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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행전강해21 아덴 사람들의 고상함 
본문 사도행전 17:16~34 (신약 217) 
날짜 2017-12-03 
설교자 전용표 목사 

 

  오늘 본문은 바울이 서구문명의 발상지이자 세계문화의 중심지 아덴(아테네)의 법정에서 복음을 전한 기사입니다.

   디모데와 실라를 기다리는 동안 바울은 당시 세계문화수도라 불리던 유서 깊은 도시 아덴(아테네)을 둘러보다가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는 마음에 격분(激奮)합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다양한 신들을 섬겼고 곳곳에 대리석으로 웅장하게 지은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하다가 그리스 철학자들과 만나서 논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18절을 보면 에피쿠로스(Epicouros)와 스토아(stoa) 철학자들이라고 나옵니다. 에피쿠로스 철학자들은 천국과 지옥 같은 것은 없고 사람이 죽으면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니 살아있는 동안 그저 즐겁게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가급적이면 골치 아픈 것 피하고 힘든 사람 만나지 말고 그저 마음이 기쁘도록 살아라! 이것입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은 반대였습니다. 마음에 끌리는 대로 살지 말아라! 감정대로 살지 말아라! 아주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바른 것을 선택해서 살아라!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바울이 이런 철학자들과 장터에서 논쟁하였습니다. 장터는 ‘아고라’(Agora)라는 광장입니다. 거기서 논쟁하다가 그 철학자들이 바울을 아레오바고(Areopagus)라는 곳으로 끌고 갑니다. 아레오바고는 법정입니다. 아마 낯선 외국 사람이 와서 불온한 사상을 전파하는 것은 아닌가하여 조사를 해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아레오바고 법정에 끌려간 바울은 그 유명한 아레오바고 설교를 하게 됩니다. 22절부터 31절까지 기록되어 있는 설교인데, 사도행전에 실려 있는 바울의 아홉 개의 설교 중 순수 이방인에게 행한 유일한 설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설교에 예수의 십자가 복음이 빠져 있다고 하면서 이런 방법으로 전도했기 때문에 아덴에서 사역이 실패한 것이라고 말하는데, 글쎄요? 그렇게 보기에는 문제가 좀 있습니다. 18절을 보면 바울은 아덴에서 ‘예수와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아덴에서 전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전혀 하나님을 모르고 구약성경도 모르는 생짜배기 이방인들에게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방법으로 전도를 한 것뿐입니다. 자 바울의 설교를 오늘날 우리 관점에서 한 번 들어보면서 이 설교가 어떤 메시지였는가를 알아보고, 또 2천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받는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1. 온갖 거짓된 신앙을 버려야 합니다

 

1) 건물에 기댄 신앙

 

 

   바울은 먼저 아덴 사람들이 붙들고 사는 우상들을 지적합니다. 그 첫 번째는 ‘건물’이고 ‘건물에 기댄 신앙’입니다. 아덴에는 입이 쩍 벌어지는 대리석 신전들이 많은데, 바울은 하나님이 저런 곳에 계시는 분이 아니라고 합니다. 24절을 봅시다.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4)

 

 

   이게 무슨 말이냐면 이런 의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어디에 계십니까? 어디서 가장 많이 계십니까? 또 물어볼까요? 어디서 기도하면 가장 잘 들어주십니까? 예배당, 집, 차 안, 학교, 어디입니까? 흔히들 하나님이 그래도 예배당 안에 가장 많이(?) 계실 것이고, 예배당에서 기도하는 기도를 더 잘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들을 은연중에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디든 계십니다. 제가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에 들어가 10분 정도 앉아서 기도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기도가 잘 됐을까요? 기도가 깊이 들어가는 것이 기도가 너무 잘 되더라고요. 놀랍게도 거기에도 하나님은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디든 계십니다. 그리고 어디서 드리는 기도이든 간에 다 듣고 계십니다. 왜냐? 우주 만물을 하나님께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대리석으로 크고 화려하게 전을 짓는다 해서 거기에 들어가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꾸 착각을 합니다. 더 시설이 좋고 더 웅장하고 경건미가 가미된 건물에서 드리는 기도와 찬송과 예배가 더 은혜롭고 뭔가 효력도 더 있을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이것이 곧 우상입니다. 건물지상주의(建物至上主義) 우상으로서 결국 그 밑바탕에는 물질숭배의식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더 크고 화려한 예배당에 가서 너무 부러워할 것도 없고, 우리보다 초라한 예배당 가서 헛된 자부심을 가질 것도 없습니다. 그런 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우상입니다. 참 신앙은 내가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내 마음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철저히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코람데오(CoramDeo)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어느 한 곳에 한정시키지 마십시오. 가두지 마십시오. 갇히지도 않는 분이지만요.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직장이 곧 성전입니다. 여러분 가정이 성전이고요. 운전하는 차안이 성전입니다. 어디서든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구하는 곳이 성전입니다. 여러분의 거실과 주방과 화장실과 자동차 안과 사무실과 근무 장소를 거룩한 성전으로 만들어 가십시오. 어디서든 들으시고 어디서든 함께 하십니다.

