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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에스더강해6 악인과 익명의 하나님 
본문 에스더 5:9-14(구약754) 
날짜 2018-03-18 
설교자 전용표 목사 

 

 중학교 때 우리 반에는 손기술이 뛰어난 친구가 있었습니다. 이 친구는 남들은 생각지도 못하는 것들을 만들어서 친구들을 놀라게 하곤 했습니다. 그 친구의 발명품에는 먼저 동전거울이 있습니다. 십 원짜리 동전을 시멘트바닥에 갈고 연한 사포로 문지르고 마지막에는 나무에 문질러서 거울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가짜담배가 있습니다. 종이를 돌돌 말아 거기에 그림을 그려서 꼭 진짜 담배처럼 만들어서 어른들 흉내를 냈습니다. 나중에는 담배 곽까지 만들어서 주머니에 꽂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또 표창이 있습니다. 커트칼날을 잘라 그것을 이어 붙여서 톱니바퀴 모양으로 만든 표창인데, 그것을 던지면 실제로 나무 문 같은데 박히곤 했습니다. 하여튼 그 친구는 1년 내도록 끊임없이 새로운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친구들을 이상한 세계로 인도하곤 했는데 만드는 것들이 좀 엉뚱하고 기괴한 것들이었습니다. 아마 종일 머릿속에 그런 생각밖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느냐에 따라 말도 행동도 그에 따라 나오게 됩니다. 사람이 악한 생각을 자꾸 갖게 되면 결국 어느 샌가 악한 것이 나옵니다. 사람이 선한 것을 자꾸 갖게 되면 결국 선한 것이 나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2장 35절에서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이 정해져 있고 악한 사람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결정적이지 않고 유동적입니다만 악한 열매가 자꾸 쌓이면 악인이 되는 것이고 선한 열매가 쌓이면 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문제가 생기고 갈등이 생기고 하면 그때 내 속에서 선한 것이 나오는가, 악한 것이 나오는가를 봐야 합니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문제 앞에서는 악한 것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악한 것이 나올 때 거기에 더 치우치지 않도록 막아주시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냥 계속해서 악한 것에 치우치도록 내버려두시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내버려두시는 사람 하만이 나옵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에스더가 조급하지 않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잔치작전을 쓰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소원을 말해보라는 왕의 말에 에스더가 잔치를 마련하고는 왕뿐 아니라 하만을 초청케 한 것은 왕으로 하여금 하만을 달리 보도록 유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목적이 있는 자리인 줄은 전혀 알 길이 없는 하만은 특별대우에 그저 기분이 좋습니다. 하만은 한껏 기분이 좋아 집으로 돌아오는데, 모르드개가 또 절을 하지 않자 기분이 상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집에 와서 아내와 친구들을 모아서 자기자랑을 신나게 늘어놓습니다. 그런 다음 모르드개 때문에 마음에 만족이 없다고 푸념을 합니다. 그러자 하만의 아내와 친구들은 높은 장대를 세우고 왕에게 모르드개를 매달기를 허락받은 뒤에 즐겁게 왕후의 잔치에 가라고 조언을 합니다.

 

 

 

1. 악인의 옹졸함을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

 

 먼저 9절을 봅시다.

 

그 날 하만이 마음이 기뻐 즐거이 나오더니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있어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몸을 움직이지도 아니하는 것을 보고 매우 노하나 (9)

 

 왕후가 왕을 위해 마련한 특별잔치에 초청받은 하만은 기분이 날아갈 듯해서 궁궐을 나오다가 모르드개와 마주칩니다. 모르드개는 여전히 일어나지도 않고 몸 한 번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미 무시무시한 유다인진멸조서가 내렸지만 모르드개는 전혀 겁먹지 않고 하만 앞에 당당합니다. 놀라운 신앙의 기개(氣槪)를 볼 수 있습니다.

기분 좋던 하만은 절은커녕 미동도 하지 않는 모르드개를 보는 순간 기분이 나빠지면서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억지로 참고 집으로 갑니다. 자 보십시오. 하만이 지금 가지지 못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권력 가졌지요, 돈 가졌지요, 많은 사람이 자기 앞에서 굽신 거리지요. 왕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지요. 다 가졌습니다. 다 가진 사람이 모르드개 한 사람 자기 앞에 굽히지 않는 것을 참지 못합니다. 너그럽게 넘어가지 못합니다. 옹졸합니다. 뱀이 선악과를 따먹으라 하면서 부추겼던 것이 이 옹졸함입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 하나님이 다 허락하시고 딱 한 가지 선악과만 금하셨는데, 뱀이 이렇게 파고드니까 그만 옹졸함이 발동되어서 금하신 그 하나를 못 참는 것입니다. 옹졸함이 별것 아닌 것이 아니라 악인으로 가는 길목입니다.

