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 home
  • 주일설교

제목 사도행전강해16 예루살렘 공의회 
본문 사도행전 15:1~21 (신약 213) 
날짜 2017-10-22 
설교자 전용표 목사 

 

 

  두 사람이 크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싸우는 기세는 전쟁터에서 적군과 맞서 싸우는 장수와 같았습니다. 싸우는 이유는 논에 물대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들의 싸우는 모습을 보고 어떤 사람이 지혜자에게 물었습니다. “겁 없이 싸우는 저들의 용기가 어떠합니까?” “저것을 어찌 용기라고 하겠느냐?” 또 한 무리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작거리의 깡패들이 어떤 한 사람을 위협하면서 자기 가랑이 사이로 지나가라고 시켰습니다. 그러자 허우대가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두말하지 않고 깡패두목의 가랑이사이로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를 보고 또 지혜자에게 묻습니다. 저렇게 비굴한 자에게 용기라는 것이 있습니까? 지혜자가 대답합니다. “저 자야말로 대용(大勇)을 가진 자다. 큰 용기란 사소한 것에는 질 줄 알고 정말 중대한 일에는 목숨을 걸고라도 나설 수 있는 용기다.” 사람이 반대로 살 때가 많습니다. 사소한 것에 자존심을 온통 다 걸고 사생결단 하듯 싸우고, 정말 중대한 일에는 누가 나서주겠지 하면서 한 발짝 뒤로 뺍니다. 믿는 자들이 진리문제에 있어서는 어떤 불이익 앞에서도 물러섬이 없기를 바라고 그렇지 않은 문제에서는 져줄 줄 아는 용기를 갖추기를 바랍니다.

 복음이 이방인에게까지 왕성하게 전파되자 이번에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저 예수만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아니면 구약의 율법을 다 지켜 행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라는 문제였습니다. 이방인들 중에 믿은 자들은 할례를 행하지도 않고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지도 않고, 정한 것 부정한 것을 엄격히 구별하는 정결법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정통유대인 출신 신자들은 ‘저거 저런 식으로 엉터리로 믿어도 구원을 받는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율법을 철저히 지켜온 정통유대인들이 볼 때 이방인 출신 성도들은 시쳇말로 ‘날라리 신자’로 보였고, 더 나아가서는 구원받지 못한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이 문제는 구원론과 관계된 중대문제로서 초대교회 전체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이에 초대교회 지도자들인 사도들과 장로들은 심도 있는 연구와 토론 끝에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서 동일하며 모두가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위대한 결론을 내놓게 됩니다. 이때 모인 예루살렘 회의를 기독교 최초의 공의회(共議會)라고 부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를 기록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구원의 원리와, 의견이 상충되었을 때 풀어나가는 하나됨의 원리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특권을 내려놓고 은혜가 은혜되게 하십시오

 

 일의 발단은 바울과 바나바의 파송교회인 시리아안디옥교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를 마치고 안디옥교회로 돌아와 보니 교회 분위기가 뒤숭숭합니다. 유대로부터 왔다는 어떤 사람들이 모세의 율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1절과 2절 상반절을 봅시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1,2a)

 

 유대에서 온 자들과 바울 바나바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치열하게 논쟁하고 싸워서라도 지켜야할 진리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하고 할례를 받아야한다고 가르친 이들은 바리새파출신들로서 서신서들에서는 ‘할례파(割禮派)’ 내지 ‘율법주의자(律法主義者)’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하고 적어도 할례, 안식일규정, 정결법 이 세 가지 정도는 꼭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조금 더 설명을 하자면 이렇습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된 증표를 칼로써 몸에 새기는 것인데, 몸에 하나님 표식 하나 없이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가? 안식일에 일 할 것 다하고 놀 것 다 놀고 어떻게 그런 정도의 신앙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할 것을 서른아홉 가지 정해놓고 철저히 지켰는데, 적어도 그 정도는 지키는 신앙이라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판할 때 ‘안식일에 병자를 고쳤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비벼 먹었다!’라며 안식일 어겼다고 비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지금 또 다시 그것을 들고 나옵니다. 또 한 가지는 정결법입니다. 정한 짐승, 부정한 짐승 가려서 먹어야 된다, 몸을 부정하게 하는 것들은 일체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구원받는다, 이겁니다. 이것도 바리새인들이 예수님 비판할 때 ‘왜 너의 제자들은 씻지 아니한 손으로 먹는가, 왜 정결법을 지키지 않는가?’라며 내세웠던 것입니다.

