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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행전강해29 소망이 되는 사람 
본문 사도행전 27:22-44 (신약 234) 
날짜 2018-01-28 
설교자 전용표 목사 

 

    아는 형님 한 분이 있습니다. 한참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다닐 중학교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는 공장을 다니시는데, 건강이 좋지 못하고 밑으로 여동생만 셋 있습니다. 새벽으로 신문을 돌리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친구들은 대학 간다고 난리들일 때 일찌감치 대학의 꿈을 접고 고등학교 졸업 후 직장을 구해 다녔습니다. 군에 갔다 왔을 때 어머니는 더 이상 일을 하실 수 없을 정도의 건강이 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어려움이 닥쳤습니다. 형은 두 가지 세 가지 일을 해 가면서 벌었습니다. 동생들 학비를 댔습니다. 억척이었습니다. 그리고 돈을 조금 마련해서 문방구를 열었습니다. 동생들은 다 대학에 입학시켰습니다. 형의 학창시절 20대 자기인생이 없었습니다. 군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전역 후 우리교회에 나왔습니다. 신앙생활 후 굉장히 밝아졌습니다. 열심히 청년회 활동을 하고 신앙생활을 알차게 하였습니다. 결혼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건강 좋지 못한 어머니에 책임질 동생 셋에 누가 오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후배 중 하나가 이 형과 결혼하였습니다. 당시 우리청년회의 충격뉴스였습니다. 형과 결혼한 후배는 남자들이 줄을 섰던 아가씨였습니다. 미모가 뛰어났고 대학 나와서 안정된 직장을 구해 다니던 여자청년이었습니다. 나중에 이 후배가 남편을 대학공부까지 시키는 것을 보았습니다. 현대판 평강공주라고 해야 할까요?

   인생을 항해라 한다면 역경(逆境)은 풍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동일하게 햇빛이 비취고 비가 내리듯이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가 풍랑을 만납니다. 믿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인지 복음서에는 제자들이 배타고 가다가 풍랑만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타신 배가 풍랑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찍 풍랑을 만납니다. 어떤 사람은 한평생 순탄하게 살다가 늘그막에 풍랑을 만납니다. 어떤 이는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주저앉지만 어떤 이는 풍랑을 이겨내고 다른 이에게 소망이 되기도 합니다. 바울이 그러했습니다.

 

 

 

 

 

1. 소망의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은 바울이 황제의 법정에 재판받으러 가는 도중 풍랑을 만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체포된 후 여러 차례 재판을 받습니다. 재판을 받을 때마다 자신의 간증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전파합니다. 재판을 받을수록 무죄임이 드러나지만 유대인들의 압박에 교묘하게 타협하는 총독들로 인해 풀려나지 못합니다. 바울은 어쩔 수 없이 황제의 법정에 상소를 합니다. 그리하여 백부장이 이끄는 로마 군인들에 의해 뱃길로 로마로 출발합니다. 처음에는 아드라뭇데노라는 배를 타고 가다가 구브로 미항에서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탑니다. 당시는 정기여객선이 없었습니다. 그저 무역선을 얻어 타고 가는 것입니다. 이미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서 항해가 어려운 시기가 되었는데 백부장은 선장의 말을 듣고 무리하게 항해를 강행합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잘 갔습니다. 그러나 이내 유라굴로라는 풍랑을 만나서 배가 표류(漂流)하기 시작합니다(14). 죽음을 넘나드는 지옥 같은 시간이 14일간 계속됩니다. 20절을 볼까요?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20)

 

 

   저마다 목적과 소망을 담고 항해를 시작했지만 풍랑으로 인해 원하는 곳으로 가지 못합니다. 살 소망까지 버려야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 이야기입니다. 내 원하는 대로 인생을 살지 못합니다. 어쩌다보니 이런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온갖 장애물을 만나 더디 갑니다. 급기야 큰 풍랑을 만나 다 포기하고 싶어집니다. 죽고 싶은 심정뿐입니다. 그런데 다 같이 당하는 일인데도 바울만큼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 소망을 불어넣습니다. 그 비결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3,24절을 봅시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23,24)

