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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행전강해24 총체적 신앙 
본문 사도행전 18:24-28 (신약 219) 
날짜 2017-12-24 
설교자 전용표 목사 

 

   어떤 임금이 서로 자기 주장이 옳다고 다투는 신하들에게 교훈하기 위해 코끼리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앞을 보지 못하는 여섯 명의 장님을 불러서 코끼리를 만져보고 무엇인지 말하도록 했습니다. 상아를 만진 자는 코끼리는 코뿔소 같은 동물이라 그러고, 귀를 만진 자는 곡식 까부를 때 쓰는 키라고 그러고, 다리를 만진 자는 절구 방망이라 그러고, 등을 만진 자는 넓직한 평상이라 그러고, 배를 만진 자는 커다란 독(항아리)라 그러고, 꼬리를 만진 자는 굵은 밧줄이라 그럽니다. 서로 자기가 맞고 다른 이가 틀렸다 그럽니다. 누가 진짜 코끼리를 만졌습니까? 모두가 진짜 코끼리를 만진 것은 맞습니다. 나만 맞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 할 수 없습니다. 그럼 누가 코끼리 전체를 만졌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부분만 만졌습니다. 지혜로운 임금은 신하들로 하여금 그 장면을 지켜보도록 하였습니다. 교훈을 주기 위함인데 신하들은 과연 크게 깨닫고 고쳤을까? 의문이 남는 이야기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의 스펙트럼(spectrum)은 아주 넓고 다양합니다. 내가 가진 신앙, 내가 경험한 신앙이 전부일 수 없고, 내가 아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체일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풍성해 지고, 하나님을 깊이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총체적(總體的) 신앙을 가지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러려면 몇 가지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가르친 사건이 이 점을 잘 보여줍니다.

 

 

 

 

 

 

1. 어린아이의 말이라도 들어야

 

   고린도에서 바울을 만나 예수의 제자가 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에베소에 갔습니다. 거기서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유대인 아볼로를 만납니다. 처음 만난 사람입니다. 아볼로는 아주 유창한 언변(言辯)으로 사람들에게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뭔가 2%가 부족해 보입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아볼로를 조용히 불러서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가르쳐주었습니다. 26절을 봅시다.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정확하게 풀어 이르더라(26)

 

 

   아볼로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25절에 나오는데, 그에 앞서 우리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아볼로를 가르치고 아볼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에게 배우는 이 장면이 얼마나 어색한 장면인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장면이 얼마나 어색한 장면인가를 알려면 24절에 소개하는 아볼로의 면면을 좀 입체적으로 들여다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 24절을 봅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24)

 

 

   24절은 좀 장황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먼저 아볼로가 알렉산드리아 출신이라 나옵니다. 알렉산드리아는 로마 다음 가는 대도시이자 학문의 도시입니다. 당시 세계최고의 도서관이 있었습니다. 이 도서관이 불에 타지 않고 남아있었다면 아마 인류문명이 달라졌을 정도로 방대한 자료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대인들이 많았습니다. 남쪽유다가 망할 때 애굽으로 피난 간 유대인들의 후예들입니다. 그들 중에 뛰어난 학자들이 끊임없이 배출됩니다.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도 많아서 알렉산드리아는 안디옥과 더불어 초대교회 신앙의 양대 산맥을 이루게 됩니다. 아마 아볼로는 이런 학문적 맥을 잇는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두 번째로 아볼로는 언변이 좋았다고 합니다. 수사학(修辭學; rhetoric)을 전문적으로 배웠다는 말입니다. 상대를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학문인 수사학은 당시 최고 학문 중 하나였습니다. 세 번째로 아볼로는 성경에 능통한 자라고 합니다. 성경에 능통했다는 표현은 보통표현이 아닙니다. 적어도 구약성경을 다 외우고, 인용이 자유자재 가능할 때 씁니다. 이런 칭호를 받은 사람이 구약에 보면 에스라 정도입니다. 그러니 아볼로의 성경실력은 오늘날 박사 몇 명이 들어붙어도 이기기 힘든 정도입니다.

