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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행전강해30 한 길 가는 순례자 
본문 사도행전 28:1-15절, 30-31절 (신약 236) 
날짜 2018-02-04 
설교자 전용표 목사 

 

  대학시절 김해에서 소를 키우는 친구 집에 모여 토론회를 갖기로 하여 밤에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딱 한 번 가봤던 곳인데, 밤 버스를 타고 찾아가려니 가물가물 합니다. 여기다 싶어 내렸는데, 아니었습니다. 타고 온 버스가 막차였습니다. 난감했습니다. 캄캄한 논두렁길을 걸어서 저 멀리 가로등이 보이는 큰 길로 걸어 나오는데 앞에 시커먼 것이 나타났습니다. 크기가 송아지만 했습니다. 외길이라 피할 곳도 없었습니다. 점점 다가오는데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개였습니다. 태어나서 그렇게 큰 개는 처음 봅니다. 원래 상대의 크기는 내 속에 있는 두려움의 크기와 비례하는 법이지요. 절로 기도가 나오더군요. ‘주님, 살려주세요!’ 뭐 장황한 기도 그런 것 없습니다. 그 기도밖에 안 나와요. 전봇대처럼 제자리에 박혀 있는데 송아지만한 개가 저를 스치고 지나갑니다. 한마디 하더군요. ‘모르는 사람이네!’

 그 순간 묘했습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뭔가 나와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이 너무나 선명했습니다. 분명 혼자인데 혼자가 아닌! 그런 느낌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돌아갈 때도 있고 정면 돌파할 때도 있기도 합니다만 진리를 좇아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길이어서 그런 측면에서 보면 돌아갈 수 없는 외길입니다. 우리는 한 길 가는 순례자들입니다. 이 길에 어려움도 많지만 특별한 은혜도 많습니다. 주님이 한 길 가는 순례자들에게 약속하신 말씀들이 많습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겠다, 의로운 오른 손으로 붙들리라!’ 그런데 막상 문제를 만나면 말씀은 분명한데 주님의 손길은 희미할 때가 많습니다. 너무 좁게 보기 때문입니다. 넓게 봐야 합니다. 주님의 손은 그 모양이 여러 가지여서 크게 봐야 보입니다. 마치 차를 타고 구불구불 길을 올라 저 산 높은 곳에 이르면 마을과 마을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길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눈에 들어오는 것과 같습니다.

 

 

 

1. 바울이 독사에 물리다

 

 바울을 포함해 배에 탄 276명의 사람들은 유라굴로 광풍에 휩쓸려 보름동안 표류하며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지만 마침내 구조됩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말씀대로 되었습니다. 바울을 포함한 276명이 구조된 섬은 멜리데(지금의 몰타. 뜻은 ‘피난처’ 오늘날 삼십 삼만 오천 명 주민 100%가 기독교인)라는 섬입니다. 초죽음이 된 바울 일행을 섬의 원주민들이 보고는 몸을 녹일 수 있도록 불을 피워주었습니다. 바울이 장작더미를 불속에 넣는데 나무속에 들어있던 뱀이 그만 바울을 물었습니다. 독사였습니다. 그때 원주민들이 그럽니다. “진실로 이 사람은 살인한 자로다 바다에서는 구조를 받았으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함이로다”(4) 뱀에 물린 바울이 쓰러져 죽을 줄로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도 아무렇지도 않자 원주민들은 적이 놀라면서 바울을 신(神)이라 합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 섬의 추장 보블리오는 바울을 자기 집으로 영접해서 극진히 대접합니다. 그런데 보블리오의 부친이 열병과 이질에 걸려 꼼짝 못하고 누워있는데 바울이 들어가서 손을 얹고 기도한즉 나았습니다. 소문을 듣고 섬에 아픈 사람들이 몰려와서 고침 받고 믿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누가가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멜리데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놓치지 않고 기록한 이유가 있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7~18절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지는 약속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7,18)

 

 어찌 보면 굉장히 힘이 되는 말씀이지만 어찌 보면 부담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독사 잡을 수 있습니까? 독사에게 물려도 죽지 않을 자신 있습니까? 믿는 자들에게 이런 표적이 따른다고 하십니다. 중학교 때 친구 중에 항상 엉뚱한 질문을 하는데, 꼭 성경 가지고 질문을 하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 이 구절을 가지고 묻습니다. “야, 니 마가복음 16장 17, 18절 말씀을 믿고 독사 손을 잡을 수 있나? 말씀 믿고 독 한 컵 마실 수 있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확인해 보려다간 신문에 날 수 있습니다. 오고 오는 만대(萬代)에 분명한 신앙과 교훈을 주시기 위해 사도시대에는 문자적 성취를 한시적으로 허락하셨지만 이후 세대는 다릅니다. 이 말씀은 이런 의미입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집안이 좋습니다. 명문대를 나왔습니다. 남편이 돈을 많이 법니다. 미모도 좋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부러워하면서도 부담스러워 합니다. 주변에 신앙생활 하는 분들이 있어서 교회 다녀보라, 신앙생활 해보라고 권면을 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큰 병이 찾아왔습니다. 주일도 아닌데 예배당엘 갔습니다. 낯선 예배당에 앉아 ‘하나님’하고 부르는데, 왈칵 쏟아졌습니다. 저 밑바닥에서부터 하염없이 복받쳐 오르는데 주체할 수 없습니다. 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기도가 나왔습니다.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또 그 다음 날에도 복받쳐 오르는 울음이 계속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후부터 이상한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전에처럼 고자세가 아니라 저자세가 되었습니다. 부담스러워 가까이 오지 않던 사람들이 가까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을 따듯하게 대하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아프면서 겪은 일을 이야기해 줍니다. 그랬더니 게 중에는 마음을 열고 믿는 사람이 한 둘 생겨났습니다.

