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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행전강해18 성령의 인도를 좇아 마게도냐로 
본문 사도행전 15:36~41 (신약 214) 
날짜 2017-11-05 
설교자 전용표 목사 

 

   경상북도 중에서도 대구 북쪽지방에 ‘지낀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하다’는 뜻입니다. 국어학자의 말에 의하면 ‘지낀다’는 말은 ‘짓다’에서 왔다고 합니다. 아주 옛날에는 사람이 말하는 것이나 짐승이 짓는 것을 구별 없이 짓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사람이 짓는 것을 구별해서 ‘지낀다’라고 했다가 조금 더 품위 있게 ‘말하다’라고 바꿔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말의 역사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잘 알아듣지 못하게 혼자서 중얼중얼 거리는 것이나, 싸우는 상대방이 큰소리로 뭐라뭐라 하는 것을 보고 ‘말한다’라고 표현하지 않고, 뭐라고 합니까? ‘지껄인다, 지낀다’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말하는 것 같지 않고 짐승이 짓는 것처럼 말한다는 의미입니다. 기분이 나쁜 말이지요. 그런데 짐승이 들어도 기분이 나쁠 것 같습니다. 짐승도 자기들은 말을 하는 것인데, 사람이 알아듣지 못한다고 사람 입장에서 ‘짓는다’라고 하고 있거든요.

   일본의 쓰카하라라는 교수가 15년 간 까마귀 언어를 연구해서 까마귀가 쓰는 언어 40가지를 알아내고는 녹음을 했습니다. ‘위험해’라는 까마귀소리를 트니까 모여 있던 까마귀들이 일제히 도망을 칩니다. ‘도와줘’라는 까마귀소리를 트니까 일제히 도와주러 달려옵니다. ‘여기 먹이가 있어’라고 트니까 그쪽으로 다 몰려듭니다. 야마가타 시(市)는 까마귀 떼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보고 있는데, 이 까마귀 언어를 사용해서 까마귀를 퇴치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제는 ‘말 못하는 짐승’ 그러면 안 됩니다. 우리가 알아듣지 못할 뿐이지 자기들끼리는 짓는 것이 아니라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도 밤에 옆의 개농장에서 들려오는 개소리를 10년 들으니까 저것이 잡혀온 개인지 주인 집 개인지 구분이 가고, 슬픈 것인지 화가 난 것인지 제법 알아듣겠습니다.

   짐승의 소리도 10년 15년 자세히 듣고 알려고 하면 알아들을 수 있는데, 하나님의 음성을 왜 못 알아듣는단 말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달리 ‘하나님의 뜻’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 그러니까 자꾸 귀로 듣는 것을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분이 아니라 말씀하시고 또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때로 침묵으로도 말씀하시고, 환경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사람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모두가 기록된 말씀의 범주(範疇)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야하는데, 평소에 그 뜻을 외면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가도 뜻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힘들어졌을 때, 어디로 가야할지 모를 때 주로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이 2차 선교를 떠나서 자신의 계획에 없던 마게도냐 지역으로 가게 된 경위를 기록한 말씀인데,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삶에 대한 많은 통찰을 줍니다.

 

 

 

 

 

 

성령께서 바울을 마게도냐로 몰아 가시다

 

 

   바나바와 결별한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육로(陸路)로 1차 선교 때 돌에 맞아 죽다 살아난 루스드라를 방문합니다. 거기서 평생의 동지이자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를 만납니다. 이때부터 디모데는 바울의 전도팀에 합류해서 함께 다닙니다. 바울 일행은 소아시아지역을 다음 전도지로 삼고 루스드라를 떠나 소아시아지역으로 갑니다. 아주 먼 길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부터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일을 겪게 됩니다. 계획이 틀어지고 일이 자꾸 막히는 것입니다. 6~7절을 봅시다.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6,7)

 

 

   어렵게 소아시아에 도착했는데 성령이 그곳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하셨는지는 모릅니다. 바울일행은 어쩔 수 없이 다른 곳을 물색하다가 비두니아로 갑니다. 이 길도 먼 길입니다. 그런데 거기서도 성령이 허락하지 않습니다. 참 이럴 때 답답하고 힘이 들지요. 최선을 다해 시도하고 노력하는데 번번이 막히고 안 되는 겁니다. ‘내 노력이 부족해서 그렇나?’ ‘잘못된 정보를 믿고 잘못 선택한 것인가?’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지요. 그런데 때로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어떤 의도(意圖)를 가지고 막으실 때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일행은 그것을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드로아에서 겪은 일을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막으셨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8~10절을 봅시다.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8~10)

 

 

   비두니아에서 막히자 이번에는 다시 소아시아 끄트머리에 있는 드로아로 갔는데, 거기서 환상(ὅραμα;호라마)을 보게 됩니다.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나타나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고 말하는 환상이었습니다. 마게도냐는 에게해(Aegean Sea)라는 바다를 건너서 가야하는 땅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곳이고 계획에 없던 일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 사람 하나가 나타나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것입니다. 이때 바울일행은 딱 깨닫습니다. ‘아하,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막으신 이유가 이것이었구나! 바다건너 가라는 말씀이구나!’