   그에 비해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어떻습니까? 천막 짓는 사람입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상식적으로 누가 누구에게 배워야 합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에게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반대입니다. 그래서 어색한 장면이란 말입니다. 자기는 평범하면서 성경박사 앉혀놓고 가르치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정말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누가 더 대단할까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더 대단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미련한 자들을 들어서 지혜로운 자들을 능히 부끄럽게 하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고전1:27). 그리고 아볼로가 대단한 사람입니다. 자기는 성경박사인데 천막 짓는 평범한 부부에게서 더 배우겠다고 듣고 있는 아볼로가 더 대단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 선교사님 말씀이 유대인 랍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다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면 당장 하는 말이 ‘창세기 외우나요? 출애굽기 외우나요? 레위기는요?’ 그런다는 겁니다. 그런 자세로 듣는데 들리겠습니까? 진리의 말씀을 배척할 수밖에요. 들어야 합니다. 어린아이 말이라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보다 잘 난 사람을 통해서만 일하시지 않고 나보다 못한 사람을 통해서도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도 나에게 말씀하시고 깨우치실 수 있는 분이시기에 아볼로처럼 겸손히 들으면 큰 유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려서 살던 시골집 마당 끝에 변소가 있었고 변소 옆에는 소를 매놓는 터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변소 뒤편으로는 작은 언덕이 있었고 언덕 위에는 밤나무가 있었습니다. 그때 흑백 TV가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였는데, 타잔이 한참 인기가 있었습니다. 모두들 타잔 흉내를 내곤하던 때여서 형들도 타잔 흉내 낸다고 어디서 밧줄 하나를 주워 와서 밤나무 가지에 매달아 놓고는 타잔처럼 괴성을 지르면서 줄타기를 즐기곤 했습니다. 저와 바로 위의 형은 아직 어려 팔에 힘이 없어서 그것을 부럽게 쳐다만 보았습니다. 하루는 아랫집에 사는 맹구 형이 집에 놀러 와서는 그 줄을 타려고 했습니다. 참고로 아랫집은 구자 돌림의 삼형제였는데, 인구 맹구 상구였습니다. 저와 형은 그 줄이 이미 오래 되어서 삭았으니 타지 말라고 했습니다. 맹구 형은 저거 절대 끊어질 리 없다면서 어린 저희들의 말을 무시하고는 밤나무에 올라 타잔소리를 내면서 밧줄에 몸을 싣고 펄쩍 뛰어올랐습니다. 줄이 뚝 끊어졌고 맹구 형은 밤나무가 있는 언덕 아래, 정확히 소를 묶어 놓은 자리로 곤두박질을 쳤습니다. 몇 바퀴 구르고 일어서는데 순식간에 흑인이 되어있었습니다. 왜 어른들은 아실 겁니다. 소 묶어놓는 곳 반경 5미터 안에는 온통 소똥천지가 되지 않습니까? 거기에 뒹굴었으니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다 묻었습니다.

   어린 아이의 말이라도 들어야 합니다. 내가 아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들으면 길이 열립니다.

 

 

 

 

 

 

2. 온전함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

 

   더 풍부한 신앙, 총체적 신앙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나에게 없는 것,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알아야겠지요. 신앙의 스펙트럼은 넓고 무궁합니다. 내 것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내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가를 봐야 합니다. 나와 다르다고만 보지 마시고 내게 없는 무엇을 가졌는가를 보십시오. 공부 잘 하는 학생은 시험치고 나와서 자기가 무엇을 틀렸는지 압니다만 공부 못하는 학생은 맞은 것도 모르고 틀린 것도 모릅니다. 아볼로는 자기보다 훨씬 못해 보이는 브리스길라 아굴라와의 만남을 통해서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깨닫습니다. 25절을 봅시다.

 

 

