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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행전강해20 데살로니가교회를 통한 감사 
본문 사도행전 17:1~9 (신약 216) 
날짜 2017-11-19 
설교자 전용표 목사 

 

   대구경북 시골마을을 찾아다니는 ‘싱싱별곡’이란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거기에 경북 봉화 청량산 자락의 산골마을이 나옵니다. 해발 500미터가 넘는 오지(奧地) 중의 오지 마을입니다. 리포터가 집집마다 다니면서 사연들을 물어보고 이야기를 하는데 어떤 집에 갔더니 칠십대 중반을 넘은 아저씨와 일흔이 다 된 아주머니, 마흔 다섯 난 아들 하나가 있습니다. 원래 여기가 고향이냐고 물으니까 이곳에 들어와 산 지 40년이 좀 더 되었다고 그래요. 올 때 땅을 얼마나 사서 들어왔냐고 물으니까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마음을 추스르고 대답을 하는데, 옆에 있는 아들 들쳐 업고 둘 부부가 빈털터리로 들어왔다는 겁니다. 농막 하나 빌려서 살림 살면서 죽을힘을 다해 땅을 일구고 조금씩, 조금씩 늘려가며 지금껏 살아왔다는 겁니다. 그 말을 하는데, 옆에 있던 마흔 다섯 난 아들이 웁니다. 없이 자랐던 서러웠던 지난날과 고생하신 부모님 생각에 우는 것 같았습니다. 아주머니도 웁니다. 고생하며 살았던 날들이 서럽게 생각나고 자식들 고생시킨 것이 못내 가슴 아파 우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촬영나간 리포터들도 연신 울어요. 경북 봉화가 고향이신 외할머니 인생이 겹쳐지면서 저도 울컥하더군요.

   지금은 그저 감사(感謝)하다 그럽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불평이 있을 수 없다고요. 모든 것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라고. 어려운 시절 생각하면 모든 것이 감사이지요. 사람이 잘 잊어버려서 탈이지만요. 마음을 낮은데 두어야 감사가 됩니다. 기준을 높은데 두느냐 낮은데 두느냐에 따라 불평의 조건이 감사의 조건이 되기도 하고, 감사의 조건이 불평의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감사하는 것이 다른 이에게는 불평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이 불평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감사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런 감사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사려(思慮)만 깊으면 가능한 일입니다. 신앙의 차원에서 사는 사람은 일반적 차원보다 조금 더 깊은 차원의 감사도 있어야 합니다. 오늘 추수감사절을 맞아 신앙적 차원의 감사를 한 번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1. 하나님 뜻을 좇아 사는 삶이 감사입니다

 

 

   먼저 신앙적 차원의 감사는 하나님 뜻을 좇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삶이 곧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빌립보를 떠난 바울 일행은 150km 떨어진 마게도냐의 행정수도 데살로니가로 갑니다. 마게도냐 전체를 관할하는 로마총독부가 있던 곳이고 유대인들도 많아 회당(會堂;synagogē)을 어렵잖게 찾을 수 있는 도시였습니다. 회당에서 안식일 예배에 온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하여 많은 경건한 헬라인과 적지 않은 귀부인들이 믿는 성과를 얻습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하고 사역이 중단되고 맙니다. 유대인들의 반대와 핍박이 거세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도망치듯 밤을 틈타 데살로니가를 빠져 나갑니다. 그렇게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4,5절 봅시다.

 

 

그 중의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나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불량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하게 하여 야손의 집에 침입하여 그들을 백성에게 끌어내려고 찾았으나(4,5)

 

 

   처음부터 석 주를 계획하고 가진 않았겠지요. 그런데 겨우 석 주만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거기다가 데살로니가에서는 빌립보에서처럼 귀신이 쫓겨 나간다거나 지진이 일어난다거나 하는 기이한 역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습니다. 놀랍고 기이한 일이 일어나면 일어나는 대로,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는 대로, 거기서 길이 열리면 열리는 대로 거기서 막히면 다른 곳으로 돌아갑니다. 주어지는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응하면서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겁니다. 이것이 감사의 삶입니다.

