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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행전강해15 루스드라 전도 
본문 사도행전 14:5~28 (신약 211) 
날짜 2017-10-15 
설교자 전용표 목사 

 

  ‘사서 고생’이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정반대의 말처럼 보입니다. 전혀별개의 말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실제의 삶에 있어서는 ‘사서 고생’을 사서 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서 고생을 일부러 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을 볼 때 ‘사서 고생’이라는 말과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일면 통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 중에 차를 타지 않고 걸어 다니는 분이 계십니다. 젊었을 때 교통사고가 크게 난 후로 트라우마가 생겨서 운전을 못합니다. 그때부터 줄곧 걸어 다니는데, 그렇다고 어쩔 수 없어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걸어 다닙니다. 필요하면 사모님이 운전하시는 차로 언제든 차를 탈 수 있는 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이분이 입맛이 어린아이 입맛입니다. 과자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가방이 항상 부스럭거립니다. 만났다 하면 ‘어이, 전목사 과자 먹어라’하고 내놓습니다. 단 것 좋아하고, 과자 좋아하고, 아이들이 먹는 조그마한 소시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릅니다. 몸에 안 좋은 것만 골라서 좋아합니다. 그런데 건강에 적신호 오지 않고 버티는 것은 ‘사서 고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생, 고난, 이런 말들이 마음 편한 말들은 아니지만 인생을 살다보면 꼭 치러야하는 고생이 있고, 피해가면 손해 보는 고난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고난이 당시로서는 쓰라리지만 고난을 겪은 사람이 나중에 존경을 받기도 합니다. 덕이 되는 고난, 열매가 되어 돌아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바울은 구브로 섬에서 육지로 올라와서 비시디아 안디옥과 이고니온이라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혀 루스드라라는 곳으로 장소를 옮겨서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고 진리를 위해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도 어려운 일들을 겪게 되는데, 마귀의 공격이라 할 수 있는 몇 가지 일을 겪으면서 교회를 세워나갑니다.

 

 

자기우상화의 공격을 이겨내다

 

 마귀의 첫 번째 공격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사람을 고친다음 찾아왔습니다.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돌로 치려하자 바울과 바나바는 하는 수 없이 사역지를 루스드라로 옮깁니다.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에서 남동쪽으로 30km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루스드라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데,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앉은뱅이) 하나가 집중해서 듣는 것입니다. 9절을 봅시다.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9)

 

 멍하니 들은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마음을 다해, 열심히, 그리고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들었습니다(ηκουσεν). 바울이 보니 그에게는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어보였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듣다보니 믿음이 생겨났습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서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다’고 하셨습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내 속에서 믿음을 만들어냅니다.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은 큰소리로 ‘네 발로 일어서라’고 외쳤습니다. 그러자 나면서 걷지 못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걷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놀라며 탄성을 지르며 난리가 났습니다. 사람들은 신들이 인간의 형상으로 내려오셨다고 하면서 바나바는 제우스신이라 하고 바울은 헤르메스신이라 하였습니다. 뒤편에서 풍채(風采)가 좋고 근엄하게 서 있는 바나바는 신들의 제왕 제우스처럼 보였던 모양이고, 전면에 나서서 말을 하고 행동하는 비교적 젊은 바울은 제우스신의 대변인 헤르메스로 보였던 모양입니다. 소를 끌고 와서 자신들에게 제사를 지내려 하자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으면서 말렸습니다.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15) 그러면서 헛된  일을 버리고 만물을 지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강하게 촉구합니다.

당연해 보이는 바울과 바나바의 행동이 실제로는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처럼 되고자 선악과를 따먹었던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은 태생적으로 영광에 대한 집착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지만 은근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영광을 취합니다.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고 놀라운 감동을 선사하는 유명강사들이 마치 자신의 경건의 능력이나 영력으로 한 것처럼 자기를 높이면서 종국에는 헌금을 강요하는 서글픈 모습은 이제 익숙한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영혼구원이 목적이라 해놓고 결국 자기들의 영광을 구하는 관행(慣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지금 선교지에 예배당 건축을 시작했습니다만 작금(昨今)의 교회들이 선교지에 예배당을 지으면서 현지인들이 발음도 하기 어려운 한국교회이름을 쓰기를 강요합니다. 우리나라 초창기 서구선교사들이 ‘대구제일필라델피아교회’이라든지 가령 반계리에 교회를 세우고는 ‘반계오클라호마교회’라는 식으로 이름 짓지 않았습니다. 그저 순수하게 주님의 영광을 위해 교회를 세우고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선교입니까?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절대적이고 극단적 칭찬과 경배를 우상숭배로 보았습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절대적 칭찬과 칭송을 우상숭배로 여겨 자신을 높이는 사람들을 만류하고 준엄히 꾸짖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바울은 자기를 높여주는 분위기에 도취되려는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여러분, 비난만 소화시켜야 될 문제가 아니라 칭찬도 소화시켜야할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이것을 잘 모릅니다. 칭찬이 따를 때, 영광의 면류관을 씌워줄 때 마음에 파고드는 은밀한 유혹을 이기십시오. 요한계시록에 보좌 앞에서 면류관을 벗어 어린양을 향해 던졌던 이십 사 장로와 같이 면류관을 벗어서 주님의 발 앞에 던지십시오.