 

 

2) 하나님 영광에 대한 오해

 

   또 봅시다. 바울은 다음으로 하나님은 무엇을 자꾸 필요로 하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께 도움을 드릴 수 있다든지, 영광을 더해 드릴 수 있다든지 하는 생각이 우상임을 지적합니다. 25절입니다.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25)

 

 

   바울은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거짓종교는 자꾸 ‘가져오라, 바치라’고 합니다. 타락한 교회도 자꾸 ‘바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뭘 자꾸 바라는 것이 많은 분으로 만들고, 하나님을 거지로 만듭니다. 더 많이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성도들은 어리석게도 그렇게 믿습니다. 그러나 참된 종교, 참된 교회는 하나님 백성답게 살라고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칩니다. “전교1등 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려라!” “꼭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해라!” 여러분, 전교1등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남들보다 더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영광은 상대적(相對的) 영광이라서 덧붙일 수 있고 뺄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은 절대적(絶對的) 영광이라서 덧붙일 수도 없고 뺄 수도 없습니다. 그 자체로서 완전한 영광입니다. 우리가 일등 한다 해서, 유명해 진다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더 커지는 것 아닙니다. 그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덧붙일 수는 없어도 그 영광을 가릴 수 있는 능력은 충분히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그 일을 잘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이 가리지만 않으면 그 영광 자체로서 찬란히 빛납니다. 청년 시절 소년부 교사를 하였는데, 그때 박○○ 집사님이 소년부 부장을 맡고 계셨습니다. 이 분은 좋은 직장에 다니셨는데, 우연히 이 분의 직장 생활을 잘 아는 형님을 만났습니다. “용표야, 그 분 직장생활 어떻게 하는지 아나?” 행여 듣기 민망한 이야기를 들을까 내심 걱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우(杞憂)에 불과했습니다. 집사님은 그 어떤 사원보다도 성실히 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충분히 이권을 챙길 수 있는 위치임에도 이권을 전혀 챙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 이권을 챙겨 월급보다 많은 것을 챙길 때 받는 것을 족하게 여기고 그것만 받아간다고 하였습니다. 최종적으로 하는 말이 동료직원들의 평가를 전해주었습니다. ‘저 사람은 우리보다 월급 두 배로 받아가야할 사람이야!’ 여러분, 이렇게 살면 하나님의 영광이 스스로 찬란히 빛을 발합니다. 우리 인간이 욕심으로 하나님 영광만 가리지 않으면 됩니다.

   이처럼 바울은 아레오바고 설교를 통해서 인간의 잘못된 신앙을 철저히 깨부수고 있습니다.

 

 

 

 

 

 

2.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홀로 서야 합니다

 

   인간이 가진 잘못된 신앙을 지적한 뒤 마지막으로 바울은 참 신앙을 말합니다. 바로 회개를 말합니다. 예수님의 첫 설교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회개였고, 베드로의 설교의 결론도 ‘회개하여 성령의 선물을 받으라’, 회개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길은 회개입니다. 30, 31절을 봅시다.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30,31)

 

 

   ‘이제는 그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회개해야 한다. 창조주께서 정하신 심판의 날이 분명히 있다. 그 확실한 증거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심판주로 인정되신 예수그리스도이시다.’ 이런 말입니다. 바울이 이 설교를 하자 더 듣고 싶다는 이들도 있었지만 많은 이들은 바울을 조롱하였습니다. 바울은 더 이상 전하지 않고 그곳을 떠납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믿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여러 명의 사람들입니다.

   자, 몇 가지 다시 묻습니다. 아덴에서 바울의 설교는 복음적이지 못한 것이었습니까? 그래서 아덴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은 것이고, 그래서 아덴에서 바울의 사역은 실패한 것이라고 봐야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의 설교에는 헛된 우상을 섬기는 삶에 대한 비판도 있고, 하나님도 있고, 예수의 부활도 있고, 심판과 회개도 있습니다. 있을 건 다 있습니다. 결코 실패한 설교 실패한 전도가 아닙니다. 문제는 바울의 설교가 아니라, 듣는 사람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아덴 사람들의 ‘마음 밭’이 문제였습니다. 21절을 봅시다.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21)

 

 

   이들의 관심은 지적인 호기심을 채워줄 뭔가 새로운 것이었지 진리(眞理)가 아니었습니다. 진실하게 진리에 목말라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자기들은 이미 세계적인 문명을 이룬 일등시민들로서 자기들에게 걸맞는 뭔가 더 고상(高尙)한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마음 밭이니 회개가 귀에 들어올 리 없지요. 신앙은 치장거리가 아닙니다. 고상함을 위함은 더더욱 아닙니다.

