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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행전강해27 예수의 길을 가는 사람 
본문 사도행전 21:17-36 (신약 225) 
날짜 2018-01-14 
설교자 전용표 목사 

 

 

 

   유독 잊히지 않는 길이 있습니다. 특별한 추억이 깃든 길들은 잘 잊히지 않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형과 함께 들에 갔던 길이 잊히지 않습니다. 들에 갔다가 수박농사 지으시는 동네 어르신이 우리에게 수박을 선물로 주셨는데 한명 당 두 개씩을 주셨습니다. 그거 들고 오다가 작은 개울 건너 언덕길 오르다가 떨어뜨려서 깨졌습니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아깝던지요? 그 길! 잊히지 않습니다. 또 한 길은 어머니 따라 영주 장(場)에 가던 길입니다. 어머니가 동네에서 놀던 저를 떼놓고 영주 장에 가신다고 가르마 같은 들길을 지나 버스가 서는 윗마을로 가셨습니다. 아이들과 놀다가 집에 들렀는데 어머니가 안 계신 것입니다. 순식간에 서러움이 눈물로 맺혀 어머니를 찾아 들길을 내닫는데, 다행히 어머니가 저 만치 가고 계셨습니다. 울며불며 좇아온 저를 어머니는 같이 데리고 가 주셨는데,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장엘 갈 수 없다하시며 개울물에 세수시켜 치맛자락으로 닦아 주셨던 그 길을 차마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길들을 수년 전 가족들과 가서 둘러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손바닥만 하더군요. 어렸을 적엔 그토록 커 보이고 높아보이던 것들이 나지막한 언덕이고 오솔길 정도였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주님 곁에 가서 우리가 살아온 지난날을 돌아볼 때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오르기 힘들었던 산이 나지막한 언덕으로 보이겠지요? 그리고 의미 있게 여겼던 길이 실은 있으나 마나한 길이었음을 알고 허탈해 할 것이고, 중요치 않게 여겼던 길이 실은 가장 중요한 길이었음을 알고는 놀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의미 있는 길이 남는 길입니다.

 

 

 

 

 

 

1. 예수의 길 : 복음을 위하여 스스로 종이 되는 길

 

 예루살렘에 올라간 바울은 예루살렘교회 지도부를 방문합니다. 거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합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19~20절상반절을 읽겠습니다.

 

 

바울이 문안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이방 가운데서 하신 일을 낱낱이 말하니 그들이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19, 20a)

 

 

 바울은 자기가 한 일을 말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를 통하여 하신 일을 말했습니다. 참된 신앙은 주어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부족한 나를 통해 이러이러한 일을 하셨다!’ ‘내가 어떻게 하였는데....!’하면서 ‘자기’를 주어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말하는 사람도 이런 신앙의 성숙이 필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듣는 사람의 신앙 성숙도 필요합니다. 누군가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서 하신 일을 털어놓을 때 그 사람이 대단한 양 높이거나, 아니면 ‘뭐 자기만 잘 났고, 자기만 신앙이 좋나 뭐?’ 그러면서 그 사람을 시기해서는 곤란합니다. 미숙한 신앙입니다. 성숙한 신앙은 듣고 그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이런 것은 일부러 그렇게 보이고 싶어서 신경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상한 음식 먹으면 고약한 방귀냄새 나고 단고구마 먹으면 방귀냄새가 달듯이 평소에 마음에 담긴 것이 나오는 법입니다. 평소에 내 속에 그저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담겨 있으면 저절로 주어가 하나님이 되고 주님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 십자가 지셨던 예수의 길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선교보고가 끝나자 예루살렘교회 형제들이 한 가지 염려스런 이야기를 합니다. ‘율법주의성향이 강한 강경파 유대인들은 바울 당신이 모세를 배반하고 할례도 행하지 말고 구약의 관습은 전혀 지킬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고 다닌다고 오해하고 있기에 절대로 당신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묘안(妙案)을 제안합니다. 결례를 행해야할 사람이 네 사람 있는데 이들을 데리고 성전으로 가서 결례를 행하고 그 비용을 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강경파 유대인들이 보고 ‘아, 바울도 율법과 관습을 지키는구나!’라고 오해를 풀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위기모면용 처세술(處世術)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예루살렘에 올라온 사람입니다. 구차히 살려고 이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자신으로 인해서 복음이 오해를 사고 그 길이 막히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내린 결단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19~22절에서 잘 밝히고 있는데 거기에 보면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율법이 최고인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저것들 아직 율법이 폐지된 줄도 모르고...’ 이렇게 정죄하지 않고, 그들 곁에 가서 자기도 율법을 최선을 다해 지킵니다. ‘율법 없이 살아온 이방인들’에 대해서는 ‘저것들 무슨 기준도 없고 질서도 없고....’ 이러지 않고, 다가가서 그들처럼 자유롭게 같이 어울립니다. 약한 사람 만나면 그 앞에서 강한 척 하지 않고 같이 약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어렵습니다. 보통은 약자 앞에 강하고 강자 앞에 움츠려듭니다. 어떤 대상을 만나든지 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共感)하기 위해 애씁니다. 이것이 바울이 깨닫고 몸에 익힌 예수의 원리입니다. 이 자체가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을 이해하고 공감하시기 위해서 창조주로서 아예 인간이 되셨습니다. 같이 되시되 죄는 짓지 않으시는 것이 주님의 원리입니다.

