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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행전강해23 열정과 냉정으로 
본문 사도행전 18:18-23 (신약 219) 
날짜 2017-12-17 
설교자 전용표 목사 

 

  

   몇 년 전 눈이 많이 왔을 때 가족들과 걸어서 칠곡휴게소에 갔다 온 적이 있습니다. 차로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인데 눈길을 걸어서 가니까 한 시간 가까이 걸렸습니다. ‘5분이면 가는 거리를 괜한 고생하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자 ‘돌아갈까’하는 마음의 유혹도 있었지만 끝까지 가기로 하고 갔습니다. 딱 한 번의 경험이었지만 차를 타고 수 천 수 만 번 왔다 갔다 했던 기억보다 훨씬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포기하지 않은 열정(熱情)이 가져다준 추억입니다. 이것은 도로와 길의 차이이기도 합니다. 도로는 빨리 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래서 빨리 가는데 방해되는 것은 되도록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을 합니다. 도로를 높입니다. 그러다보니 빨리는 가는데, 도로 때문에 마을과 마을이 단절됩니다. 그만큼의 속도를 내지 못하는 사람이나 탈 것들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길은 그렇지 않습니다. 길은 도로처럼 폐쇄적이지 않고 개방적입니다. 모든 길, 모든 마을, 모든 이들에게 열려있습니다. 캄보디아에 갔더니 도로가 불편합니다. 그런데 아직 우리나라 도로처럼 살벌하게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아직 사람이 다니고 자전거가 다니고 개와 소가 다닙니다. 그런데 묘한 흐름이 있습니다. 사람도 자동차도 개도 소도 그 흐름을 타면서 묘한 조화(調和)를 이룹니다. 그 흐름이 싫다고 열을 내기보다는 그저 흐름 속에 자신을 내어 맡깁니다. 그것은 어쩌면 냉정(冷靜)입니다. 서로의 흐름을 침범하지 않으려는 데서 인정이 남아있고 배려가 있습니다. 아직은 도로가 아니라 길이었습니다. 불편하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뭔가 얻기 위해 빨리만 달려온 인생은 어쩌면 인생을 도로로 만들며 살아온 것일 수 있습니다. 인생은 길이라야 합니다. 마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셨습니다. 신앙은 인생을 도로가 아니라 길로 만들며 가는 것입니다. 천천히 가더라도 좋습니다. 길을 가면 됩니다. 길을 제대로 가기 위해서는 열정(熱情)도 필요하고 냉정(冷靜)도 필요하며 이 둘의 조화(調和)도 필요합니다.

 

 

 

 

 

 

1. 하나님은 바로 서려는 열정을 받으십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2차 선교의 마무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2차 선교는 소아시아지역을 관통하고 바다를 건너고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 등 그리스 전체를 북에서 남으로 관통하는 멀고 험난한 여정이었습니다. 바울은 멀고 험난했던 여정을 그리스 남쪽 대도시 고린도에서 끝내고 뱃길로 파송교회인 수리아 안디옥교회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바울이 돌아가는 여정을 시작한 곳은 고린도의 동쪽항구인 겐그레아입니다.