 

 

   바울과 함께 배에 탔던 사람들은 거센 파도 소리, 흉흉한 바람소리, 퍼붓는 빗소리만 들었습니다. ‘너는 이제 끝장이야, 다시는 새로워질 수 없어, 더 이상 좋아질 가능성은 없어, 네가 바라던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인생은 없어, 그런 신앙, 그런 교회 없어, 이제 늦었어!’ 절망의 소리입니다. 그것만 들으면 절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절망의 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세미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은 고비 때마다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고린도에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때, “두려워하지 말고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해롭게 할 자 없을 것이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루살렘 올라갈 때에도 들었습니다. 바울이 변화되기 전에는 붙들 줄이 많았던 사람입니다. 학연(學緣)도 있었고, 대제사장 인맥도 있었고, 집안도 있었습니다. 변화되고 난 뒤 바울은 세상 줄이 다 끊어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때부터 바울이 붙들 수 있는 줄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하나님 줄입니다. 주님의 음성입니다. 그런데 이 음성이 묘약(妙藥)입니다. 몸이 죽을 지경이 되어도 이 음성을 들으면 다시 살아납니다. 낮에 만났던 험악한 사람들이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퍼붓고 위협을 가했어도 이 음성을 들으면 다시 용기가 생깁니다. 돌에 맞아 피투성이 되는 충격을 겪었어도 이 음성을 들으면 공포가 변하여 찬송이 됩니다.

  살면서 풍랑을 만납니다. 물질의 풍랑, 건강의 풍랑, 가정문제의 풍랑, 우리를 흔들어놓습니다. 그때 내 인생을 잃어버리지 않을 닻은 주님과의 교제입니다. 말씀입니다. 주님의 음성입니다. 이것이 살길입니다. 다른 것이 다 끊기는 것이 오히려 다행입니다. 인생최고의 기술은 ‘주님의 음성을 듣는 기술’입니다.

 

 

 

 

 

2. 소망의 사람은 가야할 바를 압니다

 

   견뎌내지 못하고 포기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살아야할 이유가 약한 사람들입니다. 이겨내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뭔가 살아야할 이유가 강한 사람들입니다. 오늘 유라굴로 풍랑 속에서 모두가 공포와 절망으로 떨고 있을 때 주님께서 바울에게 들려주신 음성은 바울이 감당해야할 사명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24절을 다시 봅시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24)

 

 

   첫째는 바울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한다는 말씀이고, 두 번째는 이 배에 탄 사람 전부를 너에게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상황은 하나님의 약속이 물 건너 간 것처럼 보이는 상황입니다. 이것이 시험입니다. 여러분, 때로 하나님의 약속이 깨어지는 듯한 상황이 옵니다. 그러나 그 상황을 넘어가야 합니다. 자손을 주신다는 약속이 물 건너 간 것처럼, 완전히 인간의 소망이 끊어졌을 때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실력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신뢰자(信賴者)를 찾으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어내야 합니다. 바울은 다시 로마를 바라봅니다.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는 꿈을 꿉니다.

   그리고 배 안에 탄 275명의 목숨을 맡겨주셨다고 하였습니다. 난파선에서 구원의 소망 없이 죽음 앞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을 돌 볼 책임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바울에게 있어서 자기의 목숨을 걱정하는 것은 차라리 사치였습니다. 할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할 일을 깨닫는 순간, 사명을 느끼는 순간, 풍랑은 넘지 못할 절망의 산이 아니라 반드시 넘어가야할 필수코스가 됩니다. 바울은 그들을 돌보기 시작합니다. 불안과 공포 속에 있는 그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시작합니다. 희망적인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22절을 봅시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 뿐이리라 (22)

