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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행전강해14 구브로 선교 
본문 사도행전 13:4~12 (신약 208) 
날짜 2017-10-08 
설교자 전용표 목사 

 

  막내처제네 집에 갔다가 저녁에 두 집 식구들이 우산을 쓰고 산책을 했습니다. 대단위단지 아파트인데, 단지 중간중간에 공원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공원들 중 한 공원의 이름이 ‘고양이 공원’이었습니다. 물론 처제네가 붙여놓은 이름입니다. 사연인즉 아파트의 한 아주머니가 길고양이들을 불쌍히 생각해서 고양이 밥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고양이들이 그 공원에 항상 나타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같이 어울리는 것입니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도심 한 가운데, 그것도 성냥갑 같은 아파트 단지 한 가운데 피어난 훈훈한 인정(人情)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마음에 품은 긍휼한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이 행동이 되고 실천이 되었을 때 세상이 따뜻하게 변화되는 실제가 되었습니다. 우리 반계교회 성도들도 삭막한 세상을 녹이는 모닥불 같은 존재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총 3차에 걸친 선교여행과 마지막으로는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어 가서 가택연금 상태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1차 선교여행은 13장과 14장에 기록되어 있는데, 시리아 안디옥에서 배를 타고 지금의 터키 남쪽에 있는 구브로 섬을 거쳐 육지에 상륙하여 비시디아 안디옥을 거쳐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갔던 길로 시리아 안디옥교회로 되돌아오는 선교여정입니다.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길리기아북부지역을 아우르는 지역입니다. 1차 선교여행으로 여러 교회가 세워지는데, 그 중에서 많이 알려진 교회가 갈라디아교회입니다. 오늘은 이 중에서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 섬에서 전도한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바나바의 고향 구브로로 가다

 

 지난주에 우리는 시리아 안디옥교회가 후발주자였지만 성령의 지시에 순종하여 교회의 기둥 같은 두 지도자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한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교회의 파송을 받은 두 사람은 배를 타고 뱃길로 해서 구브로라는 섬으로 들어갑니다. 4절을 읽읍시다.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4)

 

 구브로의 원래 발음은 키프로스(Cyprus)인데 현재도 키프로스로 부르고 있으며 하나의 독립국가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이곳은 바나바의 고향입니다. 집안사람 고향사람 전도하기가 가장 어려운 법인데, 바나바는 고향으로 먼저 갔던 것입니다. 길을 일부로 이렇게 잡은 것은 평소 바나바가 고향을 향한 마음의 부담을 항상 지고 있었기 때문이라 사려 됩니다. 그럼 ‘사울은 왜 고향으로 가지 않았습니까?’ 물으실 분이 계실 것 같은데, 사울도 고향으로 먼저 갔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을 보면 사울은 다메섹에서 변화 받고 난 후 일정 기간 훈련 기간을 거친 다음 한 보름정도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고향 길리기아다소로 갔습니다. 거기서 꽤 머물렀습니다. 아마 가장 먼저 고향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여러분들도 고향사람이나 집안사람들 위하여 마음에 품고 기도에 항상 힘쓰시길 바랍니다. 내가 직접 전도하지 못하여도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복음을 듣게 하시고 어떤 계기를 마련해 주십니다.

 

 

 마술사를 가까이 하는 총독을 만나다

 

6절을 봅니다.

 

온 섬 가운데로 자나서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 하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니(6)

 

