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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행전강해13 위대한 후발주자 안디옥 교회 
본문 사도행전 13:1~3 (신약 204) 
날짜 2017-10-01 
설교자 전용표 목사 

 

 

  지난 두 주간 총회 참석과 캄보디아 답사로 출타를 하였습니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말이 실감이 나는 두 주간이었습니다. 몸이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소중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먼저 총회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이번에 새로 된 총회장은 어부지리로 총회장이 된 분입니다. 부총회장을 한 사람 뽑고 그 사람이 부총회장으로 1년 있다가 자동 총회장이 되는 방식입니다. 이번 총회장이 부총회장으로 선출될 때 원래 후보가 아니었습니다. 두 명의 후보가 치열한 선거전을 치르고 올라왔는데, 현장에서 법적인 결격사유가 생기는 바람에 둘 다 후보 자격 박탈이 되었습니다. 부총회장을 공석으로 남겨둘 수 없어서 현장에서 공천 받아 뽑는데, 지금의 총회장이 뽑힌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분은 선거운동 하나 없이 부총회장이 되고 총회장이 된 역사상 유일한 총회장입니다. 사람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저 사람이 교회도 크지 않은데, 총회장 역할을 과연 해 낼 수 있을까?’ 완전한 기우(杞憂)였습니다. 역대 총회장 중 회의진행을 가장 뛰어나게 했다는 평가가 쏟아졌습니다. 공평하고 공정하고, 또 정확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유머와 위트를 발휘해가면서 감정들이 사나워지지 않게 조절해면서 과열되는 분위기를 냉각시키면서 진행을 해 나가는 솜씨가 입신(入信)의 경지였습니다. 진행만 잘 한 것이 아니라 수년 동안 총회의 실권을 장악해서 이권을 챙기고 해결사 노릇을 하는 등 총회를 어지럽히던 실세무리를 단칼에 제거하는 개혁을 이루어내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갈등 빚던 사람들은 화해와 협력으로 이끄는 결과를 이루어내기도 하였고요.

이번 총회를 보면서 깨달은 것이 이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사람을 사용하시어 불가능할 것 같았던 일을 이루기도 하십니다. 북이스라엘의 개혁을 이끌었던 예후도 그런 경우이고, 세계선교의 기초를 닦은 핍박자 바울도 그런 경우입니다. 개인만 아니라 교회도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리아 안디옥교회의 경우입니다. 세계선교의 전초기지로 쓰임 받은 교회가 바로 시리아 안디옥교회입니다. 안타깝게도 모체(母體)교회인 예루살렘교회는 세계선교의 전초기지역할은 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1. 모든 것을 품는 교회였습니다.

 

 이유가 몇 있습니다. 시리아 안디옥교회가 세워진 이야기가 11장 19절부터 30절에 나옵니다. 안디옥교회는 스데반의 순교 이후 일어난 핍박을 피해 흩어진 성도들 중 일부가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시리아 안디옥에 가서 전도하여 세운 교회입니다. 흩어진 성도들 중 정통 유대인들, 즉 히브리파 유대인들은 흩어진 곳에서 전도를 해도 유대인들에게만 전도하였습니다만, 시리아지역에 피신 온 성도들은 헬라파 유대인들 즉 디아스포라의 후손들로서 유대인 이방인 가리지 않고 모두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설립부터가 유대인 이방인 차별이 없이 세워진 교회입니다. 이들은 베드로처럼 환상 같은 것 보여주지 않아도 이미 이방인의 벽을 넘어선 자들입니다.

 교회가 세워지자 예루살렘교회에서 사역자를 파송하였는데, 그가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성품이 좋고 무리(無理)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가 사역을 잘 하여서 교회가 빠른 속도로 자라나자 혼자서는 감당키 어려워 바울을 동역자로 불러왔습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변화를 받았지만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이 적극적으로 받아주지 않아서 고향 다소에 내려가 거기서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주변에 전도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핍박자라는 꼬리표가 달린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안디옥교회는 바울을 자기들의 영적지도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안디옥교회는 포용력이 대단한 교회였습니다. 여러분, 믿는 사람이 진리 문제에 있어서는 분명해야지만 그렇다고 포용력(包容力)이 좁은 옹졸한 사람이어서는 매우 곤란합니다. 어디서든지 가장 원만하고 가장 포용력 있는 사람이 되도록 애를 써야 합니다.