기독교사회에서 태어나 교회에서 자랐으면서도 자신의 신앙이 진실한 것인가를 죽을 때까지 고민하며 살았던 덴마크인 ‘쇠렌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의 평생 고민의 결론은 ‘인간은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단독자(單獨者)로 서야한다’였습니다. 내가 목사의 아들이니, 장로의 아들이니, 삼 대째, 사 대째 믿는 가정이니, 한국에서 제일 유명한 교회에 다니느니, 내가 얼마나 알고 얼마나 성공했느니 뭐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설 때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 앞에는 나 혼자 서야 합니다. 누가 대신 서 줄 수 없습니다. 벌거벗고 서야 합니다. 아무 것도 걸치고 설 수 없습니다. 그래서 두렵고 떨림으로 설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사야가 그랬고 밧모섬이 사도요한이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단독자로 서는 사람이 적습니다. 극히 적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을 보면 세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욕망(欲望)의 차원입니다. 그저 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내 자녀가 다른 집 자녀 못지않게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욕망의 차원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두 번째는 윤리(倫理)적 차원입니다. 먹고 사는 것이 해결되고 보니 뭔가 더 가치 있는 삶, 더 고귀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봉사활동도 하고 기부도 하고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기도 하면서 나름 윤리적인 가치를 실천하면서 삽니다. 미국의 워렌 버핏 같은 사람입니다. 세계 2위의 부자가 되었는데, 자기 재산의 절반을 기부를 하였습니다. 엄청납니다. 물론 좀 성공해서 여유가 생기면 더 큰 욕망을 부리는 사람이 많습니다만, 그래도 그중에는 윤리적 차원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고상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아덴 사람들이 추구했던 삶이 바로 윤리적 차원의 삶입니다. 뭔가 고상한 것, 철학적인 것, 윤리적인 가치를 배우고 추구하는 것입니다. 윤리적 차원의 삶이 욕망적 차원의 삶보다 나은 것 같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도 않습니다. 어쩌면 오히려 더 못할 수도 있습니다. 윤리적 차원에서 사는 사람일수록 더 자기만족(自己滿足)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고, 자부심 또한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윤리적인 사람이 예수 앞에 무릎 꿇기가 더 힘든 법입니다. 자기의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신앙(信仰)적 차원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섬기며 사는 차원으로서 정신적 차원 윤리적 차원보다 더 깊은 차원입니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상태, 두렵고 떨림으로 서 본 사람이라야 참된 신앙적 차원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입니다. 신앙적 차원은 자기를 부정하고 자아가 꺾여야 내 앞에 펼쳐지지,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 자아가 죽지 않은 상태에서는 절대로 내 앞에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개가 신앙적 차원으로 사는 관문이고, 회개가 하나님 앞에 서는 유일한 길입니다. 자기를 버렸기에 윤리적 차원에서 사는 사람보다 그 수준이 더 높고 깊습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은 고상한 철학을 추구하고, 고상한 윤리적 가치를 추구하면서 세계일등 시민이라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있는 아덴 사람들에게 회개와 심판을 설교했습니다. 여러분, 내 속에 은밀히 깔려 있는 ‘나는 그래도 꽤 괜찮은 사람이야!’라는 바닥마음 같이 하나님 앞에서 심각한 마음이 없습니다. 이것을 깨뜨려야 합니다. 그래야 진실로 삽니다.

 

 

 

 

 

맺는 말

 

   농부가 밭의 지력이 떨어졌다 해서 밭을 버리지는 않습니다. 갈아 업고 거름도 넣고 해서 어쨌든 지력(地力)을 끌어올립니다. 우리교회 주차장을 빙 둘러가며 감나무가 있습니다. 첫해 열린 감은 맛이 별로였습니다만 올 해 열린 감은 당도가 높고 맛이 훨씬 좋아졌습니다. 땅에 거름도 넣고, 또 낙엽이 떨어져 썩고 하면서 토양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며 사는 길은 마음 밭을 기경(起耕)하는 것입니다. 딱딱하게 굳은 땅을 갈아 업어 부드러운 심령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무엇을 주시든 그것이 은혜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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