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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행전강해19 빌립보에서 겪은 고난과 결과 
본문 사도행전 16:16~40 (신약 215) 
날짜 2017-11-12 
설교자 전용표 목사 

 

  얼마 전 읽었던 책에 스웨덴의 어떤 기업에서 신입사원을 채용하는 기준이 있었는데 인상적이었습니다. ‘실패 해 본 사람을 뽑아라, 가급적이면 많이 실패한 사람을 뽑아라!’ 실패를 많이 했을수록 성공가능성이 높아졌다고 보는 것입니다. 많이 실패해봤으니 어떻게 하면 실패하는가를 알았으니, 반대로 보면 이제 성공하는 길도 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나라의 경우, 실패를 여러 번 한 사람은 재수 없는 사람 내지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 취급하기 일쑤인데 말입니다. 발상(發想)의 전환이라고 합니까? 사람이 같은 일을 겪으며 살아도 생각을 바꾸면 사는 것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고난을 대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고쳐줍니다. 이 사건으로 바울 일행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되지요. 그날 밤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찬송하다가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경험합니다. 그러나 도망치지 않았고 그 일로 인해 간수가 온 집으로 더불어 예수를 믿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예수의 마음으로 귀신들린 여인을 고치다

 

  바울일행이 기도하는 곳으로 가는 길목에 점치는 귀신 들려 점을 치는 여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 성경으로는 ‘여종’으로 되어 있는데, 원문에는 ‘나이가 어린 여자’입니다. 아마 우리나라로 치면 ‘처녀보살’ 쯤 될 것 같습니다. 바울일행이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이 여자가 따라오면서 소리를 지릅니다.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흔히 ‘귀신같이 안다’고 하지요? 정말 정확히 압니다. 여러 날을 이같이 하니 바울의 마음이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18절입니다.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18)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예수의 이름은 능력의 이름입니다. 만물을 예수의 발 아래 복종하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엡 1:22). 이 예수의 이름으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죄를 회개하였고,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았고, 변화 받았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차별과 억압의 사슬이 깨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오늘날에도 믿음으로 굳건히 붙드는 자에게는 여전히 능력이 됩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예수의 이름이 무슨 부적(符籍) 같은 것이어서 앵무새처럼 ‘예수의 이름으로’를 갖다 대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있어야하고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18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귀신들린 여자를 볼 때에 바울의 마음이 심히 괴로워하였다고 나옵니다. 여기서 괴로워하다는 말은 ‘디아포네데이스’(διαπονηθειs)라는 단어인데, 영어에서는 이 말을 그저 ‘화가 났다, 짜증이 났다(annoyed)’라고 번역을 하였는데, 그렇게 단순한 말이 아닙니다. 상당히 오묘한 말입니다. ‘아픔과 분노가 겹친 감정상태’를 말합니다. 어떤 집에 갔는데, 아이가 아파서 끙끙 앓고 있는데, 아버지란 사람은 벌어서 집에 갖다 주는 것은 없고 허구한 날 술만 마시고 다닙니다. 그때 아이들이 너무 불쌍하고 안쓰럽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아버지란 자에 대해 화도 납니다. 또 그런 상황 자체가 가슴 아픕니다. 이것이 ‘디아포네데이스’, ‘괴로워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지금 귀신들린 여인을 볼 때 평범한 인생, 자기 인생 살지 못하고 귀신에게 붙들려 사는 그 인생이 불쌍한 것이고, 이런 사람을 이용해서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화가 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복받쳐 올라 예수의 이름으로 고친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고 측은(惻隱)히 여기는 마음! 여러분,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느끼신 마음, 품으신 마음이 바로 이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인들이 저마다 깨어진 마음, 깨어진 인생을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한없는 아픔과 측은히 여기는 심정으로 대하시고 품으셨습니다. 거기에 나병에 걸려 평생 버림받은 사람도 포함되고, 거기에는 평생 남을 착취하면서 물질의 풍요는 이루었으나 마음의 평안은 잃어 죄책감의 감옥에 갇힌 사람도 포함되며, 이런저런 이유로 주변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 받던 사람도 포함됩니다. 욕심이 능력으로 돌변한 정신 나간 세상이 되다보니 우리들도 마음에 진정 채워야할 마음은 채우지 않고 엉뚱한 마음만 채우고 살 때가 많습니다. 더 늦기 전에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예수의 마음이 나를 치유하고 타인(他人)을 치유하는 능력입니다.

