街道)를 버리고 세계를 떠돌면서 예수를 전하다가 감옥에 갇힙니다. 비겁한 겁쟁이들과 극렬한 박해자들이 예수의 증인이 되고 순교까지 하게 된 이유는 예수가 다시 살아나 그들 속에서 강렬한 에너지로 꿈틀거렸기 때문입니다. 참된 부활신앙은 예수가 내 속에 사는 것이고 내가 예수로 사는 것입니다(갈 2:20). 오늘 부활의 증인에 대해서 말씀을 상고하겠습니다.

 

 

 

1. 평강을 구하고 평강을 전달하는 사람

 

 부활의 증인은 평강을 구하고 평강을 전달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셔서 가장 먼저 주신 것은 평강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인들의 박해를 두려워하여 극도의 공포에 사로잡혀 숨어 있었는데 찾아오신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였습니다. 19절입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19)

 

 오늘날 사람들은 편안한 삶을 바랍니다. 편안을 위해 산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악착같이 벌어서 더 편안한 집, 더 편안한 차, 더 편안한 인생을 삽니다. 사교육에 올인(all-in)하는 이유도 자녀의 편안한 인생입니다. 내 자녀가 편안한 인생을 살지 못할까 하는 걱정에 평생 붙들려 평강 없이 삽니다. 편안과 평안을 맞바꿔 삽니다. 그러나 편안보다 우리 인간에게 더 중요한 것이 평강입니다. 편안함은 물리적 개념이지만 평안은 정신적 영적 개념입니다. 어렸을 적 여섯 식구가 부산 내려가서 얻은 전세는 방 한 칸에 부엌 하나, 화장실은 주인집과 같이 쓰는 형편었습니다. 전셋집이 아닌 전세방이었습니다. 잠자리도 잠자리거니와 화장실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아침 되면 전쟁도 그런 전쟁이 없습니다. 불편하지요. 지금은 큰 아이가 학교기숙사에 들어가 있고 세 식구가 화장실 두 개 있는 집에 삽니다.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편안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잊지 말아야할 것은 편안하다고 평안이 찾아오는 것은 아니란 사실입니다. 평안은 살아계신 주님을 만날 때 임합니다.

 사람들은 편안한 것과 평안을 혼동합니다. 이제 먹고 살만하고 자식들 출가해서 저마다 자리 잡아 큰 어려움 없이 살아가면 평안이라 여깁니다만 그건 편안한 것입니다. 편안함은 사람도 줄 수 있고 세상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안은 가족도 부모도 줄 수 없고 세상이 줄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사람을 끊고 일을 끊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이 지내던 날이 모든 사람에게 찾아옵니다. 편안한 집과 환경이 해결해 줄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때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할 뿐 아니라 세상이 알 수도 없는 것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요동치는 마음을 잔잔케 하실 수 있고, 어떤 두려움에 붙들려 있을지라도 삼일 안에 두려움을 거둬치우실 수 있는 평강의 주인이십니다.

 부활의 증인은 이 평강을 주님께 받아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것은 평안입니다. 우리가 구해야 하는 것도 평안입니다. 우리가 남들에게 전해 주어야 하는 것도 평안입니다.

 

 

 

2. 성령을 먹고 마시며 성령의 인도로 사는 사람

 

 부활의 증인은 성령을 먹고 마시며 성령이 인도로 사는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두 번째로 주신 것은 성령이었습니다. 22절을 봅시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2)

 