 이들이 이러한 주장을 한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적 우월주의와 특권의식 때문입니다. 자기들은 지키기 힘든 이 많은 것들을 지켜서 구원을 얻었고 지금껏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겨왔는데, 구원 얻는 길이 너무 쉬워버리면 자기들의 우월함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게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꾸 구원의 길을 어렵게 어렵게 만드는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늘의 모든 특권(特權)을 내려놓고 이 땅에 오셔서 대신 형벌의 십자가를 지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유대인이라는 특권을 버리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옹졸함입니다. 그 어떤 논리로도 인정될 수 없는 옹졸함입니다. 여러분, 예수의 십자가 공로로 구원받은 자들에게 무슨 특권이 있습니까? 하늘의 특권을 버리고 인간이 되신 예수 앞에서 무슨 특권을 주장한단 말입니까?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받지 않은 것이 없는데, 무슨 내세울 특권이 있단 말입니까? 몇 대 째 예수 믿은 것? 특권 아니라 은혜입니다. 대대로 목사요 장로 집안이라는 것? 그것도 특권이 아닌 은혜입니다. 교회에 얼마나 공헌을 하였다는 것도 그렇게 할 수 있는 복 주신 하나님의 은혜이지 그것이 어떻게 특권으로 둔갑할 거리가 된단 말입니까? 십일조를 많이 했다? 많이 할 수 있는 경제력을 주시고, 정직히 드릴 수 있는 신앙주신 은혜이지, 그것도 특권은 아닙니다. 온갖 것이 다 특권으로 둔갑한 한국교회는 수준이 낮은 것입니다. 은혜를 말하지만 온갖 인간적인 특권으로 은혜를 지워버린 것이 한국교회 오늘날 실상입니다. 진정 은혜 받은 사람들이 어떻게 큰 소리를 친단 말입니까? 가당치 않은 말입니다. 내 공로라 생각하니 특권을 주장하는 것이고, 특권이라 생각하니 큰소리치는 것입니다. 교회는 정말 은혜로 가야합니다. 그래야 교회도 살고 교회가 사회의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 중 하나가 특권관행입니다. 좀 직책이 있으면 줄 서지 않아도 되고, 남들은 받지 못하는 혜택을 아무렇지 않게 요구하고 받습니다.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이 특권 관행(慣行)이 성실히 줄 선 사람들을 허탈하게 하고, 정직한 땀 흘린 사람들을 초라하게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파수꾼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 안에서부터 특권의식을 깨부수지 못한다면 세상의 희망으로 설 날은 요원(遼遠)합니다. 우리가 먼저 특권의식을 버려야 합니다. 먼저 온 것도 특권이 아니고, 남보다 많이 한 것도 특권이 아닙니다. 오로지 은혜라야 하고, 정말 은혜라야 합니다. 전에도 은혜라야 하고, 후에도 은혜라야 합니다.

유대 율법주의자들은 신앙의 우월의식과 특권의식을 버리지 못하여 이방인들에게 무거운 멍에를 지우려 하자 바울과 바나바는 진리의 문제로 인식하고는 떨쳐 일어난 것입니다.

 

 

 

예비된 은혜,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다투고 논쟁해도 결말이 나지 않자 안디옥교회는 대표단을 꾸려서 예루살렘교회에 보냅니다. 예루살렘교회에는 저명한 사도들과 장로들이 있는데 이들에게서 가장 성경적인 해답을 얻고자 한 것입니다. 대표자들이 예루살렘에 당도하자 거기서도 바리새파출신의 율법주의자들이 있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게 되고 치열한 변론이 이어집니다. 이때 베드로가 나서서 변론을 매듭지을만한 중요한 발언을 합니다. 8~9절 함께 읽습니다.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8,9)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똑같이 성령을 주셨고, 마음의 죄를 씻어 깨끗하게 하셨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율법을 지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 이것이 논쟁을 종결시키는 결정적 한방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말이 설득력이 큰 이유는 베드로가 할례 받지 아니한 이방인 고넬료 집안사람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시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할례나 정결법과 상관없이 전적인 은혜로 구원하시는 것을 경험하고 말하니까 그 말에 힘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선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점이 베드로야 말로 어렵고 힘든 문제 들고 예루살렘을 찾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있어서 피할 길이었고 예비 된 은혜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엉뚱한 소리했으면 어찌할 뻔 했습니까? 이런 중대한 논쟁이 있을 것을 미리아신 하나님께서 초대교회의 절대적 지위를 가지고 있던 베드로를 미리 준비시켜 두신 것이지요. 제가 군입대를 남들보다 2년 늦게 갔습니다. 대학부담당 목사님이 일찍 가지 말고 대학부 일 좀 더하고 가라, 늦게 가더라도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다고 해서 2년 늦어졌습니다. 이등병 달고 자대배치를 받았는데, 주일 교회 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는 주일마다 부대 밖에 있는 대전리교회라는 곳에 가서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 부대 최고고참이 권○○라는 영천사람인데 제가 자기와 동갑인데 이제 이등병이라며 안쓰럽게 여겨서 자기가 예배드리러 갈 때 저를 데리고 가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신앙이 있어 교회를 간 것이 아니라 교회 아가씨들 만나서 이야기하고 놀려고 간 것입니다. 그 고참 따라 주일마다 교회를 가게 되었는데, 그것이 계속되다보니 그 고참이 전역을 한 후에도 부대원들은 제를 의례히 교회 가는 사람으로 인정을 해주었습니다. 그 고참이 저에게는 피할 길이었고 예비 된 은혜였습니다.

