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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행전강해25 진짜 살이 
본문 사도행전 19:8-20 (신약 219) 
날짜 2017-12-31 
설교자 전용표 목사 

 

 

 

   희한한 식당엘 갔습니다. 식사를 하는 내도록 주인이 손님에게 욕과 잔소리를 쏟아 붓는 식당입니다. 주인이 오더니만 대뜸 하는 말이 “한 번만 말할테니 잘 들어! 내가 먹으라는 순서대로 먹는다! 함부로 먹지 마!” 그럽니다. 물도 안 줍니다. 수시로 ‘쌍시옷’이 날아오고 조금 늦게 먹으면 ‘빨리 쳐○○!’ 그럽니다. 처음에는 너무 어색해서 체할 것 같았지만 다 먹고 나올 때는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식사를 하는 동안 그분의 진심과 정직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집은 자연산 메기를 잡아서 구원주는 집인데, 손님을 많이 받지 않습니다. 최대로 받을 때는 세 테이블만 받습니다. 예약 안하고 가면 안 판단고 가라 그럽니다. 예약한 손님이 도착하면 그때 바로 메기를 잡습니다. 먼저 잡아서 냉장고에 넣어두는 일이 없습니다.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습니다.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가게 안에서 생선비린내라고는 아예 맡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분의 설명을 듣고 있노라면 욕이 구수하게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분이 하는 것은 기술이라기보다는 인생철학(人生哲學)이고 도(道)라는 생각이 들기까지 합니다. 30년 가까이 한 번도 죽은 메기, 양식 메기를 손님에게 대접해 본 적이 없고 손님을 속인 적이 없다고 합니다. 주변에 메기집이 많은데 다들 전성기 지난 시들시들한 모습들입니다. 그 집들도 예전에는 사람들로 붐볐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죽은 메기를 쓰고 강한 양념으로 그것을 덮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동료 입장에서 ‘그러지 말자’고 권하기도 했지만 통하지 않더랍니다. 표 나지 않게 손님이 줄더니 이제는 회생불능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고 합니다. 다 먹고 나올 때 기분이 좋은 이유는 진짜를 만난 흐뭇함 같은 것이라 여겨졌습니다. 진짜가 드문 만큼 진짜를 만나면 기분이 좋아지는 법입니다.

   인생 한 번 밖에 못 삽니다. 기왕 사는 것 진짜로 살아야 하고 신앙생활도 진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흉내 내는 신앙, 신앙의 본질은 놓친 체 껍데기만 붙좇는 신앙은 기쁨을 주지 못하고 능력도 없지만 진짜는 기쁨을 주고 능력도 나타납니다.

   바울이 에베소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였습니다. 더 이상 회당에서 강론을 할 수 없게 되자 바울은 당시 사설학원이던 두란노서원을 빌려서 그곳에서 강론을 합니다. 2년을 줄기차게 강론을 하자 에베소를 포함한 소아시아 지역에 복음이 널리 퍼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손으로 놀라운 능력을 행하게 역사하셨는데, 심지어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귀신이 나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러자 이것을 부러워한 유대인 퇴마사(退魔師; exorcists)들이 바울을 흉내 냅니다. 그중에 유대인 제사장 스게와라는 사람의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이 아마 ‘내가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귀신을 나가라!’ 뭐 이렇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자 귀신이 콧방귀를 끼면서 말합니다.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도대체 너희는 누구냐?’ 너희들은 흉내만 내는 가짜라는 귀신의 조롱입니다. 그런 다음 귀신 들린 사람이 스게와의 일곱 아들을 덮쳤습니다. 스게와의 아들들은 일곱이나 되었지만 귀신 들린 사람을 당해내지 못하고 벗은 몸으로 줄행랑을 치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인해 에베소 사람들은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고 예수의 이름을 높이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점치고 마술하던 자들까지 회개하고는 점치고 마술 행하는데 쓰던 책들을 전부 불사르는 대대적인 청산과 사회변혁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에베소에서 있었던 이 사건은 진짜와 가짜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1. 말씀의 누적이 진짜 역사를 일으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통해 행하신 여러 가지 능력의 역사가 있었고 또 이를 흉내 내는 가짜들이 있었습니다. 한쪽은 능력이 나타나고 한쪽은 오히려 귀신에게 망신을 톡톡히 당하였습니다. 그 차이는 말씀이 누적(累積) 되었는가 아닌가의 차이입니다. 즉 바울을 통해 일어난 능력의 역사는 말씀의 누적이 가져온 역사라는 사실입니다. 9, 10절을 봅시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하지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하거늘 바울이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니라 두 해 동안 이같이 하니 아시아에 사는 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주의 말씀을 듣더라(9,10)