높은뜻숭의교회 김동호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이 한인이 2천 명 정도 되는 외국의 어느 도시에 집회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 도시에는 한인교회가 4개 있는데 가장 큰 교회가 교인이 500명이고 나머지는 100명이 안 되는 작은 교회들이었습니다. 김목사님을 초청한 교회는 60명이 정도 되는 교회였습니다. 초청하는 교회 목사님이 집회예상인원을 적게 오면 30명, 많이 오면 400명이라고 보내왔습니다. 너무 편차가 컸습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500명 되는 교회가 이 집회에 협조해 주면 한 400명 올 것이고, 협조해 주지 않으면 이 교회 교인만 볼일 있는 사람 빼고 30명 정도 올 것으로 내다봤기 때문입니다. 김목사님 집회에는 400명은 안 되지만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은혜로운 집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김목사님은 기분이 씁쓸해지는 일을 겪었다고 합니다. 500명 교회 목사님이 자기교인들이 행여 그 집회에 참석할까봐 급하게 자기교회도 집회계획을 세워서 ‘맞불집회’를 열었다는 것입니다. 그럴 것까지 뭐 있습니까? 참 옹졸하지 않습니까? 옹졸을 넘어 치졸하기까지 합니다. 마음 씀씀이가 그렇게 편협하고 좁쌀 같아서 어떻게 예수를 믿는다 할 수 있습니까? 그런데 재미난 것은 그 500명 교회의 표어가 ‘성령 받아 새사람 되자!’였습니다. 도대체 성령 받아 새사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의 본성으로 타락한 인간의 옹졸한 본성을 이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 옹졸하면 쓰임받기 힘듭니다. 옹졸하면 자꾸 부딪히고 행복감이 사라집니다. 넓어져야 합니다. 항상 말씀을 가까이 하며 기도생활을 부지런히 하여 성령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안 그러면 우리도 언제 마음이 옹졸해져서 좁쌀 같은 사람이 될지 모를 일입니다. 성령으로 변화되는 길이 인간이 다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입니다.

 

 

 

2. 악인의 교만함을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

 

 모르드개 때문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하만은 집으로 빨리 갑니다. 집에 가서는 아내 세레나와 친구들을 불러 모아 한껏 자기자랑을 늘어놓습니다. 11, 12절을 봅시다.

 

자기의 큰 영광과 자녀가 많은 것과 왕이 자기를 들어 왕의 모든 지방관이나 신하들보다 높인 것을 다 말하고 또 하만이 이르되 왕후 에스더가 그 베푼 잔치에 왕과 함께 오기를 허락 받은 자는 나밖에 없었고 내일도 왕과 함께 청함을 받았느니라 (11, 12)

 

 하만이 모르드개에게 한바탕 하고 싶었지만 그보다 더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게 뭡니까? 자랑입니다. 먼저 자기의 큰 영광을 자랑합니다. 여기서 큰 영광이라는 표현은 하나님께 쓰는 표현입니다. ‘큰 영광중에 계신 주 나 찬송합니다. 영원히 계신 주 이름 나 찬송합니다.’라는 찬송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기에게 씁니다. 하나님이 받으셔야할 표현을 자기에게 쓰고 하나님께 돌려야할 것을 자기가 취하는데, 전혀 두려움도 없고 거침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자녀가 많은 것을 자랑합니다. 자랑 중에 술 많이 마시는 것 자랑처럼 어리석은 자랑이 없는데 자녀 많은 것 자랑이 이와 비슷합니다. 사람 생명이 자기마음대로 되는 것입니까? 주셔서 받았을 뿐인데, 자기 능력으로 된 것처럼 자랑합니다. 교만의 속성은 잘된 것은 전부 내 덕이고 못된 것은 전부 남 탓입니다. 이것이 교만의 본성입니다.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은 가급적이면 남의 공으로 돌리고 정말 저 사람의 잘못 같아 보이더라도 거기에 혹시 내 부덕(不德)이 있지 않은가 자신을 반성합니다.

 다음으로는 왕이 자기를 들어 모든 지방관이나 신하들보다 높인 것을 자랑합니다. ‘누구누구보다 잘 났다’ 이겁니다. 아직 성숙하지 못한 사람은 남들과 비교 속에서 우월감을 가지려고 애를 씁니다. 타락한 인간의 본성입니다. 사람과 비교에서 우월하다해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하나님께 맞춰야 합니다. 자꾸 사람과 비교하지 마세요. 말씀을 읽으면서 말씀에 나 자신을 비춰보는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그래야 이 문제 많은 본성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왕후 에스더가 왕과 함께 오기를 청한 것은 자기밖에 없다고 자랑합니다. ‘나 밖에 없다!’ ‘다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 정말 겸손한 사람은 그런 말 할 필요성을 못 느낍니다. 정말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하겠습니까? 성령이 임하시면 가장 먼저 그 사람을 굴복시킵니다. 이사야를 보십시오. 밧모섬에 사도요한을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죽은 듯 거꾸러졌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최고입니다. 그래서 자기 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고 살고 그 생각이 입으로도 나오고 행동으로도 나옵니다.