 여러분, 잘 난 사람들과만 어울리지 마십시오. 못 난 사람, 지저분한 사람, 꺼려하는 사람과도 어울리십시오. 주님이 낮은 자리에 임하셨듯이 낮은 자와 만나십시오. 낮은 데로 가십시오. 신영복 선생님 글을 읽다보니 이 분 아버지가 교장선생님이셨습니다. 학교에서 1등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을 싫어하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성적이 몇 등 차이 나는 학생입니다. 한 번은 그럽니다. ‘너는 네가 일등이라고 생각하지? 아니야, 1등은 나야! 나도 집이 너 정도만 되면 내가 충분히 이길 수 있어!’ 선생님은 별 웃기는 녀석이라고 웃어넘겼습니다. 얼마 후 그 친구가 며칠 결석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심부름으로 집에 찾아갔습니다. 충격을 받았습니다. 식구들이 집안 여기저기에 너부러져 있었습니다. 며칠을 굶은 분위기였습니다. 그때부터 선생님은 일부러 1등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미안해서! 글을 읽으면서 참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고마운 것은 ‘우리나라에도 이런 분이 계시는구나!’ 해서 고마웠고, 부끄러운 것은 이 분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어서 부끄러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이런 정도로 진리적 차원의 삶을 살아내는데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는 그리스도인인 나는 뭔가?

 여러분, 우리가 강해져야 합니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 강한 사람만이 스스로 종이 되고 져줄 수 있고 내 기준을 내려놓고 저 사람 기준에 맞춰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강하지 못한 사람은 절대 이렇게 못합니다. 바울은 한 영혼이라도 더 얻을 수 있다면 자존심? 내 기준? 뭐 그런 것 내려놓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길입니다.

 

 

 

 

 

 

2. 예수의 길 : 두렵고 떨림으로 사는 길

 

 오늘 본문 27절부터 시작되는 단락을 보면 바울을 박해하는 유대인들이 굉장히 주도적(主導的)이고 바울은 맥없이 당하기만 하고 있습니다. 매우 피동적(被動的)입니다. 악인이 주도권을 잡고 의인은 맥을 못 추는 상황입니다. 세상에는 이런 억울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제 성경의 관점대로 주도권을 잡고 흔드는 이 사람들을 한 번 봅시다. 28, 29절을 읽습니다.

 

 

외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 하니 이는 그들이 전에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바울과 함께 시내에 있음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간 줄로 생각함이러라(28,29)

 

 

 강경파 유대인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 바울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격분한 유대인들은 성전에서 바울을 붙잡아 심하게 두들겨 팹니다.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 있는 바울을 보고는 그가 전에 바울이 드로비모와 함께 시내에 있던 것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까지 데리고 들어갔다고 단정을 하고는 격분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무리들을 충동하여 바울을 두들겨 패는데, 로마 군인들이 와서 개입하지 않았으면 아마 바울은 맞아서 죽었을 정도로 정말 죽이기 위해서 팼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들이 지금 누구의 이름으로 이렇게 하고 있는가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성전에 온갖 장벽을 설치 해 놓고는 여기는 이방인이 절대 들어올 수 없고, 여기는 여자는 들어올 수 없고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을 긋고 편을 가릅니다. 그 기준을 어기는 자는 가차 없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죄하며 쫓아내고 기득권을 유지합니다. 그리고 들어가지도 않은 것을 추측으로 단정 짓고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군중을 선동해서 사람을 패기까지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어째서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합니까? 확신 때문입니다. 내가, 우리가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확신! 기독교식으로 하면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나는 어떻게 하든 무조건 천국 간다는 확신입니다.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는 확신!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확신! 이 확신이 강하다보니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던 간에 다 정당화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패고 죽이려 들면서도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잘못된 종교적 확신, 신앙의 확신이 이처럼 폭력이 됩니다. 이것이 과연 예수의 길입니까?