   하나님께서 모든 길을 막으시고 딱 한 군데 길만 열어놓으실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몰이식 응답’이라고 부릅니다. 이제 땅거미가 내려앉아 밤이 되려하면 들판에 퍼져있던 양떼를 안전한 우리 안으로 들여야 합니다. 그 일을 양치기 개 한 마리가 합니다. 능숙한 양치기개가 수 백 마리 되는 양떼를 오른쪽에서 몰고, 또 뛰어가서 왼쪽에서 몰고 하면서 결국 그 좁은 우리 안으로 다 들여놓습니다. 저는 이 지역에 와서 목회하며 살게 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두 번 다시 목회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던 사람인데, 어째서 다시 목회를 하고 있는지 제 인생이지만 신기할 따름입니다. ‘와서 내 목회를 좀 도와 달라!’는 어떤 목사님의 전화 한 통을 받았을 때 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환경 공동체에 들어가려 했던 계획이 막혔고, 돈을 버는 일도 막혔습니다. 실컷 일 해 놓았는데, 돈을 받지 못했습니다. 떼였습니다. 너무 형편이 어려우니까 먹고 살기위해 올라왔습니다. 솔직히! 사명감으로 다시 목회를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 막혀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 길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은 제가 가야할 길, 제가 해야 할 일을 다시 하게 하시더라고요. 그것도 부산이 아닌 이 경북 왜관지역에서 말입니다. ‘몰이식 응답’이었습니다.

   모든 길이 막힐 때 거기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기억하시고 주님의 인도하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많은 것을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분주하게 밖으로만 돌아쳐 세미하게 들려오는 주님의 음성을 놓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마십시오. 차라리 ‘망하면 망하리라’는 각오로 밖을 단절(斷切)하고 말씀을 붙들고 기도하면서 내면에 들려오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조금 어렵게 살더라도 이 기회에 내가 주님을 깊이 만나리라!’ ‘원 없이 말씀을 읽고 기도해 보리라!’ 차라리 이런 자세로 나아가십시오. 지금까지 주님을 피상적으로 알고 신앙생활도 형식적으로 하였는데, 이 기회에 진짜 신앙생활 같은 신앙생활 한 번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하십시오. 모든 길이 막혀도 하늘의 길은 열려있습니다. 그 분이 나를 어디로 몰아가실지 그분 뜻에 따르겠다는 믿음을 품는 순간 전혀 뜻밖의 길이 열리는 은혜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확정해서 수납하는 것

 

   바울일행은 이것이 주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인 후에는 곧바로 행동에 옮겨 마게도냐로 가는 배를 탔습니다. 즉각적으로 순종하였습니다. 10절을 다시 볼까요.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10)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여기서 추구하던 것을 일제히 접고 마게도냐만 생각하고 떠나기로 힘썼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이것보다 더 관심이 가는 곳이 10절 말미에 ‘인정함이러라’고 한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썼다’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계획하고 추구하던 것이 모두 가로막혔고, 거기에 환상을 본 일을 종합적으로 생각해서 ‘아하, 하나님의 뜻이 이것인 것 같다’라고 해석했다는 것이고, 그 해석한 것을 자신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으로 확정하고 받아들였다는 말입니다. ‘인정함이러라’는 표현은 이런 뜻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 그러면 뭔가 도장 찍듯이 확실히 보여주시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오늘 여기에 보면 바울일행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과 보았던 환상을 종합해서 거기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믿음으로 확정하였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수납(收納)한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로봇으로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생각하고 판단하고 자유의지를 가지고 결정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마치 야바위같이 꼭꼭 숨어있어서 알아 맞춰야 하고, 틀리면 큰 일 나는, 운명론이 아닙니다.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결정하고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한 뒤 확신을 가지고 가십시오. 그러면 됩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그렇게 하십시오. 기도가 없으면 욕심에 이끌리고 판단이 흐려집니다. 기도 중에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나의 생각과 판단에 관여하시도록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령은 인격적이어서 억지로 하시지 않습니다. 내어드린 만큼 관여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이렇게 받아들였더라도 여기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울을 보십시오. 결정한 후에는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주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였으면 머뭇거림이 없어야 합니다. 엘리야도 주님께서 가라고 가라하셨을 때 즉시로 순종하였습니다. 주님의 뜻인가 아닌가를 확실히 알 수 없을 때는 머뭇거릴 수 있습니다만 일단 주님의 뜻이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였다면 그때부터는 머뭇거림이 없어야 하고 롯의 아내처럼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합니다. 가다가 막혀도 거기서 또 주님의 뜻을 찾고 해야 합니다. 무소의 뿔처럼 가야합니다.