   세계 최고의 도시 미국 뉴욕의 관문역할을 하는 공항이 ‘라 과르디아 공항(LaGuardia Airport)’입니다. 라 과르디아는 경제대공항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절 1930년대 뉴욕 시장을 3번 연속으로 하면서 공평한 분배정책으로 역사에 남을 불경기 동안 뉴욕시민들이 그래도 다른 지역보다 고통을 덜 당하며 살도록 했던 참된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뉴욕시가 공항을 지으면서 그 사람의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 분이 법학을 전공해서 법관자격도 있어서 봉사직으로 야간 재판관 일을 가끔 보았는데, 어느 날 빵을 훔치다 잡혀온 할머니를 재판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 전에도 빵을 훔친 적 있습니까?” “아니요, 처음입니다.” “왜 훔쳤습니까?” “죄송합니다, 판사님, 직장을 잃었고 집에는 버림받은 두 손녀가 굶고 있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잠시 후 과르디아 시장은 잠시 생각을 하고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사정이 딱해도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은 절도행위입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합니다. 할머니에게 벌금 10달러를 부과하는 바입니다.” 틀림없이 선처를 해 줄 것이라 기대했던 방청객들이 술렁였습니다. 그때 과르디아 시장님이 말을 이어합니다. “이 할머니의 절도행위는 할머니 혼자만의 잘못이 아닙니다. 시민이 굶도록 한 시장(市長)과 이웃을 돌아보지 못한 우리 시민 모두의 책임도 있습니다. 그래서 벌금 10달러를 시장이 공동책임 지도록 하고, 여기에 있는 시민들에게도 50센트씩 벌금을 부과합니다. 부디 십시일반(十匙一飯) 동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고는 자기 모자에다가 10달러를 담아 방청객으로 돌렸습니다. 잠시 후 모자에 모인 돈에서 할머니의 벌금 10달러를 징수하고, 나머지 47달러 50센트를 할머니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법정을 떠나는 할머니 눈에서는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내렸고, 방청객들은 일어서서 가슴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더 늦기 전에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 예수의 마음이 결국 나를 치유하고 타인을 치유하는 능력입니다.

 

 

 

 

 

 

매 맞고 갇힌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송하다

 

   귀신들려 제 인생을 살지 못하던 불쌍한 여인이 고침을 받았으니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함께 기뻐해야 정상이지요. 그런데 세상은 정상이 비정상이 되고 비정상이 정상이 되는 일이 많은 곳입니다. 이 일로 인해 바울은 일생일대의 큰 곤욕을 치르게 됩니다. 점치는 여인을 고용해서 돈벌이를 하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관리들에게 넘긴 것입니다. 그리고 관리들은 제대로 된 조사도 하지 않고 주인들의 말만 믿고 바울과 실라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쳤습니다. 그런데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고발한 내용이 이상합니다. 20,21절을 봅시다.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0,21)

 

 

  사회질서를 무너뜨리는 위험한 풍속을 퍼뜨리는 불순불자라고 합니다. 자기들이 진짜 화가 난 이유는 귀신이 나가서 더 이상 점을 칠 수 없게 되었고 그로인해 자기들 돈줄이 끊겼기 때문인데, 엉뚱한 죄목을 갖다 붙여서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참 야비합니다. 이것이 ‘세상과 인간이 속살’입니다. 한통속이 되면 괜찮은데, 돌아서서 진리의 편에 서면 세상은 서서히 속살을 드러냅니다. 그럴 때 아무리 억울해도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그런 생각 마십시오. 이런 생각을 가질수록 더 실망스럽고 힘만 더 들 뿐입니다. 생각을 성경적으로 바꾸십시오. 타락한 본성을 가진 사람은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고도 남습니다.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하지 마십시오.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은 얼마든지 더 야비해 질 수 있고, 얼마든지 더 악해질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하지 마시고 그 정도인 것에 오히려 감사하십시오. 충분히 그럴 수 있고 충분히 더 악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고도 남는 것이 타락한 본성을 가진 인간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상관들은 사건을 제대로 조사하지도 않고 바울과 실라를 심하게 매로 치고는 ‘깊은 옥’에 가두고 발을 차꼬에 채웠습니다. 깊은 옥은 지하 감옥입니다. 어둡고 습기 차고 더러운 곳입니다. 심하게 매를 맞아 이리저리 터지고 피가 흐르고 상처가 났는데, 치료는커녕 이런 더러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울과 실라가 그 밤에 기도하고 찬송한 것입니다. 25절을 봅시다.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5)

 

 