 

 

   할 일을 깨닫는 사람, 사명을 깨닫는 사람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 딛기를 시작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힘을 돋우는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위로의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런 사람 옆에 있으면 절로 힘이 납니다. 어두움이 물러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다시 사명을 붙드십시오. 우리가 왜 살아야 합니까? 아파트 평수 늘리기 위해서입니까? 남부끄럽지 않게 살기 위해서입니까? 그것 때문에 자존심 구겨가면서 삽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사명을 붙들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결국 주님 앞에서는 맡겨주신 사명을 감당한 것이 남을 것입니다. 때로 당한 아픔으로 인해 회의에 빠질 때도 있고 사명을 잠시 내려놓을 때도 있습니다만, 우리가 다시 붙잡아야할 것은 사명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을 무의함과 공허함에서 건져줍니다.

 

 

 

 

3. 소망의 사람에게 주도권을 맡기십니다

 

   오늘 마지막으로 나누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 주신 사명을 발견한 사람이 인생의 주도권(主導權)을 쥔다는 사실입니다. 주도권은 다스려내는 능력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이리저리 휘둘리는 인생이 아니라 주도권을 잡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기 스스로도 다스려내지 못합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말도 다스리지 못합니다. 감정도 다스리지 못합니다. 그러니 인생을 휘둘리며 살 수밖에요. 무슨 소망의 사람이 될 수 있나요? 그러나 27장의 사도바울을 보십시오. 그는 풍랑 만난 배 안에서 인생의 주도권을 잡습니다. 한번 볼까요. 31,32절을 봅니다.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아니하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 이에 군인들이 거룻줄을 끊어 떼어 버리니라 (31,32)

 

 

   배가 암초에 걸리자 노련한 사공들이 파도에 배가 쓸리기 전에 자기들만 먼저 살겠다고 거룻배(구명정)을 타고 빠져나가려고 할 때 바울이 모두가 운명공동체이니 저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하라고 시킨 것입니다. 누구에게요? 로마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바울이 지금 무슨 신분입니까? 미결수 죄수의 신분입니다. 로마 백부장과 군인은 호송하는 사람들이고요. 누가 누구의 말을 들어야 정상입니까? 거기다가 33절 이하를 보면 바울이 배안 사람들에게 음식 먹으라 권합니다. 이제 내일이면 다 살 것이니 아끼지 말고 먹으라, 먹고 남은 것은 바다에 버리라! 이 판단이 얼마나 어려운 판단입니까? 그런데 죄수가 말하는데 사람들이 듣습니다. 또 35절을 보면 먹는데, 바울이 축사한 뒤에 먹습니다. 호송되어 가는 사람에게 기도 받는 이 모습은 얼마나 특이합니까?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처음에는 미결수 신분으로 호송되어 가는 바울의 말을 아무도 귀담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모두가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중심으로 이 배를 운행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배에 무게중심은 선장이 아닙니다. 백부장이 아닙니다. 일등 항해사가 아닙니다. 죄수신분의 바울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당신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사람, 당신의 음성을 철저히 신뢰하고 따르는 사람, 진리에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을 무게중심으로 삼으십니다.

   처음에는 목소리 큰 사람 뜻대로 일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지나 보십시오. 기도하는 사람의 뜻대로 흘러가게 됩니다. 사명에 붙들린 사람 뜻대로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겨서 주도권을 잡으려 들지 마십시오. 주님과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그러다보면 마음을 다스릴 수 있게 되고 말을 다스릴 수 있게 되고 감정을 다스릴 수 있게 되고, 나중에는 절로 무게추가 기울게 됩니다. 소망의 사람으로 역할을 하게 됩니다.

 

 

 

 

 

맺는 말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소망 또한 간절해 집니다. 다시 주님과 교제를 붙드십시오.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다시 사명을 붙드십시오. 어두운 세상에 소망의 등대로 쓰임 받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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