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 home
  • 주일설교

제목 거룩함과 은혜의 예식. 세례 
본문 마태복음 28:19-20(신약52) 
날짜 2018-03-25 
설교자 전용표 목사 

 

   오늘 세례와 성찬식이 있습니다. 세례의 의미를 성경과 우리 장로교의 공식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 근거해서 전하겠습니다.

 

 

 

1. 세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는 예식입니다

 

 세례를 줄 때 집례자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라고 합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도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도 아니고 교회의 권세로 세례를 주노라도 아닙니다. 반드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서 주님께서 세례를 명하실 때 이 점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마 28:19)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고 하신 것에는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오늘 세례 받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일을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함께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삼위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오늘 이들을 미리 아셨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성자예수께서는 이들의 모든 죄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이들을 위한 구원을 이루셨고, 또한 이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는 인간의 사랑과 달리 영원불변하시는 사랑임을 입증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이들을 찾아오셔서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예수를 믿고 받아들이는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세례를 받습니다.

 

 

 

2. 물을 가지고 씻는 예식이자 내가 죽는 예식입니다

 

 세례는 물을 가지고 씻는 예식이기도 하고 물속에 잠그는 예식이기도 합니다. 장로교와 여타교단에서는 물을 머리에 찍어 바르는 식의 세례를 행합니다. 침례교에서는 예배당에 마련된 욕조나 아니면 야외 하천에서 사람을 완전히 잠그는 식의 침례를 행합니다. 교단 신학자들 간의 어떤 것이 더 원래적인 방식인지를 놓고 논쟁도 있습니다만 둘 다 원래적인입니다. 다시 말해 초대교회 때부터 세례와 침례가 같이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핍박 상황의 교회들은 공개된 침례보다는 약식의 세례를 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자유로운 곳에서는 침례를 행하였을 것입니다. 더 다양한 상황이 있었을 것이고 더 그에 맞는 방식을 선택하여 행하였을 것입니다.

세례의 측면에서 볼 때 세례는 씻는다는 의미입니다. 물로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씻습니다. 콜라도 우유도 어떤 것도 물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물이라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의 죄를 씻는 것은 죄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의 피라야 합니다. 선행도 고행도 금욕도 아닙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정결케 합니다. 세례를 받음은 이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며, 내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정결케 되었음을 고백하는 행위입니다.

침례의 측면에서 세례는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로마서 6장 4절 상반절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롬 6:4a)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도 예수와 함께 장사되었다고 하십니다. 물에 잠그면 사람은 숨을 쉴 수 없습니다. 이처럼 세례는 나의 옛자아를 죽이는 의식이요, 죽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죽은 자로 살겠다는 다짐의 의식입니다. 욕심을 추구하고 죄를 합리화 하고 이기심을 합리화 하는 나의 자아를 예수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에 함께 못 박는 것, 즉 나의 옛자아가 죽는 것이 진정한 세례입니다. 나의 옛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고 받는 세례는 겉치레에 불과합니다. 죽어야 세례입니다. 이미 세례받은 자들도 내가 진정 죽었는가를 돌아보면서 성찬에 참예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성찬이 유익됩니다.

 

 

 

3.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임 되어 예수로 다시 사는 예식입니다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께 접붙임 되는 예식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진정 깨닫고 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이루신 의가 나를 위한 의요, 또한 가신 십자가의 길이 진정 나를 깨우치고 나를 살리는 길임을 믿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리스도께 접붙임을 받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적 집 뒷마당에 돌배나무가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배는 배인데 크기가 작고 사각사각하지 않고 딱딱합니다. 물도 많지 않습니다. 간혹 조금 큰 것이 열리기도 하지만, 아무리 실한 녀석도 과수원에서 딴 배 중 가장 작은 배보다 못했습니다. 우리 동네에 과수원을 하는 집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적 과수원 배나무가 그렇게 부러웠습니다. 우리 집 배나무에서도 저런 크고 맛있는 배가 열리면 좋을텐데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11장 17절에서 이방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건은 돌감람나무가 참감람나무에 접붙임 받아서 참감람나무의 온갖 좋은 것을 함께 누리는 것과 같은 경우라고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롬 11:17)

 

 세례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 접붙임 되어서 그분이 이루신 구원의 은총을 내가 누리는 것이며 예수그리스도의 온갖 좋은 성품을 내가 받아 누리는 특권을 얻는 것입니다. 예수께 접붙임 받음으로 나도 예수처럼 불의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게 됩니다. 예수처럼 가난하고 약한 자를 긍휼히 여길 수 있게 됩니다. 예수처럼 세상의 성공에 연연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사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게 됩니다. 예수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는 일에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다 쓸 수 있게 됩니다.