   고통스런 밤입니다. 원래 밤에 더 아프지요. 밤에 통증이 극도로 심해져서 고통스런 밤이 아니라, 이 밤이야 말로 거짓과 욕심이 진실을 이기고, 야비함이 순수함을 이기고 왕노릇 하는 밤이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인간의 결정을 따라 온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왔는데, 이런 일을 당하니까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데살로니가전서 2장 2절을 보면 바울은 이때의 심정을 이렇게 회고(回顧)합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하나님을 힘입어 이겨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바울과 실라가 처음에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 하나님을 힘입으려고 기도하고 찬송하였습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우리의 마음과 관심을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마음이 자꾸 나를 욕하고 나에게 손해를 입히고 상처를 준 사람에게로 향합니다. 분해서, 열불이 나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신경이 곤두서고 심장이 뛰어서 잠이 오지 않습니다. 혈관이 터질 것 같은 불안감도 듭니다.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트는 것이 기도입니다. 잘 안 됩니다. 부르짖어야 합니다. 부르짖고 부르짖고 또 부르짖어야 겨우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못삽니다. 못된 사람 상대하려면 나도 그만큼 못돼지고 악한 사람 이기려면 내가 더 악해집니다. 믿음 신앙 다 까먹습니다. 부르짖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이렇게 몸부림치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십니다. 보세요. 그렇게 해서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고 그를 바라볼 때! 고난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과 위대함이 보이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이때부터는 이기기 위해 기도하고 찬송하는 것이 아니라 기쁘고 감사해서 드리는 찬송이 됩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억울하게 매 맞고 감옥에 갇혔는데, 마음이 기쁘고, 평안하고, 찬송이 나오는 것은 미친 것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 둘 중 하나입니다. 은혜 속에 잠기면 반은 미친 사람처럼 됩니다. 이 정도 되면 고난이 오히려 변장하고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이 되고 은총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이 고통에 무너지지 않기 위해 기도하고 찬송하였으나 기도와 찬송이 깊어지면서 이제는 정말 감사와 기쁨의 기도와 찬송이 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고난을 통해 한 가정을 구원하시다

 

   그러자 지진이 나며 옥문이 열리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다 열리고 매인 것이 다 벗어졌습니다. 죄수가 도망가면 간수가 그 죄수들의 죄값을 대신 치러야 합니다. 그것이 당시 법입니다. 죄수들이 도망친 줄 알고 지키던 간수가 칼을 빼어 자결하려 했습니다. 그때 바울이 큰 소리로 말립니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우리가 도망치지 않고 다 여기 있다! 순간 간수는 기쁘기보다는 겁이 났습니다. 두려움입니다. 이 거룩한 두려움에 붙들려서 바울과 실라 앞에 무서워 떨면서 엎드려 묻습니다. 29,30절을 봅시다.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29,30)

 

 

   ‘도대체 당신들 정체가 무엇이요? 옥문이 열렸는데, 어째서 도망치지 않는단 말이요? 도대체 당신들이 전파하는 그 예수가 누구란 말이요? 누구길래 그분을 믿으면 매를 맞고도 찬송하게 되고 옥문이 열렸는데도 도망치지 않게 된단 말이요?’ 그러면서 간수는 한 번도 생각지 않았던 구원을 물어옵니다. 사람이 충격적인 일을 경험하거나 보통의 사람의 모습을 뛰어넘는 거룩한 사람을 경험하게 되면 그 속에 종교심이 발동하게 됩니다. 세속적인 관심에 매여 살던 자신이 허무하게 여겨지면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구원을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타락한 인간본성에 찾아오시어 믿음을 주어 믿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이때 바울이 그 유명한 복음을 전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31)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서 맞은 곳을 씻기고 자기와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습니다.

   다음 날 바울과 실라는 석방이 됩니다. 그런데 그때 바울은 이제야 자기가 로마시민권자라는 사실을 밝힙니다. 로마의 ‘쥴리안법’에 의하면 로마 시민은 정식 재판 없이는 처벌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로마시민권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나라를 가든 특권을 누리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미국시민권과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과 실라를 정식 재판도 없이 처벌을 했던 것이니 당국자들은 책임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와서 깊이 사과를 하고 무마를 시킵니다. 그런데 왜 바울은 매를 맞기 전에 자신이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히지 않고 이제야 밝힙니까? 이것이 바울의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고난을 통해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고난이 있는 곳에 복음의 문이 열립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난을 피해가지 않습니다. 고난이 올 때 너무 힘들고 아파도, 너무 억울해도, 그 고난이 아프면 아플수록 하나님의 하실 일이 더 크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 고난이 깊을수록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영혼이 있음을 믿는 겁니다.

 

 

   이것이 바울의 고난신학(苦難神學)입니다. 고난은 연단이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있다는 싸인(sign)이기도 합니다. 저급한 신앙에는 이런 고난신학이 없습니다. 고난을 피해가려고만 합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은 고난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지금까지 겪은 고난이 고통만 주었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것으로 뭔가를 하신 것이 있습니다. 지금 당하는 고난이 힘들다고만 여기지 마십시오. 믿음으로 견뎌내는 여러분의 모습 자체가 주변인들에게는 거룩한 메시지가 됩니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실 사람이 있고 하실 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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