 이런 자랑 늘어놓을 때 하만은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 자랑할 때 기분이 좋지요. 그런데 그게 위험한 것입니다. 곧이어 가슴을 칠 일이 찾아옵니다. “교만이 오면 욕도 오거니와 마음이 겸손한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잠 11:2)고 하셨습니다. 교만 뒤에는 반드시 넘어질 일이 찾아오고 욕될 일이 찾아옵니다.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자랑을 늘어놓으며 교만을 떨었을 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저는 순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자랑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얼마 지나지 않아 꼭 곤두박질 칠 일이 생깁니다.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몇 번 겪고 나니까 그것이 깨달아집니다. 그런데 그것이 은혜입니다. 교만에 흠뻑 젖어 살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하만은 아무리 자랑을 일삼고 교만에 빠져 살더라도 하나님께서 막으십니까, 내버려 두십니까? 내버려 두십니다. 오히려 자랑거리가 더 생기도록 하십니다. 하만을 보십시오. 자랑거리가 많지 않습니까? 이것이 심판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심판이 가동(稼動)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만은 이미 기회를 놓친 사람입니다. 기회가 지나가면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교만하든 자랑하든 하나님 영광을 취하든 간에 내버려 두십니다. 이것을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3. 악인의 악함을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

 

 한참 자랑을 늘어놓은 다음 하만은 모르드개 때문에 기분이 상했던 일을 말합니다. 기분이 좋다가도 모르드개만 보면 좋던 기분 싹 사라지고 전혀 만족스럽지 않은 마음이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정도 되면 이미 마음에 중병이 걸린 것입니다. 하만의 말을 들은 아내 세레스와 친구들이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의 아내 세레스와 모든 친구들이 이르되 높이가 오십 규빗 되는 나무를 세우고 내일 왕에게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매달기를 구하고 왕과 함께 즐거이 잔치에 가소서 하니 하만이 그 말을 좋게 여기고 명령하여 나무를 세우니라 (14)

 

 해결책이라고 내놓는 것이 높은 장대를 세우고 왕에게 허락을 받아 모르드개를 매달아 죽이자고 합니다. 잔인(殘忍)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만 주변에는 어째서 바른 말 해주는 사람은 없고 이런 사람들뿐이란 말입니까? 누구 잘못입니까? 자기 잘못입니다. 처음에야 왜 없었겠습니까? 바른 말 하는 사람도 있고, 온유한 사람도 있고, 진중한 사람도 있고, 정의감이 불타는 사람도 있었겠지요. 그런데 하만이 그런 사람 받아줄 그릇이 못 되잖습니까? 그려면 결국 내침을 당하든지 자연스레 떨어져 나가든지 합니다. 결국 좋은 사람 떨어져 나가고 어떤 사람만 남아요? 비위맞춰 주는 사람 남습니다. 자기 같은 사람 남습니다. 인정사정없고 잔인하고 악한 사람 남습니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닙니다. 내 주변에 상식 없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 내가 평소 상식 없이 말하고 행동하지는 않았는가,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내 주변에 노는 것 좋아하는 사람 많다? 그러면 내가 평소 놀기를 좋아하며 살지 않았나,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하만의 아내와 친구들은 눈엣가시 같은 사람 장대에 매달아 죽이고 마음 편하게 왕후가 베푼 잔치에 가서 즐기라고 조언합니다. 하만은 그 조언대로 높은 장대를 세우고는 왕에게 모르드개 매달기를 허락받으러 갑니다. 나중에 이 장대에 누가 달립니까? 하만 자기가 달립니다. 결국 남을 죽이는 악한 지혜는 자기를 죽이는 악수(惡手)가 되고 맙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지혜는 때로 얼음보다 차고 독사보다 잔인합니다. 자꾸 악한 지혜에 이끌리는 사람이 악인입니다. 전혀 긍휼이라고는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내버려 두십니다. 익명의 하나님께서 에스더나 모르드개가 금식하면서 기도하고 뭔가를 노력할 때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서 간섭하셨는데 하만은 잔인한대로 내버려 두신단 말이지요. 긍휼 없는 심판을 당하도록 하시려는 뜻입니다. 야고보서 2장 13절에 보면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긍휼이 심판을 이깁니다. 그런데 악인은 긍휼히 여기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령을 사모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지기를 구해야할 이유가 이것입니다. 내 심령이 성령으로 채워지면 긍휼한 마음, 불쌍한 마음이 차오릅니다. 아무리 나를 힘들게 하고 못 살게 굴던 사람도 불쌍히 보일 때가 생깁니다. 그러면서 하나씩 풀리는 것입니다. 한순간에 풀리기는 힘듭니다.

 

 

 

맺는 말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령으로 내 심령이 채워져서 타락한 본성인 옹졸함과 교만함과 잔임함을 극복하고 넓은 마음 겸손한 마음 긍휼의 마음으로 살아가시는 주의 백성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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