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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행전강해22 고린도에서의 위로 
본문 사도행전 18:1-11 (신약 218) 
날짜 2017-12-10 
설교자 전용표 목사 

 

   2018년도 키워드 중 하나가 ‘소확행(小確幸)’이라고 합니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이라는 의미입니다. 엄청난 대저택이나 고급 승용차를 가질 수 없다면 작지만 품질 좋은 것을 가져서 거기서 확실한 만족감을 누리겠다는 것입니다. 가령, 일반 드라이어보다 몇 배 비싼 ‘명품 드라이어’를 구입해서 매일 머리를 말릴 때마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좋은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린다’는 행복감을 매일같이 맛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소확행이라고 합니다. ‘소확행’과 더불어 언급되는 것이 ‘케렌시아(querencia)’입니다. 케렌시아는 스페인 말인데 ‘나 홀로 휴식’이란 의미입니다. 현대인들은 너무 많은 일을 하고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너무 많은 자극을 받다보니 너무 지쳐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밤낮없이 일을 합니다. OECD국가 중에서 가장 많은 시간 일하는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만성피로가 심합니다. 그러다보니 자기만의 공간, 자기만의 시간을 찾게 되는 것이지요. 2018년은 소확행과 케렌시아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뚜렷해질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소확행이나 케렌시아는 어쩌면 비교의식에서 벗어나 나만의 최소한의 행복을 지켜내려는 소시민(小市民)들의 몸부림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비교하면 할수록 만족감보다는 빈곤감과 박탈감이 커지고 불안감에 사로잡히는 법이지요. 차라리 작고 소박한 것에서 만족을 찾자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이 소확행이나 케렌시아현상입니다. 꽤 바람직한 현상이라 여겨집니다만 한편으로는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여전히 행복과 위로를 찾는다는 점에서는 신앙 차원의 행복과 위로라 보기에는 미흡해 보입니다.

 

 

   오늘 고린도에 도착한 바울은 상당히 지쳐있습니다. 일단 여행거리가 어마어마합니다. 선교여행을 떠나온 지도 오래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가는 곳마다 예외 없이 힘든 일을 겪었습니다. 빌립보에서 두들겨 맞고 감옥에 갇혔었지요? 데살로니가에서는 석 주 만에 핍박받고 쫓겨났지요? 베뢰아는 좀 괜찮았다 쳐도 아덴에서 논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진이 다 빠진 상태에서 도착한 도시가 고린도입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가 역시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남부인 아가야지방의 수도로서 바울시대에 인구가 수십만 명에 이르는 거대도시로서 타락한 도시였습니다. 특히 성적으로 매우 타락했습니다. 아프로디테 여신을 섬기는 신전에 신전창기(神殿娼妓)가 1천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타락한 사람을 놀릴 때 ‘네가 고린도 사람이냐? 고린도 사람처럼 되었구나!’라고 했다합니다. 고린도에서도 어김없이 핍박을 받고 곤욕을 치룹니다만 그런 와중에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위로를 몇 가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만남이 위로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첫 번째 위로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 부부와의 만남이었습니다. 아굴라가 남편, 브리스길라가 아내입니다. 그런데 이 부부의 이름이 성경에 총 여섯 번 언급되는데, 그 중 네 번은 아내인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앞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아마 사역에 있어서 아내가 훨씬 돋보였던 것 같습니다. 아굴라 브리스길라 부부는 터키 북부 본도(Ποντικοs) 출신 유대인들인데 일찍이 제국의 수도인 로마로 가서 사업을 일구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로마 황제 글라우디오(Claudius. BC 10년~AD 54년)가 정치적 문제로 유대인들을 강제 추방하면서 어쩔 수 없이 이곳 고린도에 오게 되었습니다. 강제추방으로 하루아침에 가게, 거래처, 친구, 이웃 몽땅 잃어버린 처지가 되었습니다. 인생의 강제 부도를 맞은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부가 처량한 처지로 고린도에 왔다가 고린도에 전도하러 온 바울을 만난 것입니다. 둘이 업(業)이 같습니다. 천막 만드는 일입니다. 바울도 자비량 선교사로서 어딜 가든지 천막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날도 자비량선교사를 ‘텐트메이커(Tent maker)’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자, 3,4절을 봅시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3,4)

 

 