 우리가 시험 당하고 힘든 일 만났을 때, 아무리 해도 결말이 나지 않는 문제 앞에서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신 피할 길이 있고 예비 된 은혜가 있습니다. 낙담하지 마십시오.

 

 

 

 은혜로 구원받는 원리가 확정되었습니다

 

 이어서 베드로는 기독교리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선언을 합니다. 율법의 행함이 아닌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선언입니다. 10~11절을 봅시다.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10,11)

 

 율법을 다 지켜 행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습니다. 인간은 여기에 자꾸 무엇을 덧붙이려고 합니다. 어떤 때는 자기들 잇속을 위해서 덧붙입니다. 다음 주일은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뜻깊은 주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성벽에다가 로마카톨릭에서 발행하는 면죄부(免罪符)가 비성경적인 것임을 밝히는 95개조 반박문을 붙인 것이 조그마한 불씨가 되어 결국 중세 암흑기를 무너뜨리는 종교개혁의 불꽃으로 타올랐던 것입니다. 면죄부는 죄를 면하게 해 준다는 문서입니다. 메달로 제작된 것도 있습니다. 중세카톨릭교회는 이것만 사면 어떤 죄를 지어도 하나님께서 용서해주시고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신다면서 면죄부를 만들어 팔았습니다. 심지어 죽은 사람을 위해서도 면죄부를 사면 그 사람이 지옥에 있다가도 천국으로 옮겨간다고 하면서 팔았습니다. 면죄부는 실은 로마에 베드로대성당을 짓다가 모자라는 건축비를 충당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돈으로 구원받는 것입니다. 너무 비성경적입니다. 요즘도 비슷한 경향들이 없지 않습니다. 교회에 헌금을 많이 내면 직분도 주고, 그 사람이 진실로 회심을 하였는가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도 해줍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 만나는 신비한 체험(體驗)을 하면 구원받은 것으로 여깁니다. 신비체험은 타종교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체험으로 구원받지 않습니다. 체험이 없어도 구원받습니다. 평생 신비한 신앙체험 없어도 하나님 백성답게 사는 사람이 있고 신비한 체험을 많이 하고서도 하나님 백성답지 않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체험을 너무 의지하는 것도 그리스도의 공로가 아닌 또다른 자기의(自己義)를 추구하는 위험한 신앙입니다. 구원은 우리가 어떤 조건을 갖추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십니다. 그래서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삶은 어떻게 살든 상관없이 무조건 천국 간다는 의미로 곡해하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로 구원받는 것에 진실하고도 철저한 회개(悔改), 즉 생명에 이르는 회개가 반드시 동반되어야 합니다. 회개 없는 구원은 없습니다. 그리고 구원 이후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철저한 삶이 동반됩니다. 그것이 있어야 진짜 구원받은 것입니다.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니 굳이 바르게 살지 않아도 다 용서받고 다 천국 간다는 식으로 가르치는 것만큼 악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종교개혁자이자 우리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생각에 복음의 가장 큰 적들은 로마의 교황도, 이단도, 유혹하는 자들도, 독재자도 아닌 바로 나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선한 행위가 없는 죽은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야말로 나쁜 그리스도인들로서 복음의 가장 큰 적입니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공로만을 의지하는 참믿음으로 구원받은 사람에게서는 반드시 올바른 삶이라는 열매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죄 없으신 하나님이 아들께서 나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함부로 살 수 있으며, 어떻게 죄를 지으면서 ‘이미 용서해주셨는데 뭘’ 하면서 죄짓는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자위(自慰)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작은 죄에도 이 죄로 인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며 아파하고 죄짓는 자아를 한탄하여야 마땅합니다. 이것이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말의 참의미입니다.