 

 

무리들에 의해 돌에 맞다

 

 마귀의 두 번째 공격은 무시무시한 것이었습니다. 앉은뱅이를 고친 일로 바울과 복음전하는 일이 한껏 상승기류를 타고 있을 때 비시디아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반대하던 유대인들이 이곳까지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이 무리들을 선동합니다. 그러자 무리들은 바울에게 사정없이 돌을 던졌고 바울은 그 자리에 쓰러졌습니다. 얼마나 만신창이가 되었던지 무리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시외로 끌고 가서 버렸습니다. 19절 봅시다.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19)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금방까지 바울과 바나바를 신이라 떠받들던 사람들이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선동한다고 이번에는 돌로 친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말이 됩니다. 이게 군중(群衆)입니다. 개인 개인은 똑똑할지 몰라도 군중이 되면 쉽게 어리석은 무리가 됩니다. 어제까지 떡 받아 먹고 물고기 받아먹고 병고침 받고 떠받들다가도 돈 몇 푼 쥐어주면 ‘바라바를 살리고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아라!’ 하면서 매몰차게 예수를 버리는 자들이 군중입니다. 금방 앉은뱅이 고쳐서 좋다고 칭송하다가도 일면식도 없는 자들의 선동에 휘둘려 죽일 놈이라 욕하며 말을 바꾸고 돌을 집어 던지는 자들이 군중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사람들이 하는 말이나 행동에 너무 골몰하지 마십시오. 사람들이 모여서 나에 대해 뭐라고 하는가를 애써 알려고 들지 마십시오. 어떤 지혜자에게 제자들이 물었습니다. “스승님, 모든 사람이 스승님을 칭찬하면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나쁜 것이다.” “스승님, 모든 사람이 스승님을 비난하면 좋은 것입니까 나쁜 것입니까?” “나쁜 것이다.”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선한 사람이 나를 칭찬하는 것이야 괜찮지만, 악한 사람까지 나를 칭찬하는 것을 어찌 좋다하겠느냐? 또 악한 사람이 나를 비난하는 것이야 괜찮지만, 선한 사람이 나를 비난하는 것이야 어찌 좋다하겠느냐?” 했다고 합니다. 군중의 말이란 이런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흔들린단 말입니까?

 사람들이 무리지어 비난할 때 저 사람들이 내게 어찌 그럴 수 있는가? 너무 억울해 하지도 마십시오. 바울이 사람들이 자기를 돌로 칠 때 ‘너희들이 방금 나를 신으로 떠받들더니 지금 내게 이럴 수 있느냐?’ 억울해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주동하여 돌에 맞아죽은 스데반 생각을 했을 것 같습니다. ‘아하, 복음을 위해 사니까 나도 스데반처럼 돌을 맞는구나! 그때는 내가 때리는 자였는데, 이제는 내가 맞는 자가 되었구나!’ 오히려 진리를 인해 비난받고 매 맞는 자 된 것을 감사하면서 맞았을 것 같습니다.

 

 

생명의 위협을 이겨내다

 

바울은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버릴 정도로 돌에 맞았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20, 21절을 봅시다.

