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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행전강해11 편견을 허무는 복음 
본문 사도행전 10:1~23a (신약 201) 
날짜 2017-09-17 
설교자 전용표 목사 

 

  어떤 가게 사장님이 사람을 채용하는데, 한 사람이 왔습니다. 인물도 좋고 성실해 보이고 다 좋아 보이는데, 채용을 하지 않았습니다. 곱슬머리에 대한 편견(偏見) 때문이었습니다. 가게 사장님은 곱슬머리 고집 세다는 말을 어머니께 들으면서 자란데다 고향친구 중 곱슬머리 친구에게 어려움을 겪은 일이 겹쳐서 곱슬머리에 대한 편견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채용하지 않고 돌려보낸 청년은 경쟁 가게에 취직을 했고, 그 가게는 예전보다 장사가 두 배 이상 잘 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계기로 편견이라는 것이 만들어집니다. 편견은 무의식중에 작용을 하면서 사람의 말과 행동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시간이 지나면 편견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더욱 견고해집니다. 편견이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하나 되기 어렵습니다. 편견이 많은 사람은 자기 자신을 잘 보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더욱이 편견은 복음 안에서 누려야할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자유를 제한합니다. 복음이 주는 자유의 참된 의미와 풍성함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 속에 알게 모르게 가지고 있는 편견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합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성령의 충만으로 내외적으로 닥쳐오는 박해와 세속화의 위기를 잘 해쳐나가면서 급성장을 거듭했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복음을 전하고 박해로 인해 피신해 간 곳에서도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유대인 동족 아니면 유대인의 피를 이어받은 자들에게만 복음을 전할 뿐, 이방인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지는 않았습니다. 거기에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방인에 대한 편견이 밑바탕에 깔려 있었습니다. 독특한 선민의식과 배타적 민족주의를 갖고 있는 유대인들은 타 민족을 은근히 무시하고 혐오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것이 복음 증거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허물어지는 결정적 사건이 바로 베드로가 로마군인 고넬료 집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여 고넬료의 온 집안이 성령으로 거듭나게 된 사건입니다.

 

 

 

1. 진실한 삶의 추구를 귀히 보십니다

 

 가이샤라에 로마군 백부장 고넬료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가이샤라는 당시 로마주둔군 사령부와 로마 총독부가 있던 지중해 연안 도시입니다.

 

가이사랴에 고넬료가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1,2)

 

 고넬료는 로마군의 장교인데 피정복지 사람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고, 그 가르침을 따라 살았다고 합니다. 이를 통해 고넬료는 진리에 목말라하는 삶을 산 사람이라 볼 수 있습니다. 간혹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을 볼 때 그 방법이나 형태가 다양합니다. 인생살이의 어려움을 통해 신앙을 가지는 사람이 있고, 인생이 잘 풀려서 신앙을 가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인생의 의미를 깊이 골몰하거나 죄의 문제로 고심하다가 예수를 믿는 분이 있습니다. 고넬료는 바로 그와 같은 경우입니다. 고넬료는 당시 다른 군인들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점령군으로 온 군인이 정령지나 식민지 백성들을 착취하거나 여인들을 겁탈하는 경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주 흔한 일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고넬료는 로마 군인으로서 정복지의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믿고, 구약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며 살았습니다. 유대인들처럼 하루 세 번 기도생활도 하였습니다. ‘무엇이 인생의 참된 의미일까,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무엇이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인가?’ 이러한 근본적인 고민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귀히 보시고 외면치 않으십니다.

저의 친척 형님 중 예수를 믿지 않으나 어려서부터 유달리 종교성이 많은 분이 계십니다. 집안의 영향으로 불교를 신봉하였는데, 한문으로 된 불경을 자주 독경하면서 그 가르침을 좇아 살았습니다. 마을에서 알아주는 효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저의 모친과 이모님이 집안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시는 중 이 형님을 놓고 특별히 많이 기도하셨습니다. 그래도 예수 믿자고 하면 웃으면서 정중히 거절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대학생 때 일이 있어 어머니와 함께 이 형님 댁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얼마 전부터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어찌된 일인가 물었더니 꿈을 꾸었답니다.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났는데, 이름을 ‘세례요한’이라고 하더랍니다. 참 이상한 꿈이다하면서도 세례요한이 누구인지 몰라 궁금해 하던 차 교회 다니는 직장 동료와 꿈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인데, 예수님의 앞길을 예비하러 왔던 사람이네! 자네에게 세례요한을 보여주신 것은 그 안내를 받아 예수를 믿으라는 하나님의 뜻일세!’ 그렇게 해서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참된 인생, 참된 신앙을 고민하는 사람! 하나님께서 귀히 보십니다. 이미 믿는 우리들도 삶이 자세에 있어서는 구도자적(求道者的)인 자세가 좋습니다. 타락한 시대의 밝은 등불처럼 살았던 영국과 미국의 청교도들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직 다 알지 못한 사람처럼, 아직 다 깨닫지 못한 사람처럼, 아직 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처럼 사십시오. 언제나 채워지지 않은 사람처럼 살아야 합니다. 과도한 확신에 사로잡힌 신앙은 위험한 신앙입니다. 이미 구원의 완성에 이른 사람처럼 너무 자신 만만하고, 이미 신앙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너무 도도하면, 쉽게 남을 판단 내지 정죄하면서 숨 막힐 정도로 남을 부정(否定)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신앙은 그 본질이 겸손입니다. 겸손이 없는 신앙은 기형적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 위대한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뭐라고 고백합니까?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해놓고 정작 나 자신은 구원에서 탈락할까봐 근신하는 신앙생활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빌립보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 마치 구원받지 못한 사람처럼, 죽기 살기로 구원 받으려는 사람처럼 살라 이 말입니다.

