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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행전강해12 말씀 중에 임하시는 성령 
본문 사도행전 10:23b~48 (신약 204) 
날짜 2017-09-24 
설교자 전용표 목사 

 

 한나라 유방을 도와 초나라를 무찌르고 중국천하를 통일한 한신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른 체구에 키가 멀대같은 사람이지만 지략을 겸비한 탁월한 장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초나라 항우의 부하로 있을 때는 전혀 능력을 떨치지 못하였습니다. 항우가 사람을 몰라보고 말단직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한신이 유방의 신하가 되었을 때에 능력을 떨칩니다. 유방이 소하라는 사람의 추천을 받아들여 한신에게 대장군이 자리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서로가 잘 만나야 합니다. 목사는 교회를 잘 만나고 교회도 목사를 잘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해날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는 부분입니다. 은혜로운 신앙생활을 해나가려면 뭐니뭐니해도 예배를 통해 은혜를 받아야 하고 말씀에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이것이 막히면 모든 것이 막히고 신앙생활이 곤욕스럽게 됩니다. 그런데 말씀이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을 필요로 합니다. 첫째는 듣는 자들의 가난함이고, 둘째는 올바른 메시지입니다.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여 말씀을 강론하는 중 마가다락방 때와 같이 성령이 듣는 모든 자에게 임하였습니다. 당시로서는 이방인에게 성령이 임하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45절을 보면 베드로와 함께 왔던 유대인들이 놀라는 장면이 나옵니다. 베드로가 무슨 특별한 집회를 한 것이 아니라 그저 말씀만 전하였을 뿐입니다. 말씀을 전하고 듣는 외에 한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습니다. 말씀만이었습니다. 말씀만으로도 성령의 충만한 역사는 얼마든지 임하십니다. 아니 원래 올바른 성령의 역사는 말씀과 함께 임하십니다.

 

 

 

1. 듣는 자의 가난함이 요구됩니다

 

 여기에는 듣는 자들의 가난함이 있었다는 것을 본문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미리 모여서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먼저 24절에 보면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허겁지겁하는 마음에 말씀이 깊이 들어갈 수 없지요. 미리 준비하여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이 로마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인들이 유대인의 강론을 듣기 위해 일찍부터 준비하여 기다렸다는 사실에서 그들 마음속의 사모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거기다가 25절을 보면 베드로가 집에 들어오자 고넬료가 베드로 발 앞에 엎드려서 절을 합니다. 황제나 아니면 신에게 예배드릴 때나 하는 최상의 존경의 인사입니다. 베드로는 사람에게는 걸맞지 않은 인사라고 거절을 합니다. 잘못된 것이긴 하나 로마군대의 장교가 정복지의 이름 없는 한 사람에게 이런 정도의 예를 표한다는 것은 그만큼 고넬료의 마음이 가난하고 겸손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는가?’ 묻자 고넬료는 자신이 기도 중에 천사의 지시를 받아 부르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면서 그 끄트머리 말이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33절을 다 함께 봅니다.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33)

 