 

제자들이 돌러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그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20,21)

 

 거짓말 같은 기록입니다. 그토록 얻어 맞아 죽은 것처럼 되었던 사람이 이렇게 일어나서 28km(70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서 가고 또 거기서 또다시 복음을 전해서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을 수가 있습니까? 20절에 ‘바울이 일어나’라고 했는데, 거기서 ‘일어나다’는 말은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할 때 살아나셨다고 한 바로 그 단어입니다. 부활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포기할 수 없는 바울의 불굴의 의지와 그리스도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성령의 능력이 합쳐져서 일어난 기적 같은 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은 죽은 자를 살리신 능력의 성령입니다. 그분이 이미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분이 능력의 성령이심을 알 수 있는 길은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를 가질 때에라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뜻을 올곧은데 두고 거기에 어떤 고난에도 포기할 수 없다는 불굴이 의지를 가지십시오. 우리 속에 죽은 자를 살리신 능력의 그 분이 계십니다. 결코 쓰러질 수 없습니다. 어떤 문제, 어떤 고난, 어떤 아픔일지라도, 오랫동안 견뎌왔어도 전혀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문제일지라도, 우리를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 다시 일어서고 또 일어서는 불사조, 영화에 나오는 터미네이터, 영적인 터미네이터들입니다.

 이런 고난을 겪은 바울이 안디옥교로 돌아가면서 자기가 전도하며 거쳐 왔던 지역을 다시 방문합니다. 거기서 자기가 전도한 사람들을 격려하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22)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 이것이 바울이 1차 선교사역을 통해 얻은 최종적 결론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고난 없이 들어가는 나라가 아닙니다. 고난 없는 면류관도 없고 고난 없이 가는 천국도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관광버스가 아닙니다. 그 안에서 먹고 마시고 일어서서 춤추고 하다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하는 관광버스 같은 것이 절대 아닙니다. 교회도 신앙생활이 마냥 행복한 것인냥 성도들에게 마취제를 투약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배척하는 타락한 세상에서 참된 신앙생활을 하려면 고난과 어려움은 피할 수 없는 필수과목입니다. 하물며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치러야할 희생, 겪어야할 고난은 쓰더라도 열매가 따릅니다.

 

 

고난의 열매가 주어진다

 

 이렇게 피를 흘리는 고난을 겪은 루스드라에 바울은 2차 선교 때 다시 찾아갑니다. 죽을 뻔한 쓰라린 기억이 있는 곳에 다시 가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다시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평생의 동지를 한 사람 얻게 되는데, 바울 자신이 믿음으로 낳은 아들이라 불렀던 디모데입니다. 디모데는 에베소교회의 목회자로 사역하면서 바울의 사역에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힘이 되었던 인물로서. 복음을 위해 희생하고 고난을 겪은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고난의 열매입니다. 꼭 치러야할 고난을 치룬 사람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반드시 고난의 열매를 주십니다. 부산의 모(某)교회는 제가 사역을 중단하게 되었던 쓰라린 기억이 있는 교회입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라 그 교회 사무간사로 섬겼던 한 자매의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당시 그 교회의 사무간사로 일하는 자매는 교통비정도의 사례를 받으면서 교회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 담임목사님의 목회비전이 너무 좋아서 목사님 사역을 전적으로 섬기기 위해 자신이 다니던 금융계의 좋은 직장을 버리고 온 자매입니다. 참으로 신실한 믿음을 가진 귀한 자매였습니다. 그런데 인격적 결함이 많았던 목사님은 그 자매에게 날마다 눈물을 흘리게 하였고, 많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제가 그 자매를 변호하다가 불똥이 저에게 튀어서 제가 사역을 그만 두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자매는 울면서 교회의 사무간사 사역을 그만두고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저도 정신없이 지내다보니 그 자매가 어떻게 지내는지 찾아볼 겨를이 없다가 제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난 뒤 그 자매 생각이 났습니다. 걱정이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그것도 목사에게 상처받았는데 신앙생활을 접지는 않았을까? 좋은 직장 들어가기에는 나이가 지났을 것인데, 경제적으로 흠들게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소문 끝에 연락이 닿았습니다. 부산에서 한 번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들어보니 괜한 걱정이었습니다. 비온 뒤 땅이 굳는다고 신실했던 그 신앙이 성숙함까지 겸해서 너무나 안정된 모습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는 더 놀라웠습니다. 많이 배운 것도 아니고, 이미 나이가 좋은 회사에 들어갈 시기도 놓친 나이였는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금융계통에서 고소득자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수시로 외국을 다니면서 선교사님들을 찾아 격려하면서 자신이 예전에 가졌던 평신도사역자로서의 삶을 마음껏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너무 잘 되어 있으니 걱정이 은근히 시샘으로 바뀔 정도였습니다. 그 자매가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희생을 치루며, 또 거기서 못난 사람 만나서 고생하고 고난을 감당했던 것을 보시고 그 열매를 다른 곳에서 얻게 하셨다고 생각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겪어야할 고난, 반드시 치러야할 희생을 감당하면 하나님께서 그에 맞는 고난의 열매, 희생의 열매를 어떤 모양으로든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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