 

 

 

야고보가 최종적 결론을 내립니다

 

 베드로의 결정적인 발언이 있은 후 최종적으로 예루살렘교회의 좌장(座長)인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이방인들 중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에게 할례 등 율법준수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라고 결론을 맺음으로써 “은혜로 구원받는 교리”를 확증합니다. 그런데 몇 가지 단서를 붙입니다. 19~21절을 봅시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19~21)

 

 우상의 더러운 것은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을 멀리하라는 것이고, 음행을 멀리하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는 같은 의미로써 피를 먹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규범이라기보다는 뒤에 21절에 나오듯이 유대인들이 거북하게 생각하는 것들이니 그들을 위해서 하지 말라는 권고사항입니다.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어도 다른 형제가 혐오스럽게 여기는 것을 스스로 자제하라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제사지낸 음식을 먹는 것이 죄가 아닙니다. 이방인들은 제사음식 먹을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우상에게 제사지낸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죄로 여기고 혐오스럽게 여깁니다. 짐승의 피를 먹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형제가 옆에 있을 때에는 그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행동들을 자제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숙한 신앙이고, 진정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 갖추어야할 신앙인격이다, 이 말입니다. 진리의 문제에서는 한 치의 양보가 없었지만 그 외의 문제는 언제나 철저하게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성숙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무리를 지었습니다.

번호 제목 본문 날짜 설교자
338 사도행전강해8 하늘나라에 핀 꽃 스데반 사도행전 6:8~15, 7:54~60 (신약 196)  2017-08-27  전용표 목사 
337 사도행전강해9 섭리와 회심 사도행전 8:1~25 (신약 199)  2017-09-03  전용표 목사 
336 사도행전강해10 주님의 택하신 그릇 사도행전 9:1~19 (신약 201)  2017-09-10  전용표 목사 
335 사도행전강해11 편견을 허무는 복음 사도행전 10:1~23a (신약 201)  2017-09-17  전용표 목사 
334 사도행전강해12 말씀 중에 임하시는 성령 사도행전 10:23b~48 (신약 204)  2017-09-24  전용표 목사 
333 사도행전강해13 위대한 후발주자 안디옥 교회 [2] 사도행전 13:1~3 (신약 204)  2017-10-01  전용표 목사 
332 사도행전강해14 구브로 선교 사도행전 13:4~12 (신약 208)  2017-10-08  전용표 목사 
331 사도행전강해15 루스드라 전도 사도행전 14:5~28 (신약 211)  2017-10-15  전용표 목사 
» 사도행전강해16 예루살렘 공의회 사도행전 15:1~21 (신약 213)  2017-10-22  전용표 목사 
329 사도행전강해17 바울과 바나바의 결별 사도행전 15:36~41 (신약 214)  2017-10-29  전용표 목사 
328 사도행전강해18 성령의 인도를 좇아 마게도냐로 사도행전 15:36~41 (신약 214)  2017-11-05  전용표 목사 
327 사도행전강해19 빌립보에서 겪은 고난과 결과 사도행전 16:16~40 (신약 215)  2017-11-12  전용표 목사 
326 사도행전강해20 데살로니가교회를 통한 감사 사도행전 17:1~9 (신약 216)  2017-11-19  전용표 목사 
325 성찬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 고린도전서 11:23~32 (신약 277)  2017-11-26  전용표 목사 
324 사도행전강해21 아덴 사람들의 고상함 사도행전 17:16~34 (신약 217)  2017-12-03  전용표 목사 
323 사도행전강해22 고린도에서의 위로 사도행전 18:1-11 (신약 218)  2017-12-10  전용표 목사 
322 사도행전강해23 열정과 냉정사이 사도행전 18:18-23 (신약 219)  2017-12-17  전용표 목사 
321 사도행전강해24 총체적 신앙 사도행전 18:24-28 (신약 219)  2017-12-24  전용표 목사 
320 성탄절 설교) 마구간 예수 마구간 신앙 누가복음 2:1~7 (신약 89)  2017-12-25  전용표 목사 
319 사도행전강해25 진짜 살이 사도행전 19:8-20 (신약 219)  2017-12-31  전용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