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 home
  • 주일설교

제목 사도행전강해17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 
본문 사도행전 15:36~41 (신약 214) 
날짜 2017-10-29 
설교자 전용표 목사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고 결별하다

 

   예루살렘공의회에서 돌아온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공의회의 결정을 안디옥교회에 알렸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가 아닌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결정은 혼란에 빠져있던 안디옥성도들에게 안정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며칠 후 바울은 바나바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합니다. 1차 선교여행 때 개척해 놓은 지역의 성도들이 신앙을 잘 지키고 있는가 보러가자는 제안이었습니다. 36절을 봅시다.

 

 

며칠 수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6)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나바는 요한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하고 바울은 1차 선교여행 때 밤빌리아에서 일방적으로 되돌아간 마가를 데리고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둘이 맞서게 된 것입니다. 37~38절을 봅시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7,38)

 

 

   사도행전 13장 13절을 보면 마가요한이 돌아간 사건이 나옵니다. 아마 젊은 나이에 호기(豪氣)로 따라나섰겠지요. 선교 이러면 굉장히 이상적으로 들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막상 부딪혀 보면 현실이거든요. 먹는 것 잠자리 뭐 하나 편하게 없고, 배 멀미에, 발바닥이 다 벗겨질 정도로 걷고 또 걷습니다. 거기다가 이만저만 아닌 반대와 핍박에 위기도 수시로 찾아오지요. 그러니 상의도 하지 않고 도망치듯이 가버렸던 것입니다. 2차 선교를 떠나면서 바나바는 마가요한을 다시 데려가자 그러고 바울은 혼자 편하자고 돌아간 자를 다시 데려갈 수 없다고 하여 팽팽하게 맞서게 되었습니다.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39,40)

 

 

   결국 두 사람은 이 일로 심하게 다툰 끝에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결별(訣別)하였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과 얼마 전 예루살렘 총회에서 변론을 통해 합의점을 도출해 내는 성숙한 회의를 경험하고 왔는데, 그걸 이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연약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러한 인간의 연약함을 사도라고 해서 감춰주지 않습니다. 적나라합니다. 성경은 사람을 미화(美化)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줍니다. 우리도 사람을 미화하는 일을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 바나바 두 사람의 다툼은 개인적 악감정 때문이라기보다 서로 기준이 달랐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기질(器質)의 차이도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바나바는 ‘위로하는 사람’이라는 뜻에서도 드러나듯이 그저 이해하고 덮어주고 넘어가는 사람입니다. ‘아, 아직 젊다보니 힘들면 포기할 수도 있고 그런 거지 뭐! 그러면서 단단해 지는 건데 자네가 한 번 눈감아 주게!’ 이랬을 것 같습니다. 반면에 바울은 원리원칙을 많이 따지는 사람입니다. ‘아니, 적어도 선교를 하겠다고 따라나섰으면 그 정도 고생은 견딜 줄 알아야지요! 그리고 혼자 편하자고 돌아가는 것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의식이 없는 것 아닙니까? 그걸 어찌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까?’ 이랬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선한 일을 하더라도 기질의 차이로 부딪힐 때가 있고, 평소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관의 차이로 갈등을 빚을 수도 있습니다. 일하는 방법과 속도의 차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주방일을 할 때에 어떤 사람은 일을 척척 쳐냅니다. 속도가 빠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세심하게 하느라 속도가 늦습니다. 이 차이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문제는 부딪힐 수 있지만 ‘그것을 해결하고 가느냐?’입니다. 누차 말씀드리지만 부딪히지 않는 것이 실력이 아니라 해결하는 것이 실력입니다. 피를 나눈 형제지간에도 맞지 않아 갈등하기도 하는데, 많은 것이 다른 남남이 만나 갈등 없이 간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소소한 갈등도 없는 교회? 너무 이상적입니다. 부딪히는 것은 있는 교회는 지극히 정상입니다. 그러나 해결하지 못하는 교회는 비정상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부딪히지 않는 것이 실력이 아니라 해결하는 것이 실력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바나바는 해결을 하지 못하고 결별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주님 앞에 쓰러지라!