그가 일찍이 주의 도를 배워 열심히 예수에 관한 것을 자세히 말하며 가르치나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라 (25)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는 것은 성령의 세례를 알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사도행전 1장 4~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시키는 세례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회개한 심령에 성령으로 기름부으시는 성령세례입니다. 아볼로가 성경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며 말하는 것을 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가 성경을 지식적으로는 잘 가르치나 그 속에 성령의 역사가 부족함을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그가 요한의 세례는 알지만 성령의 세례는 받지 못하였기 때문임을 간파하였습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체험적(體驗的)으로 아는 것입니다. 아볼로를 불러 이 점을 이야기했겠지요. 그때 아볼로는 반발하지 않고 겸손히 수긍을 하였습니다. “예, 맞습니다. 저에게 그것이 없습니다. 저도 성령의 세례를 받고자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겸손히 자신의 부족을 인정하면서 받기를 간절히 사모합니다. 마치 예전 유대인의 관원이자 바리새파였던 니고데모가 영적기갈을 느껴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인생상담을 하였던 자세와도 같습니다. 그럴 때 성령의 세례를 경험합니다. 그리고는 한층 업그레이드 된 사역자로 거듭나서 고린도로 건너가서 뛰어난 사역을 감당하게 된 것입니다. 고린도전서에 보면 고린도교회에 네 가지 파당이 있었다고 나오는데, 거기에 아볼로파 게바파 바울파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고린도지역에서는 아볼로가 베드로나 바울과 동급으로 취급되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인정하는 자가 더 풍성한 믿음을 받게 되고 더 큰 그릇으로 쓰임받습니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박사요 영국에서 알아주는 명설교자였던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 6. 28~1791. 3. 2)는 미국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기위해 배를 탔습니다. 배가 미대륙에 도착하기 10일 전 1736년 1월 25일에 큰 풍랑을 만나 배가 침몰할 위기에 빠졌습니다. 여기저기서 비명을 지르며 배 안은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습니다. 박사요 명설교자요 지금은 선교사로 가고 있는 요한 웨슬리도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그때 갑판 구석에 둘러앉아서 찬송하며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Moravian)이라 불리는 또 다른 파의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도대체 저들은 어째서 저렇게 평화로울 수가 있을까? 저들이 신앙과 나의 신앙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나중에 유럽으로 돌아온 웨슬리는 모라비안교도들에게 직접 찾아가서 그들 모임에 참석하고 그들에게서 배웁니다. 웨슬리에게 설교를 한 사람은 마을에서 페인트를 칠 하는 홀랜드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옥스퍼드 박사요 영국에서 알아주는 요한 웨슬리가 페인트 공에게서 설교를 듣다니요. 그런데 겸손히 들을 때 이상하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며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죄를 십자가에서 해결해 주셨다는 것이 마음으로 믿어지면서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웨슬리는 자신의 일기에 그때 비로소 자신이 거듭났다고 적고 있습니다.

   존 웨슬리는 장로교 출신이었지만 보통의 장로교인들과는 달리 간절하고도 뜨겁게 기도하는 신앙과 체험적인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이 이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존 웨슬리에게 장로교에서 배운 철저한 말씀신앙 위에 모라비안 교도들이 갖고 있었던 체험적인 신앙을 덧붙여 주셔서 그것을 무기로 산업혁명 이후 타락할 대로 타락한 영국사회를 회개케 하는 역사를 불러일으키게 하셨던 것입니다.

   바울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고전3:6). 참으로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을 자라게 하십니다. 냉랭한 믿음은 체험적인 신앙으로, 신비한 체험만 다인줄 아는 신앙은 말씀에 뿌리내린 신앙으로, 지식적이기만 한 신앙은 실천적인 신앙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냉랭한 신앙이라면 기도를 하십시오. 기도응답을 체험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실제적인 분이신지를 체험했을 때 그 신앙이 풍성해집니다. 신비한 체험만 추구하는 신앙은 성경을 펴십시오. 성경을 배우십시오. 말씀의 뼈대가 없으면 얼마나 흔들리는지 모릅니다. 말씀의 깊이와 뼈대로 신앙의 중심을 잡을 때 그 신앙이 견고해 집니다. 지식적인 신앙은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십시오. 지식적인 신앙인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작은 것이나마 실천적으로 사는 신앙인이 결국 자기주변을 변화시키며 살아간다는 사실 앞에 도전을 받게 되면 그 신앙이 살아 역사하는 신앙이 됩니다.

 

 

 

 

 

 

맺는 말

 

   주님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성취하시기 위해 하늘의 영광스런 삶을 버리시고 인간이 되시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깨어짐이 우리를 구원하고 세상을 풍성하게 하였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을 앞둔 이때 혹시 치우치고 편협한 신앙이었다면 더 균형 잡히고 총체적인 신앙으로 여러분의 신앙을 풍성케 만들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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