 주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합니다. 지금 고넬료와 사람들 앞에 누가 있습니까? 인간 베드로가 있습니다. 베드로 앞에 그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말씀을 듣는 자가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가난함입니다. 마음의 가난함을 말하지만 사실 사람이 노력한다고 해서 마음이 가난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가난해질 때는 뭔가 일이 있어서 절박해질 때 가난해집니다. 아무 일 없는데 가난해지기는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생각을 깊이 하다보면 마음이 겸손해지고 가난해집니다. 바로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예배의 자리에 와서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는 생각을 깊이 가져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허겁지겁 와서는 안 됩니다. 잡생각을 떨치고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있다는 생각을 깊이 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마음의 가난함입니다. 데살로니가 2장 13절을 보면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바울이 말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었다고 나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있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만이 설교자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말씀을 통해 성령께서 내 심령을 뜨겁게 하시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모였다고 했습니다. 취사선택해서 듣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께서 명하신 것이면 그것이 재미있는 것이든 딱딱한 것이든, 그것이 격려가 되는 말씀이든 찔림이 되는 말씀이든 무엇이든지 듣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물질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물질의 복에 관한 말씀이 듣고 싶을 것이고, 건강이 필요한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치유의 말씀을 듣고 싶을 것이고, 마음 아픈 사람들은 위로의 말씀을 듣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들어서는 성숙한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얼마나 균형 잡히신 모습인지 모릅니다. 사랑과 정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습니다. 하나를 놓치지도 않습니다. 양쪽을 다 가지면서도 균형에서 흐트러짐이 없으십니다. 이것이 성숙입니다. 미성숙하면 생각이나 말이나 감정이나 행동, 모든 것이 치우치고 극단적으로 갑니다. 한국인의 머리카락을 세계적인 미국연구소에 보내서 성분 분석을 했습니다. 했더니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먹는 것이 무엇으로 나왔을까요? 옥수수입니다. 고기를 먹어도 옥수수가 들어간 사료 먹고 자란 것들이기에 옥수수가 많습니다. 떡복이 떡도 옥수수로 만들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먹는 것이 다양했습니다. 곡식종류만 해도 쌀, 보리, 조, 수수, 콩 종류만 해도 강낭콩, 양대, 팥, 노란콩, 검은콩. 지금은 고기, 밀가루(리), 상추, 배추, 깻잎, 쌀. 굉장히 단순해졌습니다. 이것이 몸의 균형을 깨뜨리는 원인이고 그로인해 다양한 병이 유발됩니다. 기록된 모든 성경이 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골고루 설교해야 하고 골고루 먹어야 합니다.

 때로 억지로 먹는 것과 쓰게 먹는 것이 살리는 약이 됩니다. 천하가 기근에 죽어나갈 때에 엘리야 선지자가 사르밧 과부에게 갔습니다. 사르밧 과부는 가루 조금과 기름 조금밖에 없고 그것으로 떡을 해먹고 자식과 함께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전혀 뜻밖의 말을 합니다. ‘그것으로 작은 떡 하나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라 그런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어라’는 것이었습니다. 전혀 위로가 되지 않는 파렴치한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대로 했더니만 통에 가루가 다함이 없고 병에 기름이 다함이 없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몰인정하고 파렴치한 말로 보였던 그 말이 실은 살리는 생명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보다 더 정확하십니다.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말씀, 정말 살리는 말씀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결정하십니다. 저는 주일낮 오후 수요일 모두 본문강해를 합니다. 설교본문을 임의로 정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때는 세 군데 말씀이 같은 주제를 담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말해야 합니다. 때로는 부담스럽습니다. 스스로도 무슨 의도를 가지고 말하는 것같이 느껴집니다. 본문이 그래서 그렇게 설교할 뿐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지나고 나면 거기에는 어김없이 어떤 하나님의 특별하신 목적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서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마리아가 가졌던 이런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종이 듣겠나이다!”

 

 

 

2. 올바른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고넬료 집에 모였던 사람들이 말씀을 들을 때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말씀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령께서 그들을 휘잡으셨습니다. 방언이 터지고 하나님을 높이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에는 그들 마음의 가난함과 아울러 베드로가 전한 올바른 메시지가 필수요소였음은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강론을 시작합니다. 3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38)

 

 나사렛 예수께 하나님은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다. 그래서 그가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다.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 분이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였고 어떤 사역을 하셨는가, 예수를 말합니다. 그런 다음 십자가를 말합니다. 39하반절에서 40절입니다.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39b,40)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것을 전하였습니다. 다음으로 구원얻는 길을 전합니다. 42,43절입니다.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ㅇ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42,43)

 