   신앙생활에 기쁨이 충만하고 은혜가 충만한 일들이 항상 일어난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신앙생활이란 것이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무엇이 임하고 무엇을 받고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면 만족스러운 신앙생활 하기가 힘듭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입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기를 힘쓰면서 나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이 구원받고 난 후의 참된 신앙생활이고 또한 감사의 삶입니다. 불교를 예로 들자면 돈오돈수(頓悟頓修)와 돈오점수(頓悟漸修)의 관계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돈오돈수란 순간적인 깨달음으로 부처의 경지에 이른다는 말이고, 돈오점수는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그렇게 순간적인 깨달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오랜 시간 자신을 갈고 닦는 수련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불교에서 ‘땡중’은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자들에게서 다 나왔습니다. 자신은 득도(得道)했니 뭐니 하는데 실상은 주색잡기(酒色雜技)를 즐기면서 지킬 것 지키지 않고 엉망으로 사는 것입니다. 진짜 깨달은 사람은 엉망으로 살지 않습니다. 불교에서 바른 것을 지키며 사는 자들은 돈오점수를 주장하고 따르는 자들 중에 많습니다. 들어온 지 1500년이 넘는 불교는 오랜 기간 축적된 재산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 재산을 놓고 조직폭력배까지 동원되어 싸움질을 할 정도로 불교의 타락은 심각합니다. 하지만 불교가 타락해도 완전히 망하지 않고 1500여년을 이어올 수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전히 돈오점수를 몸으로 실천하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독교를 보십시오. 들어온 지 130여년 되었는데 존패의 위기를 논할만큼 위기에 처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앙이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자꾸 무엇을 받는 것으로 여겨, 뭘 자꾸 더 받으려고만 합니다. 이러면 바른 신앙, 바른 사람이 되기가 힘이 듭니다. 조금 더 심하게 말하면 받는 것만 추구하는 기독교는 타락할 가능성이 족히 90퍼센트 넘는 기독교입니다. 한 번 은혜를 받고, 한 번 성령을 맛보고, 한 번 구원을 경험한 사람은 진리의 말씀의 가르침을 따라 자신을 쳐서 말씀에 복종하며 사는 것에 신앙의 목표를 두어야 합니다. 경건(敬虔)에 이르기를 연습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 감사의 생활이라고 장로교의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와 독일의「하이델베르크 문답서」에서 한결같이 가르치는 바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교우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인 데살로니가전서를 마무리하면서 의미 있는 권면을 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모든 일에 감사하고 내 살아가는 모습이 곧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되게 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감사입니다. 특별하고 신비한 것만 추구하는 신앙은 받았을 때만 감사하기 십상입니다만 경건을 추구하는 신앙은 매사가 깨달음이요 매사가 감사입니다. 여러분, 올 한 해 무슨 특별한 것이 없었어도 지난 온 모든 시간이 우리에게는 삶의 자양분이었고, 인생의 깨달음으로 주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저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2. 나의 실패 속에서 하나님의 성공을 볼 수 있는 것이 감사입니다

 

 

   사람의 행동양식을 연구한 전문가들에 의하면 사람들이 뭔가를 결정할 때 합리적(合理的)으로 생각해서 결정할 것 같지만 대개의 경우 감정적(感情的)으로 판단하고 결정한다고 합니다. 필요 없는 물건인데도 감정에 끌려 충동적으로 사기도 하고, 정말 필요한 만남인데도 그날 감정 상태에 따라 만남을 취소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정말 꼭 필요한 조언이라도 조언해 주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면 듣지 않고, 잘못된 말인데도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면 그 말을 듣습니다. 이렇게 모순덩어리의 존재가 우리 사람입니다. 그러다보니 감사생활도 왜곡된 감사생활을 할 때가 많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데살로니가에서의 사역은 결코 성공적이라 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오히려 실패에 가까워 보입니다. 사역을 시작한 지 겨우 석 주 되었을 때 유대인들의 폭동이 일어나서 바울과 실라는 숨어야했고, 믿은 지 얼마 안 된 야손은 잡혀서 곤욕을 치러야 했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밤에 몰래 빠져나와 베뢰아로 가야만 했습니다. ‘개봉박두’ 했다가 딱 석 주 만에 ‘폐업신고’를 한 격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이럴 때 감사가 되지 않습니다. 실망(失望)을 거쳐 좌절(挫折)로 갔다가 원망(怨望)이라는 종착역으로 골인하겠지요. 기분 따라 감정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나는 실패했더라도 내가 실패한 자리에서 성공을 일구어 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감사를 합니다. 사람의 눈으로 당장 볼 때 데살로니가 사역은 실패에 가깝지만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면 결코 실패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2,3절을 봅시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살전 1:2,3)