 어떤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당하지 않는다는 말씀은 믿음으로 살면 그 어떤 불행한 일도 결코 불행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불행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9장 2절에 보면 나면서 앞 못 보는 사람에 대해 제자들의 관심은 누구의 죄 때문에 저 사람이 저런 불행한 인생이 되었는가에 있었습니다. 사람의 관심은 항시 이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 대답하셨습니다. 누구 때문에 불행이 왔는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시면 불행도 하나님 영광이 드러나는 조건이 될 수 있다, 하나님께는 불행은 불행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셨습니다. 바울이 뱀에 물렸을 때 사람들이 벌 받았다 하였지만 그 일은 멜리데 사람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2. 세속의 심장부 로마에 입성하다

 

 11절부터 15절까지는 바울일행이 멜리데에서 로마까지 간 여행경로를 구체적으로 적고 있습니다. 멜리데에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출발하여 시실리 섬에 있는 수라구사로 갔다가 거기서 남풍을 맞으며 뱃길로 보디올에 입항합니다. 보디올은 로마에서 220km 떨어진 곳인데, 거기서 5일 정도 아피아대로(Via Appia Antica)라 불리는 포장도로를 걸어서 로마로 들어갔습니다. 아피아대로는 돌을 깔아 만들었는데 이탈리아 반도 남북을 횡단하는 로마시대 가장 중요한 도로 중 하나입니다. 이곳으로 군대가 출정하고, 전세계의 물품이 로마로 수입되어 들어왔습니다. 특히 이 도로는 로마의 위대한 장군들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행진(凱旋行進)하며 들어오던 도로입니다. 전쟁에서 포획한 노예들을 굴비 엮듯 엮어서 끌고 들어올 때 로마시민들이 일제히 달려 나와 꽃을 뿌리며 환호성을 지릅니다. 개선행진을 하던 로마의 장군들은 죽어서도 아피아대로 변에 대리석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집채만 한 무덤 속에 묻혔습니다.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그야말로 아피아대로는 로마의 힘과 번영을 상징하던 도로입니다.

 로마장군들이 개선행진하며 들어오던 아피아대로를 바울은 죄수의 신분으로 호송되어 들어옵니다. 거기에는 환호성 지르는 군중은 없었습니다. 단지 소식을 듣고 마중 나온 믿음의 형제 몇 명이 있었을 뿐입니다. 15절을 봅시다.

 

그 곳 형제들이 우리 소식을 듣고 압비오 광장과 트레이스 타베르네까지 맞으러 오니 바울이 그들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담대한 마음을 얻으니라(15)

 

 몇 명의 믿음의 형제들의 환영이 바울에게는 적지 않은 위로가 된 듯합니다. 그러나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수많은 사람을 죽이고 빼앗아 돌아오는 장군을 향하여는 환호성을 지르는데, 구원의 복음, 평화의 복음을 가지고 오는 사람을 향하여는 관심조차 없습니다. 묵자(墨子; 주전 468~376)가 그랬습니다. ‘한명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고 열 명을 죽이면 인간백정이 되는데, 수만 명을 죽인 사람은 도리어 영웅이 되니 이 어찌 된 일인가?’ 빼앗는 것도 조금 빼앗으면 도둑이나 강도가 되지만 법을 이용해 엄청나게 빼앗으면 영웅이 됩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영웅이란 칭호를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많이 죽이거나 많이 빼앗은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영웅이 돋보이는 길이 아피아대로입니다. 거기에 바울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초라한 발걸음이 250년 후 세속도시 로마를 무너뜨립니다. 다메섹에서 예수 앞에 거꾸러졌던 바울이 복음으로 로마를 거꾸러뜨립니다. 그 십자가의 복음, 그 진리의 복음 앞에 창칼로 세상을 짓밟던 로마가 항복을 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로마의 장군들은 학살자일 뿐입니다. 진정 개선장군은 죄수의 몸으로 초라하게 입성했던 복음의 전달자 바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내딛는 초라한 발걸음이 진리를 좇아 걷는 발걸음이라면 얼마든지 초라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은 그 발걸음을 위대한 발걸음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누가 세상을 거꾸러뜨립니까? 예수 앞에 거꾸러진 사람입니다.

 오늘 눈물로 걸어간 이 길이 내일은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는 영광의 길이 될 것입니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라’(시126:6)고 하셨습니다.