 

   그것이 기질의 차이든, 명분의 차이든, 사역철학의 차이든 간에 갈등을 해소하지 못하고 결국 분열로 가고 말았다는 것은 이유여하를 망론하고 비판을 피해갈 수 없는 부분입니다. 더군다나 바울과 바나바는 일반 평신도도 아니고 교회의 지도자들 아닙니까? 사도가 아닙니까? 현실 교회도 마찬가지지요. 평신도 때문에 교회가 분란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 교회의 실권을 가진 자들, 지도자들에 의해 일어납니다. 그래서 지도자들의 책임이 더 크고 지도자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더욱 민감해야 합니다.

   참 아쉬운 대목입니다. 바울 같은 사람이, 바나바 같은 사람이 왜 이때 골방에 들어가서 깊은 기도에 들어가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미 발동(發動)이 걸려버리면 골방기도가 어렵게 됩니다. 한 번 부딪혀 감정이 올라와 버리면 그때부터는 이기려는 강한 욕구가 발동이 돼 이성(理性)도 잡아먹고, 신앙도 잡아먹어 버립니다. ‘우리 이러지 말고 떨어져서 하루라도 기도해 보고 다시 만나자’며 발동 걸리기 전에 기도부터 해야 하는데, 그 순간 이런 생각을 못하는 것이지요. 이미 발동 걸렸다하면 이성과 신앙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는데 말입니다.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고무적인 것은 두 사람 다 사역을 중단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만약 이 둘이 다른 악의적인 목적을 가지고 싸웠다면 이렇게 순수하게 사역을 이어가지 못합니다. 거기다가 두 사람은 싸워도 깨끗하게 싸웠습니다. 페어플레이(fair play)를 했습니다. 싸워도 이런 식으로 싸우면 나중에 회복이 쉽습니다. 공동체 안에서 갈등이 어려워지는 원인이 실제 의도하는 바는 따로 있는데, 그것을 그럴싸한 명분으로 포장을 해서 싸우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자꾸 억지로 명분을 만들게 되고, 논리도 만들게 되다보니 억지 논리가 되고 싸움은 더욱 진흙탕이 됩니다. 이런 싸움은 상대를 죽여야 끝이 나기 때문에 회복이 거의 불가능하고, 화해를 붙인다 해도 미봉책(彌縫策)으로 끝이 나기 때문에 또 다시 터지고 또 다시 터집니다. 결국 진정한 갈등의 해결책은 각자가 만사 제쳐놓고 골방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골방에 들어가서 억울해도 하나님 앞에서 하소연해야 합니다. 그리고 졌다고 한탄할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내가 이런 진흙탕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는가를 한탄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이기는 것을 구하지 말고 주님의 인도하심을 구해야 합니다. ‘주님,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게 기도하다보면 일이 이렇게 꼬이고 엉망이 된 데에도 어떤 뜻이 있음을 깨닫는 시간이 찾아옵니다. 이렇게 엉망이 되었어도 이것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 나의 주님이라는 사실이 깨달아집니다. 그때가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는 일을 시작하시는 때입니다. 이것이 싸움의 끝입니다. 이겨서 끝을 보려고 하면 끝이 나지 않습니다. 인생이 더 미궁(迷宮) 속에 빠져들게 됩니다. 야곱이 형 에서와 싸워 이기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고 얍복강 가에서 하나님과 결판 보는 길을 선택했을 때 하나님께서 일하시지 않았습니까?

 

 

 

 

 

멀리 봐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도행전 기자는 이 두 사람의 다툼과 결별에 대해 그 어떤 윤리적 판단도 내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잘했니 못했니?’도 없고, ‘이런 식으로 행동한 것이 잘 한 것인가 못한 것인가?’라는 평가도 내리지 않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이것으로 이 사건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이 사건을 묘하게 끌어가시기 때문입니다. 먼저 이 사건은 이것으로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결별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9~11절을 보면 나중에 마가요한은 크게 성장해서 절대 중도하차 하지 않는 신실한 일군이 되었고, 바울 또한 마가요한을 용납하였을 뿐 아니라 곁에 두고 싶어 했습니다.