   함께 살면서 일도 같이 하면서 바울의 복음을 계속해서 듣습니다. 듣다보니 믿음이 생겨나고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참 이것을 보면 바울의 생활의 단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만약 바울이 형편없이 사는 사람이라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았겠습니까? ‘당신이나 많이 믿어! 당신 하는 행동을 보니 만정이 다 떨어져!’ 이러면서 마음의 문을 닫지 않았겠습니까? 이기적이고, 다투기도 잘 하는 사람이 말로 전도를 하면 그거 오히려 전도 안 하니만 못합니다. 전도의 문을 닫는 격입니다. 남을 먼저 생각하면서 인품도 된 사람은 굳이 말로 전하지 않아도 그 사람은 신앙으로 바르게 사는 사람이란 것이 저절로 알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 자체가 이미 전도인 것입니다. 어쨌든 사업 차 만난 사람, 그것도 같이 살면서 볼 것 못 볼 것 다 보여주는데도 바울을 통해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나중에는 대단한 믿음의 사람들이 됩니다. 24~28절을 보면 이들이 그 유명한 고린도교회의 지도자가 된 아볼로를 전도하여 양육을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6장 19절을 보면 이들 집에서 교회가 하나 만들어졌습니다. 로마서 16장 3절을 보면 바울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을 통해 예수를 만나 뒤 본업과 부업이 바뀐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일해서 돈을 버는 목적이 잘 먹고 잘 살려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바울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참된 만남은 하나님의 은혜임’(마르틴 부버의 말)을 아셔야 합니다. 만남보다 귀한 위로가 사실 별로 없어요. 하나님은 만남을 통해 때로 우리를 깨뜨리기도 하시고, 만남을 통해 때로 말로 다할 수 없는 위로를 주기도 하십니다. 악연(惡緣)을 주시는 목적은 성숙함이고 인연(因緣)을 주시는 목적은 위로입니다. 귀한 만남이 위로입니다. 만남에 감사합시다.

 

 

 

 

 

 

2. 말씀에 붙들리는 것이 위로입니다

 

   바울은 이때까지 홀로 고군분투하고 있을 때 드디어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와 합류하였습니다. 석주 만에 도망치다시피 빠져나온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안위(安危)가 걱정스러워 실라와 디모데를 보냈었는데, 드디어 돌아온 것입니다. 몇 주 전 설교시간에 말씀드렸듯이 실라와 디모데가 전해준 소식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믿음 위에 굳게 서서 놀랍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이 또한 바울에게는 굉장한 위로가 되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이를 계기로 바울은 전도에 더욱 매진합니다. 5절을 봅시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부터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언하니(5)

 

 

   그런데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혔다(συνεχω쉰네코)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 붙잡혔다는 말은 지배를 받는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하나님 말씀에 지배당하여 핍박 가운데서도 어디서 그런 용기와 힘이 솟아나는지, 어제 박해를 주던 자들 앞에 오늘 또 나아가고, 오늘 박해를 주더라도 내일 또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체 할 수 없는 에너지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전하였던 거예요. 여러분, 사람은 저마다 뭔가에 붙들려 삽니다. 먹는 것에, 입는 것에, 다이어트에, 어떤 사상(思想)과 이념(理念)에, 소유에, 무엇에라도 붙들려 삽니다. 일시적으로 붙들리는가하면 한평생 붙들리기도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진리의 말씀, 하나님 말씀에 붙들리기를 바랍니다.

   주후 500년 경부터 1500년대까지 천 년의 세월을 중세라고 부르는데, 서양의 중세는 크리스텐돔(Christendom), 즉 기독교왕국이었습니다. 교회가 지배한 세상이었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세상을 지배한 시대였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성경이 금서(禁書)였습니다. 왜 그랬을까? 일반 백성들이 성경을 읽기 시작하면 민중이 깨어납니다. 의식이 생기고 똑똑해지고, 무엇이 잘못되어 있는가를 알게 되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성경을 읽고 알면 힘이 생깁니다. 그러면 지배자들에게 유리할 것이 없지요. 그래서 지배자들은 성경을 자신들의 전유물(專有物)로 삼고 일반 백성들은 성경을 소유할 수 없도록 통제하였습니다. 자기 나라 말로 번역조차 할 수 없게 했습니다. 그때 목숨을 걸고 성경을 자기 나라 말로 번역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영국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경 ~ 1384년)라는 사람입니다. 위클리프는 목숨을 걸고 성경을 영어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나 금서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중세 교회의 지배를 반대하던 위클리프의 후손들과 개혁자들은 위클리프가 번역한 성경을 보급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은 단속을 피하기 위해 한 사람씩 나눠서 성경을 통째로 외우기 시작합니다. 누구는 창세기, 누구는 출애굽기, 누구는 마태복음, 이렇게 통째로 외워서 몇 날 몇 월 몇 일 어디로 모이라는 지시가 떨어지면 그 지방에 모여서 외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지역의 진실한 성도들이 베껴 적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번역된 성경을 퍼트려 나가는 것입니다. 당시는 인쇄술이 없던 시절입니다. 잡히면 죽습니다. 그래도 중단되지 않습니다. 권력을 위해 싸우는 자들은 진리를 위해 싸우는 자를 결코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람은 죽어도 진리는 죽지 않습니다. 영원히 살아서 그 힘을 발휘합니다. 당시 지배자들은 이 사람들을 ‘롤라드’라고 조롱하며 불렀습니다. 롤라드, 롤라드, 중얼중얼 거린다는 의성어(擬聲語)입니다. 이 사람들이 성경을 외우기 위해, 외운 성경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중얼중얼 거렸기 때문에 붙은 별명입니다. 진리의 말씀에 붙들린 이들의 노력이 100년 후 결실을 맺습니다. 바로 세상을 바꾼 종교개혁입니다. 박해 하에서 100년 동안 농축된 진리의 힘이 대폭발을 일으킨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만큼 우리 인생을 붙잡아 주고,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이 없습니다. 말씀이 곧 힘입니다. 위로입니다. 말씀에 여러분 자신을 붙들어 매고 사시기 바랍니다.