 여러분, 두려워해야 합니다. 차라리 내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아닌가? 이런 두려움이 있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구원을 검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고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로 구원받은 백성이라 할 수 있겠는가?’ ‘내 중심적인 생각, 판단을 이렇게 수시로 일삼으면서 내가 어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진 자만이 나를 따라올 수 있다하신 주님을 따라갈 자격이 있단 말인가?’ 애통해 하면서 고민하는 사람이 차라리 안전합니다. 죄를 덜 짓습니다. 죄 짓더라도 진실한 회개에 이를 가능성이 큽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의 이름으로 나 자신을 좀 깨뜨리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교회 안에 존재하는 갖가지 장벽도 허무십시오. 정말이지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사용해도 주님이 기분 나빠 하지 않을 교회를 만들어 갑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새로운 형제에게 손을 내미시고, 다가가 어색한 인사라도 나누시고, 주님의 이름으로 지금껏 서먹서먹하게 지낸 성도가 있다면 올 해에는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이렇게 행할 때에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이름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는 특권, 당신의 이름으로 기이한 일들이 마구 일어나는 특권을 부여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길입니다.

 

 

 

 

 

 

3. 예수의 길 : 예수의 흔적을 몸에 새기는 길

 

 무엇이 예수의 길인가? 「예수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책이 예전에는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믿는 친구들과 모이면 이런 주제로 토론도 하고 사뭇 진지하기도 했습니다. 요즘시대는 이런 고민이 사라졌습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무엇이 되고 연봉이 얼마이고, 얼마를 모으고, 이런 것이 중요합니다. 서글픈 현실입니다. 무엇이 예수의 길인가라는 고민이 사라진 기독교는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무엇이 예수의 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를 열심히 믿고 따르고 전하니 결국 어떤 길을 가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바울이 결국 번영의 길, 영광의 길을 갑니까, 고난의 길을 갑니까? 고난의 길입니다. 하나하나 봅시다. 먼저 30절을 봅시다.

 

 

온 성이 소동하여 백성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가니 문들이 곧 닫히더라(30)

 

 

 충동에 자극을 받은 사람들이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어내고 문을 닫아버렸습니다. 부정한 사람을 내어 쫓음으로 성전을 깨끗하게 보존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동족으로부터 부정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고 말았습니다. 35~36절을 봅시다.

 

 

바울이 층대에 이를 때에 무리의 폭행으로 말미암아 군사들에게 들려가니 이는 백성의 무리가 그를 없이하자고 외치며 따라 감이러라 (35,36)

 

 무리들이 얼마나 악을 쓰고 덤벼들며 패는지 로마 군인들이 보호막을 치고 바울을 번쩍 들어서 이송시킵니다. 그렇게 때려놓고도 분이 풀리지 않자 따라가면서 악을 쓰며 외칩니다. ‘저 죽일 놈, 살려둬서는 안 될 놈! 저주 받을 놈!’ 보십시오. 정말 예수처럼 산 사람이 면류관을 받는지 가시관을 받는지? 정말 복음을 전하느라 삶을 바친 사람이 면류관을 받는지 가시관을 받는지? 정말 타협하지 않고 의를 붙든 사람이 면류관을 받는지 가시관을 받는지? 세상풍조를 따르지 않고 구별된 삶을 산 사람이 면류관을 받는지 가시관을 받는지?

 이제 오랫동안 우리의 신앙, 우리의 교회를 병들게 하고 나약하게 만들었던 번영신학(繁榮神學 ; Prosperity theology)을 거둬치워야 합니다. 진정으로 복음을 위해 가는 길에는 가시밭길이 있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불의와 손잡지 않는 길에는 가시밭길이 있습니다. 믿음으로 견디고 버텨야하는 길에 가시밭길이 있습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맞추며 살려는 길에 가시밭길이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 길에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반드시 함께 하는 길입니다. 도울 사람이 없으면 정복군인인 로마의 천부장을 동원해서라도 도우십니다. 도우심이 반드시 있는 길입니다.

 

 

 

 

 

 

맺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젠가 우리가 그분 앞에 서는 날, 그분이 우리에게 보자고 하시는 것이 있을 겁니다. 바로 예수의 흔적입니다. 성한 몸으로는 설 수 없습니다. 고난의 상처 없이 설 수 없습니다. 복음의 상처 없이 설 수 없습니다. 진리로 인해 모욕을 당하고 핍박을 받은 상처 없이 설 수 없습니다. 옳았어도 져야만 했던 상처 없이 설 수 없습니다. 정당했으나 비난받아야했던 상처 없이 설 수 없습니다. 신앙 때문에 참아야했던 상처 없이 설 수 없습니다. 억울해도 침묵해야만 했던 상처 없이 설 수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의 흔적이 내 몸에 새겨지는 시간을 견디십시오. 예수의 길을 가다가 받은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그분 앞에 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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