 

 

   기이한 능력이 나타나기 전 두란노 서원에서 날마다 분출되는 줄기찬 말씀의 향연(饗宴)이 있었습니다. 회당에서 행한 석 달 간의 강론까지 친다면 2년 3개월 간 매일 말씀이 강론되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듣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위를 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망치질 몇 번 하는 것과 매일 와서 망치질 하는 것과는 천지차이입니다. 매일 같이 듣고 또 들으면 그 어떤 돌덩이 같던 심령도 뚫어지고 깨어집니다. 냉랭하던 심령도 믿음이 충만해집니다. 성령의 위로를 경험하는 횟수도 적지 않습니다. 찔림 받고 회개하는 일도 자주 일어납니다. 치유되고 결단하고 청산합니다. 구겨졌던 마음이 펴지고 굽었던 생활이 발라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거기다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깨달아지고, 내가 누구인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것이 선명해집니다. 인생이 복잡하거나 꼬이거나 하지 않게 됩니다. 이 자체가 이미 기적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쌓이고 쌓여서 더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신앙은 대박이 아니라 누적입니다. 여호수아 6장을 보시면 여리고 성을 빙글빙글 돌았더니 그 견고한 성 여리고가 허물어졌습니다. 그것은 대박이 아닙니다. 말씀에 순종이 누적된 결과입니다. 매일 한 바퀴 돌고 칠일 째는 일곱 바퀴 돕니다. 돌 때는 침묵해야 합니다. 자신의 소리, 자신의 견해, 자기주장을 접고 오로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돌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마지막 날 제사장의 나팔소리에 맞춰 일제히 소리를 질렀을 때 그 외침은 칠일을 도는 동안 날마다 말씀을 되새김질 하면서 누적(累積)되고 응축(凝縮)된 말씀에 대한 확신의 분출(噴出)이었습니다. 그것으로 게임 끝이었습니다.

   말씀의 누적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말씀이 누적되면 마음이 낫습니다. 인생이 풀립니다. 무슨 약장사 같은 이야기로 들리지 모르나 진정한 말씀이 쌓이면 거기에 놀라운 진리의 힘이 작용함으로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은 말씀의 수레를 타고 다니십니다. 스게와의 일곱 아들은 말씀이 누적되고 말씀에 줄기차게 순종하는 과정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나도 능력을 행하여서 유명해져 보리라는 공명심(功名心)만 있었습니다. 그것이 깨어져야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여러분, 말씀을 누적시키시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농축시키십시오. 그 앞에 내 속에 있는 여리고성이든 내 밖에 있는 여리고 성이든 어떤 것이든 무너집니다. 이것이 진짜 신앙 살이입니다.

 

 

 

 

 

 

2. 손수건과 앞치마가 진실한 증거입니다

 

   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낫고 귀신도 나갔습니다. 놀랍지요.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져봐야 합니다. 왜 하필이면 손수건이고 앞치마입니까? 바울이 가지고 있던 성경두루마리도 있고, 또 그 외에도 손수건 앞치마보다는 더 신앙적인 색채가 풍겨나는 것들은 얼마든지 있는데 하나님께서 능력을 드러내시는 매개체(媒介體)로 손수건과 앞치마를 사용하셨다는 말입니다. 12절을 보면서 이런 물음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12절을 봅시다.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12)

 

 

   앞차마는 바울이 천막 만들 때 입는 작업복이고 손수건은 땀 닦는 수건입니다. 무슨 특별히 신령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것보다 신령한 것은 없습니다. 바울의 앞치마와 손수건은 바울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땀 흘려 일하는 일상생활이 담겨 있는 상징물들입니다. 곧 바울의 일상생활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말씀이 진실하다는 것을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입증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정직과 성실함이 베여있는 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證據)였던 것입니다. 이보다 신령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여러분의 직장생활, 사회생활이 실은 신령하고 거룩한 것입니다. 연봉액수와 상관없이 그 자체가 거룩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죄성이 직장생활, 사회생활을 지옥처럼 만들 때가 있어도 변함없이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손수건과 앞치마를 능력을 베푸시는 매개물로 사용하셨던 이유입니다.