 그냥 성령을 받으라하신 것이 아니라 숨을 내쉬면서 성령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신 후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자 살아 움직이는 생령이 된 것을 연상시키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숨결을 불어넣기 전 인간은 흙덩어리, 육체덩어리에 불과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숨결을 불어넣으셨을 때 비로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달리 이야기하면 하나님의 숨결이 들어갈 때 인간은 육체적 차원 이상의 삶을 살 수 있다는 의미이며 육체적 차원 이상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숨결을 먹고 마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에서는 생명을 말할 때 ‘비오스’라는 말과 ‘조에’라는 말 두 가지를 사용합니다. 둘은 다 생명이라는 단어지만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비오스는 코에 숨이 붙어 있는 상태, 즉 육체의 생명입니다. 동물의 생명, 사람의 생명 다 비오스입니다. 이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단 먹어야 합니다. 1년에 1톤 트럭 한 대분의 음식을 먹고, 1톤 트럭 한 대 분의 물을 마셔야 합니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이 일을 합니다. 이 생명을 유지하려면 사람들의 인정도 받고 사랑도 받아야 합니다. 비오스에는 인정의 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 인정해 주지 않으면 기분이 나쁩니다. 비오스는 성취의 욕구도 있습니다. 뭔가를 해야 하고 이루어야 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사람이 무기력해지고 지능도 떨어집니다. 일이 있음이 축복인줄 알아야 합니다. 뭔가에 소속도 되어야 합니다. 비오스는 소속의 요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만 빼놓고 모이면 기분이 나쁜 것이고, 어디든 소속이 되어야 안심이 됩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런 것만 먹고 살면 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원래가 하나님의 숨결을 불어넣어서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은 아무리 비오스를 튼튼히 해도 육체덩어리입니다. 딱 거기까지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을 먹고 마셔야 합니다. 곧 성령입니다. 하나님의 숨결을 먹고 마셔야 인간이 참 인간이 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살 수 있습니다. 인간의 바탕이 하나님입니다. 캄보디아에는 경상북도만큼 큰 톤레삽 호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물위에 집 짓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시끌벅적합니다. 집집마다 교통수단으로 작은 보트가 있어 보트 다니는 소리가 시그럽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사람이 노를 젓는 조그만 조각배를 타고 망그로브 숲으로 들어간 경험이 있습니다. 망그로브 숲으로 조금씩 더 들어가자 거짓말처럼 고요해 집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조각배가 물 가르는 소리뿐입니다. 인간의 소리, 인간의 소음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 고요 속에 들어가니까 귀가 바깥으로 향하지 않고 내면으로 향합니다. 내면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내 자신, 내 마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세례요한도 예수님조차도 복잡한 인간세상을 뒤로하고 광야로, 한적한 산으로 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거기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의 인도하심을 받았습니다. 성령을 먹고 마시는 것이 구름기둥 불기둥의 인도를 받는 길입니다. 우리를 인도하시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이 거기에 있습니다. 이것이 조에입니다. 영적인 생명입니다.

 예수님은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성령을 먹고 마시며 사는 사람 속에 예수가 살아 숨 쉽니다. 그 사람이 부활의 증인입니다.

 

 

 

3. 하나님의 용서를 흘려보내며 사는 사람

 

 부활의 증인은 하나님의 용서를 세상에 흘려보내며 사는 사람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세 번째 것이 23절에 나옵니다. 23절 읽습니다.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는 말씀은 얼핏 보면 우리가 죄를 사하고, 사하지 않을 권세를 받은 것 같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죄를 사하는 권세는 우리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우리 인간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용서를 전할 뿐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하나님의 용서를 우리가 전할 때 그것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죄인됨을 고백하고 예수를 본받아 살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용서의 혜택을 받는 것이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그 혜택을 스스로 거부하는 격이 될 것입니다. 23절 말씀은 1차적으로 이런 말씀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사한다는 말은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용서받은 죄인으로서 우리 또한 남의 죄를 용서하고 살아야하는 의무가 부과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 또한 여전히 연약한 존재로서 항상 현실 속에서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그럴 때는 적극적으로 잘못을 시인하고 적극적으로 용서를 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베풀어 주신 용서를 우리 또한 적극적으로 베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증인된 삶입니다.