 

 

 

3. 한 길 가는 순례자

 

 결국 복음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데, 묵묵히 한 길 가는 순례자를 통해 이루어 가십니다. 30~31절은 바울의 마지막 모습이자 사도행전의 마지막 모습입니다.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30,31)

 

 사도행전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을 맺고 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이라는 폭발적인 기세로 시작했던 책 치고는 마지막이 초라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이 모습이야말로 위대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바울의 인생 1막은 화려했습니다. 가문 좋고 문벌 좋고 인맥 좋은 전도유망한 젊은이로 힘을 마음껏 과시하며 살았습니다. 인생 2막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 앞에 거꾸러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을 깨닫고 세상 구석구석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두들겨 맞고 위협 당하고 기적도 경험하였습니다. 파란만장한 모험이었습니다. 이제 인생 3막입니다. 재판을 앞두고 가택연금(家宅軟禁)이 되었습니다. 셋집에 거합니다.

 그러나 어디 한 곳 움츠러듦 없이 당당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합니다. 예수에 관한 모든 것을 거침없이 가르칩니다. 바울이 언젠가 표대를 향하여 달려간다(빌3:14)고 하였는데, 그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흔들림 없이 완주해 내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몫을 다했습니다. 어쩌면 스데반이 죽음으로써 전달된 바통을 소아시아와 유럽인들에게 전달하였습니다. 그것이 돌고 돌아 오늘 우리에게까지 온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바울에게서 바통을 전달받아 피와 땀과 눈물로 달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릴레이주자입니다. 릴레이 경주에서 가장 안타까운 순간은 일등으로 달리던 팀이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건네주다가 놓쳐서 그만 뒤처지는 때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진 몫이 있습니다. 교회적으로도 있고, 한국교회적으로도 있으며, 가정적으로 있습니다. 그 몫을 다 해야 합니다. 언젠가는 로마가 복음 앞에 무너졌듯이 흑암에 있던 조선이 복음으로 밝아졌듯이 우리가 우리 몫을 감당할 때 똑같은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조선 말기에 이수정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수정은 장원급제하여 관리가 되었는데 일본에 신사유람단(1880년 12월 근대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파견된 관리들)으로 갔다가 거기서 복음을 듣고 회심(悔心)을 합니다. 일본에 와있던 미국인선교사들을 도와서 성경을 한문으로 번역하는 일을 돕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선교부에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씁니다. 함께 일하던 미국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이수정의 편지는 미국의 선교잡지 두 곳에 실리게 됩니다. 보통 사람들은 관심도 없을 내용이지만 선교잡지에 실린 이수정의 편지를 누가 읽느냐? 바로 20대 초반의 젊은 청년 ‘언더우드’가 읽습니다. 감동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조선의 마게도냐인을 통해 나를 조선으로 부르시는구나! 강한 이끌림에 매여 1885년 4월 5일 조선에 선교사로 옵니다. 이수정의 편지가 움직인 사람이 한 사람 더 있습니다. 테네시 의과대학생 ‘존 헤론’이라는 청년입니다. 존 헤론은 테네시 의과대학 개교 이래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한 수재였습니다. 학교에서 교수로 남아달라고 부탁을 하였지만 조선에 의료선교사로 자원하여 옵니다. 오기 직전 결혼을 하였는데 그들의 신혼여행이 선교가 된 격입니다. 그렇게 청춘을 바치고 인생을 바쳤습니다. 알렌선교사와 함께 제중원(濟衆院;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병원으로 ‘광혜원’에서 이름변경)에서 의료선교를 합니다. 이 제중원이 지금의 서울대학교병원이 되었습니다. 헤론 선교사님은 제중원에서 매일 300명 정도의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과로입니다. 거기다가 지방에까지 가서 환자를 돌봅니다. 그러다가 5년 만에 과로로 약해진 몸에 환자로부터 이질이 옮아 죽게 됩니다. 1890년 7월 26일 33세의 아까운 나이였습니다. 그렇게 헤론 선교사가 죽고, 미망인이 된 아내 게일은 어린 두 딸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끝까지 남아서 죽을 때까지 선교를 감당합니다. 그분들이 서울 마포 양화진선교사묘역에 묻혀 있습니다. 언더우드 선교사님 가정은 4대를 이어가며 조선을 위해 헌신하였습니다. 아버지가 헌신하다 죽으면 그 아들이 이어받고 그 아들이 하다 죽으면 또 그 아들이 이어받고 하였습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언더우드 4대가 묻혀 있습니다.

 

 

 

맺는 말

 

 여러분, 우리의 몫이 있습니다. 누군가 희생하고 헌신하여 우리에게 바통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우리 몫을 잘 감당하고 이 바통을 누군가에게 물려주어야 합니다. 잘 물려주어야 합니다. 이 믿음의 바통에는 피와 땀과 눈물과 애환이 서려 있습니다. 놓치면 곤란합니다. 잘 달리고 잘 물려주어야 합니다. 이 믿음의 경주는 분명 힘들지만 거기에는 뱀을 집어 올리며 어떤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당치 않게 하시는 주님의 특별하신 은혜가 함께 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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