 여기에 고넬료의 행위를 칭찬하는 말이 없습니다. 인간을 높이는 말이 없습니다. 복 받고 성공하는 비결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말씀을 들을 때에 고넬료와 사람들은 한없는 감동과 은혜를 받았습니다. 성령이 충만히 임하였습니다. 베드로의 강론은 인간적인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정말 복음적인 결정판 메시지였습니다. 성경적 용어는 많이 쓰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인간적인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놓고 순종하라, 믿으라 합니다. 순종할 필요 없습니다. 믿을 필요 없습니다. 인간적인 메시지를 믿고 순종함으로써 개인의 신앙이 병들고 한국교회 전체가 병드는 것입니다. 가려서 순종하고 가려서 믿어야 합니다. 이런 것은 인간적인 메시지일 가능성이 큽니다. 하고 싶은 말을 미리 생각해 놓고 거기에 맞는 성경본문을 찾아서 설교하는 것입니다. 건축할 때는 건축에 관한 것만 설교, 꾸중하고 길들이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런 본문 선택해서 설교합니다. 물론 개업예배나 이사예배 같이 상황이 딱 정해져 있기 때문에 그에 맞는 본문을 찾아서 설교해야 하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 말고는 설교를 그런 식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우선입니다. 성경본문이 말씀하는 바를 풀어서 전달하는 식으로 설교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인간의 메시지로 빠지는 위험성을 최소화시킬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청중에 영합하는 설교입니다.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바를 간파해서 그에 맞는 맞춤형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청중이 복 받는 비결을 듣고 싶어 하면 복 설교만 줄곧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시드기야 같은 거짓선지자들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영혼이 죽습니다. 성공학 강의나 처세술 같은 것을 전하는 설교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설교가 아니라 강연 같은 것입니다. 교회가 교회 아니게 됩니다. 성경본문이 말씀하는 바를 강론해야 합니다. 때로 어렵고 따분해도 그렇게 해야 영혼이 살고 교회가 튼튼해집니다.

 이 둘이 만날 때 성령의 새롭게 하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맺는 말

 

 1920년 발간된 동아일보에 김익두 목사님에 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황해도 신천군 읍내 교회목사 김익두씨는 지난 5월 17일에 부산진교회에서 안수 기도로써 앉은뱅이를 걷게 했는데, 그 병고침을 받은 자는 부산진 좌천동 446번지 김낙언의 아들 두수(斗秀, 8세)로서, 나은지 8개월 만에 앉은뱅이가 되어 8년간 걷지 못하다가, 안수기도 즉시 일어나서 걷게 되었으므로 칭송이 자자하다. 이번 남방집회에서 밀양군 교회에서는 18세 여자 벙어리를 고쳤다. 이번 각 지방에서 병 고친 수효가 22명이요, 반이나 낫게 된 수는 18명이라 한다.” 동아일보 뿐 아니라 매일신보 등에도 김익두 목사님에 관한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한국교회 초창기 때 전국을 돌며 능력을 행하며 복음을 전했던 목사님입니다. 목사님은 황해도 안악군에서 태어나 16세 때 과거시험을 보지만 당시 타락한 조정의 매관매직 풍조로 낙방하고 맙니다. 과거시험을 통한 출세의 뜻을 접고 장사를 시작합니다만 실패하게 됩니다. 깊이 실의(失意)에 빠진 김익두 목사님은 술에 찌들어 살면서 깡패가 되었습니다. 타고난 장골이라 내놓으라 하는 건달도 한 방에 때려눕혔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무서워하면 할수록 외로움과 괴로움은 커져만 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의 강권적인 권유로 소안련(W. L. Swallen)선교사님 전도 집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사람은 죄 지은 대로 보응을 받습니다. 그래서 죄인은 지옥으로, 의인은 천국으로 가게 됩니다.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시오!” 서툰 선교사의 설교가 가슴을 찌르며 파고듭니다. 죄라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많이 지은 자신입니다. 집으로 돌아와서도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는 선교사의 말이 가슴을 울립니다. 소안론 선교사를 찾아가 울면서 울면서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게 됩니다. 참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능숙한 한국말도 아닌 서툰 한국말로 전하는 설교를 듣고 그토록 마음의 찔림을 얻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을까 싶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함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으로 하여금 이성을 뛰어넘는 하나님 지식을 갖게 하며, 사람을 변화시켜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올바른 말씀과 가난한 심령의 만남은 반드시 성령의 역사를 불러일으킵니다. 이 은혜를 경험하시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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