 안디옥교회의 차별 없이 포용하는 모습은 오늘 1절 말씀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안디옥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으니 곧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및 사울이라 (1절)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으로 섬사람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섬사람 육지사람 얼마나 차별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안디옥교회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니게르라는 말에서 ‘흑인’이라는 영어단어 니그로(Negro)가 나왔습니다. 니게르는 아프리카 흑인이었습니다. 이것도 안디옥교회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나엔은 헤롯의 젖동생이었습니다.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알지 못하지만 대체적으로 ‘신분이 높은 사람’으로 봅니다. 신분이 높은 자나 낮은 자나,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피부색이 하얀 자나 검은 자나 예수 안에서 차별 없이, 부담 없이 어울릴 수 있었던 교회가 안디옥교회였습니다. 이것이 실력(實力)입니다. 조금 다르면 차별하고 하는 교회는 실력이 없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매우 힘든 교회입니다. 우리교회가 포용력이 있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인 여러분도 어디 가서 전라도니 경상도니 차별하는 분위기에 동승하지 마시고, 그런 차별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말하면서 인간이 만들어놓은 차별을 없애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처음부터 섬기는 교회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안디옥교회는 처음부터 주는 교회였습니다. 11장 27~30절을 보면 예루살렘에 흉년이 들어 예루살렘교회가 어려움에 처했다는 소식을 접한 안디옥교회가 힘을 다하여 돕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장 29~30절을 봅시다.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29,30)

 

 안디옥교회는 이제 개척된 교회였습니다. 도움을 받아야할 교회인데, 개척초기부터 남을 돕는 일을 하였습니다. 각각 그 힘대로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였다고 합니다. ‘부조’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디아코니아’인데, ‘봉사’라는 뜻입니다. 이 의미가 무엇인가하면 안디옥교회는 돈을 봉사의 도구로 여겼다는 뜻입니다. 돈이 부의 척도나 축적(蓄積)의 도구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일, 봉사하는 일을 위한 도구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청지기(steward)입니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우리에게 보자고 하시는 것은 ‘재산명세서’가 아닌 ‘사용명세서’입니다. 재산명세서는 죽어서 가져갈 수 없지만 사용명세서는 죽어서 가져갈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돈과 봉사를 구별치 않고 돈을 봉사로 여겨 예루살렘에 보냈던 안디옥의 성도들은 고귀한 재산가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캄보디아 현지인 교회에 예배당을 지어주려 하고 있습니다. 담임목사인 제가 하자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장로님들과 성도들이 먼저 하자해서 하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교회도 빚이 조금 있습니다. 현지 예배당 지어줄 돈이면 우리교회 빚 다 갚을 수 있는데, 그런 것 따지지 않고 그저 순수한 사랑의 마음으로 하려하고 있습니다. 매년 우리교회가 선교로, 구제로 쓰는 재정이 전체 재정 대비로 볼 때 결코 적지 않습니다. 우리노회에서 조사한 것을 보니 우리교회가 예산 대비로 80개 가까운 교회 중 탑 3 안에 들어갑니다. 밖으로 나가는 돈 아껴서 우리 것 먼저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우리교회는 남 먼저 돕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는 하나님께서도 이런 모습을 좋아하신다고 봅니다. 수익성 사업을 잘해서 부자가 되는 교회가 잘되는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있는 곳에, 드려진 물질을 잘 흘려보내는 교회가 잘하는 교회이고 잘되는 교회입니다.

 

 

 

3. 주님 뜻에 순종하는 교회였습니다.