   2차 선교는 그야말로 열정의 길이었습니다. 열정 없이 할 수 없고, 걸을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열정이 없었다면 빌립보에서 감옥 갇혔을 때 이미 포기했겠지요? 여러분, 열정을 점검하십시오. 열정을 아직도 갖고 있습니까? 열정이 있느냐 없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에 대한 열정이냐’입니다. 노는 것도 열정이 있어야 가능하거든요. 그런 열정은 누구나가 있다 이 말입니다. 무엇에 대한 열정이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의 열정이 무엇을 이루고 성취하려는 열정이기 이전에 더 근본적인 것을 향한 열정이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18절을 읽어봅시다.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18)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고 합니다. 서원이 있었다는 것은 나실인 서원(Nazirite)을 의미합니다. ‘나실’이란 말이 ‘드려진’이란 뜻입니다. 나실인 서원은 일정기간 자신을 구별하여 하나님을 특별히 섬기겠다고 결단하는 제도입니다. 민수기 6장 2~5절에 보면 나실인 규정이 나옵니다. 나실인 서원을 한 기간 동안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고 부정한 것에 접촉하지 않습니다. 절제를 하며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실인 서약 기간 동안은 머리를 깎지 않습니다. 서약기간이 끝나면 머리를 깎습니다. 세상의 것을 머리 위에 두고 섬기지 않겠다, 오직 하나님만 위에 두고 섬기겠다는 결심입니다. 나실인 서약이 특별한 것은 어떤 짐승이나 물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린다는 점입니다. 자기가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2차 선교를 마무리 하면서 서원을 이행하기 위해 머리를 깎았다는 것은 2차 선교기간 전부를 나실인으로 지냈다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로 여기며 살았다 이 말입니다. 바울은 ‘선교를 통해 몇 명을 전도하고 몇 개의 교회를 세우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겠지’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일에 성공한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틀림없이 일 하실 거야!’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이 말입니다. 바울은 여기에 간절했고 여기에 절박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 받으실만한 최상의 제물이 되고자 했던 간절함이 바울의 열정(熱情)이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다 하려고 하면 얼마나 부담스럽습니까?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셔야 합니다. 나는 주님이 들어 쓰실 합당한 도구가 되면 됩니다. 합당한 도구가 되려고 애써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열정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이 거래처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부탁했습니다. 거래처 디자이너는 하고 있는 일이 밀려서 도와드리기가 힘들다고 하였습니다. 대신에 실력 있는 디자이너를 소개시켜준다고 하였습니다. 보통 소개해 줄 때 자기보다 실력이 못 한 사람을 소개하는 법이라서 별로 미덥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다른 디자이너를 직접 구할 시간적 여유가 없기에 소개받은 디자이너에게 일을 맡겼습니다. 결과는 예상 밖이었습니다. 대타로 일을 해 준 디자이너는 정말 실력이 뛰어난 디자이너였습니다. 오히려 거래처 디자이너보다 실력이 좋아보였습니다. 나중에 거래처 디자이너를 만날 일이 있어서 물었습니다. “보통은 자기 대신 일을 사람을 소개할 때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소개하지 않나요? 만약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 소개했다가는 고객을 빼앗길 가능성도 있는데 어째서 실력이 뛰어난 사람을 소개해 준 것입니까?” “저도 예전에는 사람 소개할 일이 있을 때 저보다 실력이 못한 사람을 소개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뒤에 꼭 문제가 생기더라고요. 그거 해결해 주느라 손해 본 것과 받은 스트레스가 컸습니다. 그때 깨닫고 세운 원칙이 있습니다. ‘남에게 선물할 일이 있으면 가장 좋은 것을 선물한다. 남에게 사람을 소개할 때는 나보다 실력 있는 사람을 소개한다.’입니다.”

   우리가 꼭 최상의 열매, 최상의 결과를 얻을 수는 없습니다. 바울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성공적이었지만 어떤 곳에서는 실패의 비참함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울의 2차 선교 전체를 받으셨습니다. 성공 실패를 떠나서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 받으시기에 합당한 선물, 최상의 제물이 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최상의 열매, 최상의 결과가 아니더라도, 실수가 있고 넘어지기도 했어도, 그래도 주를 위해서 하려고 노력했던 그 중심 하나 분명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받으시고, 하나님은 과정을 받으십니다.

 

 

 

 

 

 

2. 하나님은 내어맡기는 냉정을 귀히 여기십니다

 

    수리아안디옥교회로 돌아가는 길 또한 쉽지만은 않습니다. 오늘날 같은 여객선은 없고 무역선을 얻어 타고 가야하고, 바람방향이나 바닷물의 흐름을 의지해서 가야하기에 중간에 경유(經由)할 곳도 많습니다. 겐그레아에서 출발하여 바다건너 지금의 터기 서쪽 해변에 있는 항구 에베소를 경유하고 또 거기서 이스라엘의 가이샤라로 가는 배를 타고 가서 예루살렘교회에 가서 보고 한 뒤 육로로 해서 시리아 안디옥교회로 가는 길을 택하여 갑니다. 첫 경유지가 에베소입니다.