 바나바와 사울은 구브로 섬 동쪽항구인 살라미에서 출발하여 복음을 전하면서 섬을 가로질러 가서 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항구도시 바보(Paphos)에 이르렀습니다. 180km 정도 되는 먼 거리입니다. 바보에는 구브로 총독 서기오 바울의 관저가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그곳에 당도하여 먼저 만난 사람은 유대인 마술사 엘루마였습니다. 이 사람은 별점도 치고 제법 술법(術法)을 부릴 줄도 아는 뛰어난 무당이었습니다. 총독이 곁에 둔 것을 보면 아마 그 지역에서 제일 능력 있는 무당이었겠지요? 아무리 능력 있으면 뭐합니까? 성경은 이 자를 가리켜 ‘거짓 선지자’라고 단정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총독은 구브로에서 최고위층이고 가장 많이 배운 사람 중 하나이겠지만 무당을 곁에 두고 있었습니다. 정치인이나 기업인, 엘리트집단이 무당 가까이 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닙니다. 미국의 레이건대통령도 중대한 일을 결정할 때마다 점괘를 받았다는 것과 삼성의 이건희씨가 사람 뽑을 때는 항상 관상쟁이를 대동했다는 것은 널려 알려진 사실입니다. 오늘날 시대는 첨단을 달리지만 점집은 더 많아졌고, 무속인(巫俗人)이 인기 있는 직종에 꼽히고 있습니다. 점을 보는 젊은이들 숫자가 사상 최고치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까? 내면(內面)이 허약해서 그렇습니다. 영혼이 공허해서 그렇습니다. 물질적으로는 풍족해졌지만 관리하지 않은 내면은 모래알처럼 약합니다. 그러다보니 너무 의존적입니다. 점을 의존하든지 물질을 의존하든지 합니다. 진정한 자기(自己)가 없고, 자기 판단을 할 줄 모르고, 심지(心地)가 견고하지 못합니다. 영혼은 날마다 시간에 쫓기고 일에 쫓겨서 허우적거리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오늘의 운세가 인기 있고, 주술이 젊은이들에게도 각광받는 직업이 되고 있으며, 유혹 앞에도 속절없이 쓰러지는 것입니다. 젊은 세대들은 책을 들어야 합니다. 나라의 젊은 세대들이 1년에 책 한 권을 보지 않는 나라는 희망없는 나라입니다. 폰에 열중할 시간이면 1년에 여러 권의 책으로 내면을 살찌우고도 남습니다. 스마트폰은 절대로 우리 내면을 살찌우지도 강하게도 못합니다. 책을 봐야 합니다. 생각의 폭을 넓히고 내면의 힘을 길러야 합니다. 무엇보다 말씀을 읽고 묵상해야 합니다. 말씀이 사라진 기독교는 필연적으로 ‘무당적기독교(巫堂的基督敎)’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금서(禁書)로 지정한 중세기독교는 말이 기독교이지 온갖 부적과 미신이 난무하는 이교집단이었습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만큼 내면을 강하게 만드는 길이 없고 신앙의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 없습니다. 제가 청년 때 623m 되는 해운대 장산(萇山)을 매일 뛰어서 올라갔다 내려왔습니다. 그때 누구와 체력을 다투어도 이길 자신은 충천해도 지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매일 성경을 읽는 사람은 그 내면이 마치 이와 같아 집니다. 내면이 약한 사람이 이리저리 헛되고 허황되고 거짓된 것에 기웃거리며 쉽게 넘어가기도 합니다. 말씀을 깊이 보십시오.

 

 

 총독이 깊은 관심을 보이나 방해가 일어나다

 

총독 서기오 바울이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습니다. 7절을 봅니다.

 

그가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으니 서기오 바울은 지혜 있는 사람이라

바나바와 사울을 불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더라(7)

 

 서기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관심을 보인 것은 아마 바나바와 사울이 전하는 복음을 이미 들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들어보니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한 말입니다. 마술사의 말과는 전혀 다른 뭔가 오묘하면서도 기풍(氣風)이 있고, 그러면서도 영혼을 움직이는 뭔가가 있는 것입니다. 서기오 바울은 평생을 권모술수가 판치는 정치판에서 높은 자리까지 오른 사람입니다. 뼛속까지 정치인입니다.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무당의 점괘를 구하며 살아온 사람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이 돈과 성공이 아닌 회개와 의와 진리를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 끌린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고 은혜입니다. 여러분, 은혜가 달리 은혜가 아닙니다. 진리의 말씀에 마음이 끌리는 것 자체가 은혜입니다. 말씀이 귀에 들어오고 그 말씀이 마음에 위로가 되며, 거기서 힘을 얻고, 거기서 길을 발견하게 된다면, 굉장한 은혜가 나를 감싸고 있다는 증거요 놀라운 사랑이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면에서 서기오 바울은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방해가 일어납니다. 마술사 엘루마의 방해입니다. 8절을 봅시다.

 

이 박수 엘루마는(이 이름을 번역하면 박수라) 저희를 대적하여 총독으로 믿지 못하게 힘쓰니(8)

 

여기에서 '믿지 못하도록 하였다'는 원문의 본뜻은 '왜곡시킨다' 혹은 '비틀어버린다'는 의미입니다. 박수 엘루마는 바울이 전하는 말마다 그 뜻을 왜곡시키고 반박하면서 총독이 믿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신앙을 생활을 제대로 해야겠다는 결심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럴 때 방해가 따릅니다. 진리를 따르는 길에는 언제나 방해가 일어납니다. 첫째는 마음의 방해가 있습니다. 강론을 들을 때 ‘저건 사람을 세뇌시키는 것이야’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꼭 저렇게 해석해야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나와는 상관없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뭔가 좀 더 실제적이고 실용적인 강론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둘째는 관계의 방해가 있습니다. 성도들과의 관계가 틀어져 신앙에서 멀어지게 되는 경우입니다. 셋째는 일의 방해입니다. 갑작스럽게 어려운 일이 닥쳐서 신앙의 삶에 맛을 이어가지 못하고 돌아서게 만드는 진리의 삶에서 멀어지게 되는 경우입니다. 신앙의 깊은 맛을 보고, 진리를 따르는 삶이 주는 기쁨을 맛보려면 이런 방해들을 잘 이겨내야 합니다.