 

 

   예수 믿은 지 겨우 석 주 밖에 되지 않은 갓난아이와 같은 자들을 남겨두고 도망치다시피 나온 바울은 젖먹이를 버려두고 온 어머니의 심정으로 디모데를 보내 데살로니가교회의 상황을 살피고 오도록 보냅니다. 데살로니가교회의 상황을 살피고 돌아온 디모데가 전해 준 소식은 놀라웠습니다. 젖먹이였던 그들이 믿음의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고, 사랑으로 섬김의 삶을 살고 있으며, 세상의 것에 소망을 두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성도들의 신앙이 주변 여러 지역으로 소문이 날 정도로 퍼져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장 8절을 봅시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졌으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살전1:8)

 

 

   도대체 예수 믿고 겨우 석 주 신앙교육 받은 자들이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었을까요? 도대체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이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데살로니가전서에서 감사한다는 말을 줄곧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3장 7절에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큰 위로가 되었다고 합니다. 3장 9절에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능히 어떠한 감사로 하나님께 보답할까?’ 젖먹이 수준의 성도들을 버려두고 떠나올 때 얼마나 마음이 무겁고 착잡했을까요?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무거운 마음에 얼마나 짓눌렸을까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책임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고 살아야 합니다. 오늘 성공이나 실패처럼 보이는 그 결과가 전부가 아닙니다. 믿음의 눈으로 살면 지금의 성공만을 감사의 조건으로 여기거나 지금의 실패를 원망의 조건으로 삼을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 나는 실패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성공을 이루어가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대학 후배가 하나 있습니다. 지금은 후배지만 마음으로 존경하는 후배가 되었습니다. 목회자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반듯하게 자랐고 자기도 목사가 되었습니다. 인품이 좋고 성실해서 사람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한 목사였습니다. 사역도 잘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외도(外道)를 하였습니다. 그것이 고쳐지지 않아 결국 이혼을 하였습니다. 순탄하던 삶이 풍비박산 났습니다. 사역하던 교회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실직자가 된 것입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목회자 되는 길을 밝고 목사가 되어 지금껏 살았는데 돈 버는 재주가 어디 있겠어요? 자식 둘을 키우느라 고생을 이만저만 한 것이 아닙니다. 노숙자들 돌보는 일, 진로상담사, 웃기지요? 자기도 실직했으면서 알바로 진로상담사 일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있습니다. 안정적인 자리를 약속했던 곳이 몇 군데 있었는데, 번번이 안 되더라고요. 인생이 때론 야속합니다. 역경은 꼭 연거푸 찾아오잖습니까? 갑작스레 찾아온 삶의 곤두박질에 정신이 없습니다. 후배에게 제일 힘든 것이 ‘내가 인생의 실패자’라는 자책감이었습니다. 아니라고 부인해도 그 생각이 속을 후벼 파듯이 가슴을 찌릅니다. 그렇게 수년이 흘러갑니다. 그러다가 올 해 초에 새장가를 갔습니다. 정말 신실한 여자 분을 만났습니다. 그런 사람이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났는지 모릅니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 날 거짓말처럼 잔잔해 지는 것같이 요동치던 후배의 인생이 갑자기 잔잔해지기 시작합니다. 꼭 거짓말 같습니다. 사역의 문도 다시 열려서 지금 사역을 안정되게 잘 하고 있습니다. 두 자녀의 마음의 상처도 많이 회복이 되었고요. 그런데 고난을 겪기 전 순탄하던 시절의 그 목사가 아닙니다. 깊은 골짜기와 큰 산을 올라가 본 대가의 풍모가 베여나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큰 사람, 단단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생의 역경과 실패라는 것은 내 선택과 상관없이 찾아와서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습니다. 나는 실패가 아니라고 항변해도 다른 사람이 실패자라고 바라보기에 힘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좌절과 실패를 통해서도 성공스토리를 만들어 가십니다. 믿음의 눈을 뜰 때에 나의 좌절, 나의 실패를 넘어 하나님의 일하심, 하나님의 성공스토리를 보게 됩니다. 진정한 감사는 감정적인 판단의 수준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의 삶을 살아가시는 여러분에게 하늘의 신령한 은혜가 넘쳐나기를 바라고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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