   겐그레아에서 에베소로 건너온 바울은 에베소 회당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변론을 합니다. 그때 여러 사람이 더 오래 머무르며 더 이야기해 보자고 하였지만 바울은 허락하지 않고 떠납니다. 그때 바울이 하는 말이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였습니다. 19~21절을 봅시다.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작별하여 이르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19~21)

 

 

   더 이야기 해 보자고 붙드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복음을 전할 기회가 온 것으로 볼 수도 있는데 바울은 허락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하고 배타고 떠났다는 점입니다. 어찌 보면 냉정(冷靜)합니다. 아, 그러나 얼마나 멋있는 모습입니까? 애써 연연하지 않고, 또 자기 힘으로 모든 것을 하려들지도 않으며, 꼭 이 때라야 한다는 집착도 없는 모습입니다. 굳이 정리해 보자면 ‘최선의 열정을 다하되 집착하지 않는다!’ 이런 주의(主意)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유유자적(悠悠自適)의 신앙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경험의 축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보십시오. 바울은 드로아에서 자기가 아무리 계획하고 애써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빌립보 감옥에서는 자기 보기에 상황이 아무리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있으면 일이 된다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결국 누구의 뜻대로 이루어지느냐?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더라는 것입니다. 다윗도 보십시오. 밧세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첫 아이가 병이 났을 때 죽을힘을 다해 살려 달라 매달립니다. 그러나 아이는 살지 못하고 죽습니다. 신하들이 차마 그 소식을 전하지 못하여 머뭇거릴 때 이를 눈치 챈 다윗은 일어나 몸을 씻고 의복을 갈아입고 성전에 들어가 경배 드린 후 음식을 먹습니다. 사람들이 놀라 묻지요. 그때 다윗의 대답이 ‘아이가 살았을 때는 혹시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실까 하여 매달렸지만 이제는 죽었으니, 즉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졌으니 어찌 금식하리요?’ 그러지요. 연연할 이유가 없다 이 말입니다. 냉정해지는 순간입니다. 열정이 에너지를 밖으로 분출하는 것이라면, 냉정은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것으로서 에너지를 안으로 쓰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깨달음 얻기가 그렇게 힘이 듭니다. 그러니까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아집(我執)에 사로잡히고, 이때가 아니면 안 된다는 집착(執着)에 붙들리며, 여기에 연연하고 저기에 연연하면서 스스로의 인생을 고통 속으로 집어넣습니다. 놓아야 할 때 놓아야 합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도 놓아야할 것은 놓고 가야 합니다. 집착으로 인해 찜찜한 마무리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비워야 새로 담을 수 있는 것은 만고(萬古)의 이치입니다.

   집착은 거의가 콤플렉스(complex)로부터 비롯됩니다. 없이 살던 콤플렉스, 소외당하던 콤플렉스, 이런 것이 결국 집착을 만들어냅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서 나를 봐야 합니다. 다 고칠 수는 없어도 자기를 바로 보기라도 해야 합니다. 더 바란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경험해야 합니다. 그 사랑을 깊이 묵상하며 깨달을 때 콤플렉스에서 놓이게 되고 동시에 집착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제 후배 중에 어려서 앓은 소아마비로 인해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진 후배가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놀림도 많이 받고, 아이들이 신발을 빼앗아 달아나기도 하였지요. 많은 상처가 있었습니다만 예수를 만나고 나서 밝아졌습니다. 만날 때마다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씩 만들어서 해 주곤 하였는데, 가령, 당시 새로 나온 승합차 ‘이스타나’를 보고 ‘왜 이름이 이스타나가 됐는지 아느냐?’고 물어봅니다. 모른다 하면, 사람들이 그 차를 탈 때마다 경상도 사투리로 “이스 타나?(여기서 타나?)”라고 물어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아반떼 승용차도 솔로몬이 재판하면서 ‘아반 떼!’라고 한 것에서 차 이름이 유래했다나요? 뭐 그런 식이었습니다. 지금은 아재개그로 핀잔을 듣겠지만 당시로서는 아주 신선한 개그였습니다. 결국 집착과 아집이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지 못하게 하고 나와 주변인들을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나고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면 이처럼 평생 갈 수 있는 상처와 콤플렉스도 치유되고 쓸 데 없는 집착과 아집에 붙들리지 않는 사람이 됩니다.

 

 

 

 

 

 

맺는 말

 

   비록 성에 차지 않는 것이 있어도 내게 주신 것이 하나님의 최선임을 인정하며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주님께서 드리신 마지막 기도는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은 제 마음에 들지 않는 잔이니 못 받겠습니다.’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주시는 잔이 비록 고통의 잔일지라도 그것이 아버지께서 주신 최상이라면 한 방울 남김없이 받겠나이다.’였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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