 

 시리아 안디옥 교회가 후발주자이나 세계선교에 크게 쓰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주님 뜻에 순종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3절을 보십시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2~3절)

 

 안디옥 교회는 금식을 하면서 주님을 섬기는 뜨겁고 열정적인 교회였는데, 어느 날 성령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나중에 보면 바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송(派送)하라는 말씀입니다. 시리아 안디옥 교회의 상황을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건 이해하기도 힘들고 순종하기는 더더욱 힘든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전에 살펴보았듯이 시리아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가 담임목사이고, 사울이 부목사인 교회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차포(車包)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성령께서 담임목사인 바나바와 부목사인 사울을 선교사로 보내라는 것입니다. “뭔가 잘못 들은 것이겠지! 하나님께서 이렇게 불합리한 말씀을 하셨겠어?” 아마 많은 혼란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직까진 시기상조야! 우리가 개척교회 신세를 면한 지 얼마 됐다고?” 갈등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어떻게 합니까? 순종해 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는 성령의 음성을 들어내는 교회가 되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순종해 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곳에는 반드시 갈등도 생깁니다. 때로 하나님의 말씀은 내 생각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은 반드시 우리의 이기심과 악한 본성을 거스르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에 반드시 갈등이 일어납니다. 말씀이 있는 곳에는 갈등이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1년을 말씀을 들어도 갈등을 겪은 적이 없다? 그러면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았거나 잘못 들은 것입니다. 세상을 끊는 결단을 요구하실 때, 더 깊은 헌신과 신앙의 도약을 요구하실 때 갈등을 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갈등을 겪게 만드시는 말씀, 뭔가 이해하기가 힘든 비합리적으로 들리는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크고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번에 선교위원장 장로님과 재정부장 장로님과 함께 캄보디아 현지답사를 다녀왔습니다. 캄보디아에서 사역하시는 고루디아선교사님의 추천을 받아서 짓기로 결정했던 룹까이교회를 화요일에 방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열리지 않았습니다. 훌륭한 예배당은 아니나 이미 예배당이 있었고, 그들이 하고자 하는 사역이 필요한 것이기는 하나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벅찬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오전에 셋이서 모여서 고민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다가 작년 제가 방문했던 찌벗트마이(새생명)교회를 가보기로 하였습니다. 그곳을 가자면 5시간 갔다가 또 5시간 와야 하는 만만치 않은 길이었습니다. 원래는 1박 2일로 가야하는 코스입니다. 작년 제가 탐방을 하면서 가장 마음에 끌리는 교회가 있었지만, 건축 후 봉헌식 할 때 교우들이 모시고 그곳까지 갈 자신이 없어서 프놈펜에서 2~3시간 내에 있는 교회를 대상지로 잡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곳을 가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당일치기로 그 먼 길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갔더니만 우리 세 사람의 마음이 한 마음으로 열렸습니다. 그들이 눈물로 길게는 10년, 짧게는 지난 1년 간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곳 교회를 사역하는 ‘썸밧’이라는 여자목사님이 하루 전날 선교사님이 와서 십자가를 달아주는 꿈을 꾸었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좁은 방에서 100명 가까운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데, 예배당 지을 부지를 폭 10m, 길이 50m로 마련해두고 있었습니다. 예배당 지을 부지(敷地)로 가서 둥글게 손을 잡고 기도하는데 그들 눈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습니다. 우리들 마음도 뜨거운 무언가가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아하,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었구나!’ 우리는 그렇게 결론을 맺고 대상교회를 그곳으로 바꾸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 당회나 성도들에게 동의를 구하기로 하였습니다. 우리는 고려하지 않은 곳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물꼬를 틀어서 그곳으로 흘러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맺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해하기 힘든 말씀이 주어질 때, 뭔가 갈등할 수밖에 없는 말씀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만, 그때가 감사해야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뜻을 굴복시키시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리아 안디옥 교회는 이해하기 어려운 주님의 음성에 순종을 해냅니다. 그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순종이었습니다. 그 순종이 있었기에 시리아 안디옥 교회는 먼저 세워진 예루살렘 교회가 감당하지 못하였던 세계선교의 중심역할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가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반계교회에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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