 

 

바울이 박수 엘루마의 방해를 잠재우자 총독이 믿다

 

 총독이 하나님의 말씀에 깊은 관심을 보이다가도 또 머뭇거리자 거기에 방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바울이 나섭니다. 9~10절을 봅시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 성령이 충만하여 그를 주목하고 이르되 모든 거짓과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9,10)

 

 여기서부터 사울의 이름이 바울로 바뀌어서 나오기 시작합니다. 사울은 유대식 이름이고, 바울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헬라문화를 따르는 지역에 선교를 하다 보니 유대식 이름보다는 헬라식 이름을 쓰는 것이 여러모로 편했던 것입니다. 이름이 바뀐 것보다는 지금부터는 바나바보다 바울이 더 주도적(主導的)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보았듯이 안디옥교회의 담임목사가 바나바였고, 바나바가 데려온 부목사가 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 선교지에 와서는 바울이 점점 주도적인 역할을 감당합니다. 세워진 교회를 목양하는 사역에서는 바나바가 은사가 있었지만 불모지에 개척을 하는 일에는 바울이 더 은사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각자 은사와 역할이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점은 주도권교체가 상당히 자연스럽다는 점입니다. 바나바와 바울 사이에는 누가 더 주도적이냐 이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사회나 교회나 공동체를 갈등과 혼란에 빠뜨리는 문제가 주도권다툼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부목사님 잘 하는 것 못 봅니다. 좀 잘 하면 내 보냅니다. 어리석은 것이지요. 부목사님이 잘해야 본인 목회가 잘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도권다툼은 기질의 차이가 있고 명분이 있기는 하겠지만 더 본질적으로는 사람의 그릇이 작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릇이 큰 사람은 저 사람이 나서서 일을 주도적으로 하더라도 ‘우리가 잘 되는 일’로 여깁니다. 그런 면에서 바나바와 바울은 그릇이 컸습니다. 둘 중에 아무래도 주도권을 내어주는 입장인 바나바가 그릇이 더 컸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여러분, 소모적인 주도권다툼에 빠져들지 마시고 다 같이 잘 되는 상생(相生)을 꿈꾸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바울은 박수 엘루마의 속을 정확히 꿰뚫어보기까지 합니다. 그 속에 거짓과 악행이 가득하고, 더 나아가서 그의 모든 행동은 지극히 마귀적인 것으로서 마귀의 자식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간파합니다. 말씀과 성령이 충만하면 사람들의 의중이 간파됩니다. 저 사람이 저렇게 하는 숨은 동기가 무엇인가, 겉으로는 저렇게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바라고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가 이런 것이 들어옵니다. 무슨 신통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는 인간의 적나라한 모습이 다 들어있기 때문이고, 성령은 사람의 깊은 것도 통달하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이야말로 인간학이 보고(寶庫)입니다.

 박수 엘루마의 간악함을 간파한 바울이 성령의 능력이 충만한 가운데 명하자 엘루마는 안개와 어둠이 덮어 앞을 보지 못하고 인도할 사람을 찾게 됩니다. 소경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이 보지 못하는 소경임을 인정하는 자는 보게 되지만, 스스로 본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그 우매함에 머물게 하시는 것이 주님의 섭리입니다. 내가 보지 못하는 자요 마땅히 알 바를 알지 못하는 자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자에게 주님은 그 영안을 더욱 열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목격한 총독이 진심으로 믿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 실제적 능력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고는 놀랍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이 공허한 말뿐인 것 같지만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그에 따라 살아가면, 말씀이 내 인격을 변화시켜서 품격있는 인격으로 만들어줍니다. 허상이 아니라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좇아 살면 내 인생을 좌충우돌하던 것이 사라지고 안정적이고 순탄하게 흘러가게 됩니다. 말씀이 허상이 아니라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법도로 나라를 다스리면 그 나라가 바르고 강성한 나라가 되고야 맙니다. 실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손에 잡히는 실제적인 것이 없어 보이는 말씀이 실은 무엇보다도 분명한 실제인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인해 하늘에 속한 신령한 것들이 여러분 삶에 실제가 되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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