   바울일행은 드로아에서 배를 타고 에게해(Aegean Sea)를 건너 하루 만에 그리스북부 마케도냐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얼마를 걸어서 빌립보라는 도시에 들어갑니다. 빌립보는 주전 4세기에 알렉산더대왕이 자신의 아버지 필립 왕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도시인데, 바울 당시에는 로마의 상류층들이 사는 매우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주전 40년 경 로마의 옥타비아누스(Octavianus)가 자신의 경쟁자였던 안토니우스를 이기고 로마의 초대황제로 등극을 합니다. 이때 안토니우스 편에 서 활동했던 장성들과 고급장교들을 대거 전역을 시킵니다. 그리고 그들을 빌립보에 정착을 시켜서 온갖 혜택을 제공합니다. 당근 정책을 쓴 것입니다. 그때부터 빌립보는 로마시에 버금가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고, 빌립보 시민들의 자부심 또한 대단했습니다. 청담동 사람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 상류층 도시를 향해 조금도 머뭇거림이나 위축됨이 없이 당당히 입성하였습니다. 이런 바울의 당당함이 오늘날 믿는 사람들에게 요구됩니다. 정말 복음을 경험하고 진리로 자유 한 사람은 이러해야 합니다. 힘 있는 사람 앞에 당당하고 힘없는 사람 앞에 겸손할 줄 아는 것이 정말 복음으로 자유 한 사람입니다. 바울과 같이 이런 신앙의 기상(氣像)을 품고 세상 앞에 당당히 서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간 결과

 

   이렇듯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여 바다를 건너 전혀 계획에도 없던 이곳 빌립보까지 왔는데, 하나님께서 준비해놓으신 것이라곤 전혀 없었습니다. 대개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시나고게’라고 하는 ‘회당(συναγωγή)’이 있었습니다. 회당은 오늘날 교회 같은 곳인데, 나그네를 위한 숙박시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주로 회당을 이용한 이유는 따로 돈을 들여 숙소를 구할 필요가 없고, 또 회당에서 매일 정한 시간에 기도를 할 수 있으며, 사람들을 애써 모을 필요 없이 안식일 되면 절로 사람들이 모이니까 전도하기에도 용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빌립보에 와보니 여기는 회당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불편합니다. 12절을 한 번 봅시다.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방의 첫 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12)

 

 

어떻게 숙박을 해결했는지 모릅니다. 어려운 형편에 돈을 썼겠지요. 더 힘든 것은 마땅히 기도할 곳이 없어서 며칠을 찾아 헤맸다는 점입니다. 그럴지라도 선택을 후회하거나 돌아서거나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인 후에 가로막히는 일이 있다면 거기에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뜻을 또 구하며 가면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참된 자세입니다. 이런 자세로 최선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 가십니다. 14, 15절을 봅시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이르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머물게 하니라 (14,15)

 

 

   바울은 기도하고 묵상할 수 있는 곳을 찾다가 강가에서 한 무리의 여인들을 만납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그들 중에 옷감장사 루디아라고 하는 여자가 믿게 되었는데 그가 자기 집에 바울일행을 영접해서 극진히 대접하고 바울의 전도사역을 후원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빌립보교회의 시작입니다. 바울이 로마감옥에 갇혔을 때 빌립보교회에 편지를 썼는데, 거기에 보면 ‘너희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을 위한 일에 참여하고 있다’라고 하면서 각별히 고마워하고 있는 것이 나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자 후원하던 성도나 교회들이 끊어졌습니다만 끝까지 끊지 않고 후원하였던 교회가 빌립보교회입니다. 바울이 주님의 뜻을 깨닫고 자신의 계획과 바람을 접고 따라갔을 때 평생토록 덕을 보게 될 이 귀한 만남을 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여러 가지 방편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음성, 그 뜻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리고 깨달아진 주님의 뜻이 있다면 거기에 순종하시고 최선을 다하십시오. 막상 기대했던 것보다 못한 것이 기다릴지라도 실망치 마시고 끝까지 가십시오. 주님의 귀한 선물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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