 

 

 

4. 우리가 주님의 것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예식입니다

 

 세례는 내가 주님의 것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예식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 (벧전 3:18)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몸에 붙은 떼를 밀기 위함이 아니라고 합니다.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 살겠다는 서약을 하는 의미라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예수를 나를 구원하신 구세주로만 믿도록 가르쳤습니다. 반쪽 믿음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향해 달라고만 외치는 성도만 만들어 냈습니다. 예수는 구세주인 동시에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종의 요구를 들어주는 존재가 아니라 종에게 명령하고 종에게 복종을 요구하는 존재입니다. 종들이 주인을 주님이라 부르면서 종의 말을 들으라고 윽박지르는 꼴이 되었습니다. 종은 주인을 향해 ‘주인님 말씀하십시오. 당신의 분부대로 행하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이 종입니다. 이것을 제대로 가르쳤다면 우리 기도에 ‘주십시오, 주십시오, 또 주십시오, 또 주십시오!’ 주구장창이 달라는 기도만이 아니라 ‘주님, 제가 이 문제에서는 주님의 말씀처럼 이렇게 하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도 그렇게 하셨는데,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런 기도도 절반은 차지하고 있을 것입니다. 오늘 세례를 받는 사람은 기도할 때 ‘주님, 제게 이러이러한 것이 필요합니다. 주님 채워주십시오.’ 이런 기도도 드리시고, 또 ‘주님, 주님께서 원하시는 이러한 삶을 제가 살겠습니다.’ 이런 기도도 드리시길 바랍니다. 이미 세례 받으신 분들도 기도의 절반은 ‘주님의 뜻대로 제가 이렇게 살겠습니다.’로 채우기를 힘쓰시기 바랍니다. 세례는 예수를 주인으로 모시는 의식입니다.

 

 

 

맺는 말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예식으로 할례를 주셨다면 신약에서는 세례를 주셨습니다. 오늘 하나님 백성의 표지인 세례를 받는 이들을 축복하며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번호 제목 본문 날짜 설교자
278 사도행전강해29 소망이 되는 사람 사도행전 27:22-44 (신약 234)  2018-01-28  전용표 목사 
277 에스더강해2 높아짐과 잊혀짐이 다 은혜라 에스더 2:1-23(구약750)  2018-02-18  전용표 목사 
276 에스더강해1 앞 서 가시는 하나님 에스더 1:1-22(구약750)  2018-02-11  전용표 목사 
275 에스더강해5 기도와 익명의 하나님 에스더 5:1-8(구약754)  2018-03-11  전용표 목사 
274 에스더강해3 한밤 중에 부르는 노래 에스더 3:1-15(구약752)  2018-02-25  전용표 목사 
273 에스더강해4 에스더 4:1-17(구약753)  2018-03-04  전용표 목사 
272 에스더강해6 악인과 익명의 하나님 에스더 5:9-14(구약754)  2018-03-18  전용표 목사 
» 거룩함과 은혜의 예식. 세례 마태복음 28:19-20(신약52)  2018-03-25  전용표 목사 
270 부활의 신앙 요한복음 20:19~23(신약183)  2018-04-01  전용표 목사 
269 에스더강해8 과연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에스더 7:1~10(구약756)  2018-04-15  전용표 목사 
268 에스더강해7 새벽은 어떻게 오는가 에스더 6:1-14(구약755)  2018-04-08  전용표 목사 
267 에스더강해9 ‘무엇’보다 ‘어떻게’ 에스더 8:1~17(구약757)  2018-04-22  전용표 목사 
266 고린도전서강해1 그래도 교회인가? 고린도전서 1:1~9(신약263)  2018-04-29  전용표 목사 
265 고린도전서강해2 하나됨,오해인가 이해인가 고린도전서 1:10~31(신약263)  2018-05-06  전용표 목사 
264 고린도전서강해3 육에 속한 사람, 신령한 사람 고린도전서 3:1~23(신약265)  2018-05-13  전용표 목사 
263 고린도전서강해5 연약한 양심의 원리 고린도전서 8:1~13(신약271)  2018-05-27  전용표 목사 
262 고린도전서강해6 진정한 패배 진정한 승리 고린도전서 6:1~11(신약268)  2018-06-03  전용표 목사 
261 고린도전서강해4 말씀의 범위를 넘어가지 말라 고린도전서 4:1~21(신약265)  2018-05-20  전용표 목사 
260 고린도전서강해7 그리스도인의 가정생활 고린도전서 7:1~16(신약270)  2018-06-10  전용표 목사 
259 고린도전서강해8 그리스도인의 권리선언 고린도전서 9:1~18(신약272)  2018-06-17  전용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