 

 

 

 

 

 

3. 임마누엘이 위로입니다

 

   무엇이 위로이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는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임마누엘(Immanuel)’입니다. ‘임’, 누구누구와 함께, ‘마누’, 우리와, ‘엘’, 하나님이. 오늘 말씀을 보면 고린도에서도 어김없이 유대인들이 들고 일어나 핍박을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 3절에 보면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 바울이 회상(回想)하는 것을 볼 때에 바울이 이때 정말 힘들고 지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핍박 중에서도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더불어 회심하여 믿는 등 믿음의 역사가 계속되는데, 결정적인 주님의 위로가 밤에 임합니다. 9,10절을 봅시다.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9,10)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든든한 것이 없습니다. 열의 아홉 가지 상황이 다 좋지 않더라도 내면(內面)에서 이 주님의 음성이 확신 있게 들리면 그 아홉이 아무 것도 아니게 됩니다. 여행프로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막이라는 아프리카 나미비아 ‘붉은 사막’이 나옵니다. 정말 붉은 색 모래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데 믿기지 않게도 사막 한 가운데 집채보다 큰 나무 한 그루가 푸르름을 한껏 자랑하며 서 있습니다. 오아시스도 없습니다. 현지 가이드 설명에 뿌리가 어마어마하게 깊어서 저 아래 지하수에까지 뻗어서 물을 먹는다고 합니다. 아무리 사막일지라도 뿌리가 물에 잇닿아 있으면 죽지 않습니다. 삽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울지라도 내 영혼이 하나님과 잇닿아 있으면 죽지 않습니다. 삽니다.

   군생활 갓 일병을 달았을 때 밤에 자는데 불침번 보던 고참이 소총 개머리판으로 툭툭 차면서 깨웁니다. 참 못 됐지요. 그냥 깨워도 될텐데 말입니다. ‘일어나 임마! 비 쏟아지려고 그래, 포 덮으러 가!’ 새벽 2시 정도 되었습니다. 반바지에 런닝 차림으로 슬리퍼를 끌고 그 넓은 연병장을 가로질러 포상(砲床)에 포를 덮으러 내려가는데, 참 처량하더군요. 그때 마음에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누가 너와 함께 하느냐?’ 누가 너와 함께 하느냐? 그토록 아껴주시고 사랑해주시는 부모님도 지금 여기에 계실 수 없습니다. 오직 혼자였습니다. 비바람이 몰아치기 직전의 그 어두운 연병장에 홀로 남겨진 저의 외로움이 사실은 우리 인간의 실존(實存), 원래 본모습이었습니다. 그 외로움 속에서 들려왔던 소리, ‘누가 너와 함께 하느냐?’ 중요한 순간, 결정적인 순간에는 철저히 혼자입니다. 혼자 가야하고 혼자 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인생입니다. 그때 또다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가슴이 울컥하면서 눈물이 핑 돌더군요. ‘주님, 그렇습니다. 주님이 저와 함께 하십니다.’ 그때 찬송이 나왔습니다. 평소에는 신나게 부르던 찬송인데 그날은 달랐습니다.

 

 

어두운밤에 캄캄한 밤에 새벽을찾아떠난다

종이울리고 닭이울어도 내눈에는오직 밤이였소

우리가처음 만난그때는 차가운새벽이였소

당신눈속에 사랑있음을 나는느낄수가있어소.....

 

 

 

 

 

 

맺는 말

 

   여러분, 이사야 49편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사 49:14,15,16a)

 

 

   우리가 간혹 하나님이 나를 잊으신 것이 아닌가, 버리신 것이 아닌가 하는 힘든 마음에 사로잡힐 때도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신 것이 아닙니다. 여인이 어찌 몸으로 낳은 자식을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내가 감지(感知)하지 못하는 그 순간에도 주님은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이행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위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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