   진짜 신앙은 결국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말씀이 진실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손수건과 아피마가 나에게 있느냐 없느냐로 판가름 납니다. 항상 강조하는 바이지만 나의 신앙이 진짜냐 가짜냐가 판가름 나는 곳은 예배당 안이기보다는 저 직장이고 사회이고 세상입니다.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서만 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증명하기 위해서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를 귀히 쓰셨던 것처럼 우리가 그런 신앙으로 땀 흘려 일할 때 그것을 귀히 보시고 귀히 사용하십니다.

 

 

 

 

 

 

3. 문화변혁의 역사라는 진실한 꿈을 꾸십시오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과 복음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헌신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진리의 말씀에 깊이 잠겨서 사는 경건의 훈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입증해내는 증거로서의 삶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게와의 아들들은 제사장이었지만 이런 것들이 없었습니다. 껍데기였습니다. 우리가 나 자신이 진짜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바라봐야할 것은 사회변혁(社會變革)과 문화변혁(文化變革)입니다. 진짜 신앙은 결국 문화를 변혁시키는 능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7~18절을 봅시다.

 

 

에베소에 사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다 이 일을 알고 두려워하며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고 믿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자복하여 행한 일을 알리며 또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그 책을 모아 가지고 와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사르니 그 책 값을 계산한즉 은 오만이나 되더라(17~19)

 

 

  누적된 말씀과 순종의 역사가 결국 진짜와 가짜가 극명하게 드러나게 하였고, 이것은 많은 사람들의 회심과 나아가서는 에베소 사회 전체의 변혁으로 이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또 점치고 마술하던 사람들은 다시는 그런 우상짓거리에 빠져 살지 않겠다며 그 일을 하는데 쓰던 책들을 모아서 불사르는 청산을 단행하였던 것입니다. 불사른 책값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하였습니다.

   지금 기독교는 세상에 참패(慘敗)하였습니다. 진리의 말씀이 아닌 탐욕의 말씀을 좇았기 때문이고, 진리를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사회를 변화시키고 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으로 전락하였습니다. 존폐위기(存廢危機)라는 말이 거론될 정도입니다. 그렇지만 차라리 지금 다시 꿈을 꿔야 합니다. 복음으로 사회와 문화를 변혁시키고자 하는 꿈을 다시 꿔야 합니다. 최선의 공격이 최선의 방어입니다.

제가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 학내민주화운동이 심각했습니다. 연일 최루탄이 쏟아지고, 대학생들은 시대의 고민, 개인적 고민 등이 얽혀 방황하는 모습들이었습니다. 특히 우리 철학과는 더 심각하고 더 고뇌에 찬 분위기였고 학생들은 밤낮 술에 찌들어 있었습니다. 심지어 ‘교수님, 막걸리 마시면서 토론합시다!’라고 하면 수업도 막걸리수업으로 대체되곤 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를 믿는 친구들과 저는 뜻을 세우고 우리 과를 위해서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큰 성과는 없었습니다. 우리들이 군대에 가 있는 동안 믿는 후배들이 그것을 매일 아침 학과방에 모여서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모임으로 발전시켜 갔습니다. 그렇게 몇 년을 말씀묵상과 기도가 쌓였습니다. 그러자 우리 과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학과 엠티(MT)를 기독교 공동체 탐방으로 진행하기도 하고 엠티기간 중에는 음주가무가 금지되는 규정이 생기기도 하면서 엠티는 알찬 학술토론으로 변해 갔습니다. 좀 더 건설적이고 대안적인 문화들이 만들어진 것입니다. 놀라운 변화였고 우리에게는 뜻깊은 체험이었습니다.

   말씀을 좇아 사는 삶이 누적되고 또 말씀을 좇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거룩한 연대(連帶)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말씀을 좇아 살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를 감추기 때문에 연대를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좇아 사는 사람들은 정체를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여 살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세상 사람들보다 월등한 윤리의식과 양심, 그리고 성실함으로 무장시켜 주십니다. 그러면 거룩한 자신감이 생겨나서 당당해집니다. 이런 사람들이 신앙인이라는 정체성을 밝히고는 직장에서도 서로 연대하고, 교회에서도 더욱 연대하고, 어떤 단체모임 같은 곳에서도 서로 연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직장의 문화를 변혁시킬 것인가를 함께 고민하며 함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변화가 일어납니다. 하나님께서 일어나게 해주십니다. 지금까지는 퇴폐적이고 파괴적이던 직장문화 회식문화에 타협하거나 도망쳤었는데, 이제 서서히 변화를 주고 마침내 승리(勝利)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맺는 말

 

   오늘은 2017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언젠가 내 인생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한 번 사는 인생입니다. 진짜 인생, 진짜 신앙인으로 삽시다. 그리하여 주님의 기쁨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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