 

너는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니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디모데후서 4:9-11)

 

 

   바울은 내쳤던 마가요한을 다시 받아들였습니다. 바나바와의 회복이 전제된 일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결론이 무엇인지는 다 압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앞세워야 합니다. 그래야 결론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이 사건을 오묘하게 이끌어 가셨습니다. 이 결별로 인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훨씬 더 발전적으로 일이 진행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자기 고향 구브로로 전도를 갔고, 바울과 실라는 길리기아 쪽으로 갔는데, 2차 선교여행을 기록한 16~18장을 살펴보면 원래 계획에는 없던 소아시아 지역과 저 바다 건너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지방까지 가게 됩니다. 드디어 유럽에 복음이 전파된 것입니다. 전혀 계획에 없던 일입니다만 하나님께서는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을 하나의 재료로 삼아 이렇게 멋지게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인간의 다툼과 분열을 합리화시켜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하나님은 결코 실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저질러 놓은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충분히 이루어 가시는 분입니다.

   창세기 29~30장을 보면 야곱의 여인들이 벌이는 암투가 나옵니다. 언니 동생 지간에 서로 남편을 차지하려는 경쟁이 치열합니다. 때로는 남편과의 하룻밤 동침을 위해 치졸한 뒷거래까지 이루어집니다. 자신이 아이를 낳지 못하자 몸종까지 씨받이로 사용해서 상대보다 아이를 많이 낳으려고 합니다. 그토록 야심 많던 야곱이 가정 문제에서는 전혀 주도권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두 여인네 입김에 끌려 다니기만 합니다. 콩가루도 이런 콩가루 집안이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 하나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언니 동생의 치졸한 치정(癡情)다툼을 통해 결국은 열 두 아들이 태어나고,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뿌리가 만들어집니다.

 

 

   앞에서 인간이 치열하고 치졸하게 싸우고 경쟁할 때에 뒤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앞에서 인간의 연약함과 실수가 어지러운 상황을 만들고 있어도 주님은 그것을 재료삼아 주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악함과 실수를 통해서도 의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안심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번호 제목 본문 날짜 설교자
338 사도행전강해8 하늘나라에 핀 꽃 스데반 사도행전 6:8~15, 7:54~60 (신약 196)  2017-08-27  전용표 목사 
337 사도행전강해9 섭리와 회심 사도행전 8:1~25 (신약 199)  2017-09-03  전용표 목사 
336 사도행전강해10 주님의 택하신 그릇 사도행전 9:1~19 (신약 201)  2017-09-10  전용표 목사 
335 사도행전강해11 편견을 허무는 복음 사도행전 10:1~23a (신약 201)  2017-09-17  전용표 목사 
334 사도행전강해12 말씀 중에 임하시는 성령 사도행전 10:23b~48 (신약 204)  2017-09-24  전용표 목사 
333 사도행전강해13 위대한 후발주자 안디옥 교회 [2] 사도행전 13:1~3 (신약 204)  2017-10-01  전용표 목사 
332 사도행전강해14 구브로 선교 사도행전 13:4~12 (신약 208)  2017-10-08  전용표 목사 
331 사도행전강해15 루스드라 전도 사도행전 14:5~28 (신약 211)  2017-10-15  전용표 목사 
330 사도행전강해16 예루살렘 공의회 사도행전 15:1~21 (신약 213)  2017-10-22  전용표 목사 
» 사도행전강해17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 사도행전 15:36~41 (신약 214)  2017-10-29  전용표 목사 
328 사도행전강해18 성령의 인도를 좇아 마게도냐로 사도행전 15:36~41 (신약 214)  2017-11-05  전용표 목사 
327 사도행전강해19 빌립보에서 겪은 고난과 결과 사도행전 16:16~40 (신약 215)  2017-11-12  전용표 목사 
326 사도행전강해20 데살로니가교회를 통한 감사 사도행전 17:1~9 (신약 216)  2017-11-19  전용표 목사 
325 성찬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 고린도전서 11:23~32 (신약 277)  2017-11-26  전용표 목사 
324 사도행전강해21 아덴 사람들의 고상함 사도행전 17:16~34 (신약 217)  2017-12-03  전용표 목사 
323 사도행전강해22 고린도에서의 위로 사도행전 18:1-11 (신약 218)  2017-12-10  전용표 목사 
322 사도행전강해23 열정과 냉정사이 사도행전 18:18-23 (신약 219)  2017-12-17  전용표 목사 
321 사도행전강해24 총체적 신앙 사도행전 18:24-28 (신약 219)  2017-12-24  전용표 목사 
320 성탄절 설교) 마구간 예수 마구간 신앙 누가복음 2:1~7 (신약 89)  2017-12-25  전용표 목사 
319 사도행전강해25 진짜 살이 사도행전 19:8-20 (신약 219)  2017-12-31  전용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