 저급한 기독교가 판을 치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몰상식적으로 이해하는 신앙이 판을 칩니다. 내가 남에게 큰 상처를 주고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받았다 하면서 다 끝났다고 합니다. 맞은 사람은 억울함이 안 풀렸는데 말이지요. 이건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내가 받은 용서의 은혜로 내가 그 사람 마음의 상처를 풀어내는 것입니다. 돈을 떼먹었으면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 사람에게 돈을 갚고 배상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용서가 헛되지 않았고 진실하심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 법을 어기고 죄를 지었으면 하나님께 회개하고 세상 법대로 처벌을 달게 받아 하나님의 정직하심을 내 삶으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약의 속건제입니다.

 정말 용서받은 사람이 왜 세상의 벌을 무서워합니까? 정말 용서받은 사람이 왜 자존심 때문에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못한단 말입니까? 진정한 하나님의 용서는 인간과 인간의 문제를 깨끗이 풀어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가 모든 인간세상으로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부활의 증인의 삶입니다.

 

 

 

맺는 말

 

 세상이 요동칠 때 고요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이 예수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세상이 물질덩어리 육체덩어리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허비할 때 성령을 먹고 마시며 사는 사람이 예수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세상이 이기는 기술을 몸에 익히고 살 때 용서를 흘려보내며 사는 사람이 예수를 소유한 사람입니다.

번호 제목 본문 날짜 설교자
118 고린도전서강해2 하나됨,오해인가 이해인가 고린도전서 1:10~31(신약263)  2018-05-06  전용표 목사 
117 고린도전서강해1 그래도 교회인가? 고린도전서 1:1~9(신약263)  2018-04-29  전용표 목사 
116 에스더강해9 ‘무엇’보다 ‘어떻게’ 에스더 8:1~17(구약757)  2018-04-22  전용표 목사 
115 에스더강해8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에스더 7:1~10(구약756)  2018-04-15  전용표 목사 
114 에스더강해7 새벽은 어떻게 오는가 에스더 6:1-14(구약755)  2018-04-08  전용표 목사 
» 부활의 신앙 요한복음 20:19~23(신약183)  2018-04-01  전용표 목사 
112 거룩함과 은혜의 예식. 세례 마태복음 28:19-20(신약52)  2018-03-25  전용표 목사 
111 에스더강해6 악인과 익명의 하나님 에스더 5:9-14(구약754)  2018-03-18  전용표 목사 
110 에스더강해5 기도와 익명의 하나님 에스더 5:1-8(구약754)  2018-03-11  전용표 목사 
109 에스더강해4 에스더 4:1-17(구약753)  2018-03-04  전용표 목사 
108 에스더강해3 한밤 중에 부르는 노래 에스더 3:1-15(구약752)  2018-02-25  전용표 목사 
107 에스더강해2 높아짐과 잊혀짐이 다 은혜라 에스더 2:1-23(구약750)  2018-02-18  전용표 목사 
106 에스더강해1 앞 서 가시는 하나님 에스더 1:1-22(구약750)  2018-02-11  전용표 목사 
105 사도행전강해30 한 길 가는 순례자 사도행전 28:1-15절, 30-31절 (신약 236)  2018-02-04  전용표 목사 
104 사도행전강해29 소망이 되는 사람 사도행전 27:22-44 (신약 234)  2018-01-28  전용표 목사 
103 사도행전강해28 섭리로 사는 사람 사도행전 23:11-35 (신약 228)  2018-01-21  전용표 목사 
102 사도행전강해27 예수의 길을 가는 사람 사도행전 21:17-36 (신약 225)  2018-01-14  전용표 목사 
101 사도행전강해26 미지의 길을 가는 사람 사도행전 20:17-38 (신약 222)  2018-01-07  전용표 목사 
100 사도행전강해25 진짜 살이 사도행전 19:8-20 (신약 219)  2017-12-31  전용표 목사 
99 성탄절 설교) 마구간 예수 마구간 신앙 누가복음 2:1~7 (신약 89)  2017-12-25  전용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