 이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귀히 보시는지 모릅니다. 한 사람이 이렇게 진지하게 신앙에 임하고, 진실한 신앙을 정말 추구하고 살아버리면 주변에 적잖은 충격과 반향(反響)을 일으킵니다. 형식적인 신앙생활 하던 사람들이 처음에는 저 사람 좀 별나게 믿네, 너무 진지한거 아니야? 하다가도 나중에는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신앙생활은 저렇게 해야 되는데, 내가 이렇게 껍데기로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다 채워지지 않은 사람처럼 끊임없이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2. 완고한 편견을 허무십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를 받으시고 그에게 부어주시려는 은혜는 예수의 복음을 듣고 구원받는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부어주시려고 베드로를 초청토록 하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이 있는 가이사랴에서 50km 정도 떨어진 욥바라는 항구에 있는 시몬의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공교롭게도 베드로의 원래 이름이 시몬입니다. 그런데 6절에 보면 시몬이 ‘무두장이’라고 밝혀두고 있습니다. 이것을 굳이 적은 이유가 있습니다. 무두장이는 짐승 가죽을 말리고 가공하여 무엇을 만드는 사람입니다. 도축장에서 벗겨낸 가죽을 가져와서 말리는데 엄청난 썩는 냄새가 진동합니다. 이런 집에서 묵는다는 건 곤욕입니다. 더군다나 무두장이는 죽은 사체를 만지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볼 때는 천한 직업이자 부정한 직업입니다.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거리낌 없이 냄새나는 그 집에 들어가 묵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비위가 좋은 사람이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성령을 받아 주님의 복음을 깨닫고 난 뒤 사람 차별하는 마음과 직업을 차별하는 의식이 사라졌다는 말을 하려는 것입니다. 변화 받고 나니 모두가 귀한 존재요, 모두가 하나님께서 불쌍하게 여기시고 구원하기를 원하시는 사람으로만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천히 여기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머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무두장이 시몬은 사람들이 꺼려하는 자기 집에 들어와 묵고 있는 베드로가 얼마나 고마웠을까요? 베드로를 통해 예수의 차별 없는 사랑을 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여러분, 나가서 이렇게 하십시오. 남들에게 갑질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들을 따뜻하게 대해주십시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말이 아닌 몸으로 보여주십시오.

 이런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매우 이상한 환상(幻想)을 보여주십니다.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해 갈 때쯤이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황홀해지더니 하늘에서 큰 보자기 같은 것이 내려오는데 거기에 네 발 달린 짐승, 기는 것, 나는 것 등 온갖 부정한 짐승들이 가득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소리가 들립니다.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13) 베드로가 완강히 거절합니다. 14절 읽습니다.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지금까지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14)

 

자기는 지금까지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결코 먹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거절하자 또 음성이 들려옵니다. 15절 읽습니다.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15)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셨는데, 네가 왜 속되다 하느냐는 음성입니다. 16절을 보니 이런 일이 세 번 있고 사라졌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환상을 보여주신 것은 베드로가 이방인의 초청을 거절할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이고, 세 번씩이나 보여주신 것은 베드로의 완고한 편견을 어쨌든 깨뜨리시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로마군대의 백부장 하면 베드로가 생각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로 그 로마 군병들입니다. 그 사형집행관이 로마군대의 백부장이었습니다. 치가 떨리고 살이 떨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가서 죄사함과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일이 달가울 리가 있겠습니까? 성령을 경험하고 복음을 깨달아서 남들은 차별하는 무두장이를 차별하지 않고 똑같은 인격체로 대해주는 것까지는 하겠는데, 스승 잡아 죽인 저들까지 사랑하는 것은 차마 아직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 그건 못합니다. 제가 이래 봐도 의리 하나 붙들고 살아온 사람입니다.” “남의 나라 쳐들어와서 의로운 분을 잔인하게 잡아 죽인 자들 아닙니까? 나쁜 놈 미워하는 게 무슨 편견이란 말입니까?”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위해서 기도하라고요? 저도 학창시절엔 이 말이 너무 멋있어서 좋아했습니다만, 인생 살면서 악연이 얽히고 얽혀보니, 이건 당해본 아픔이 있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교리에다 아팠던 인생경험까지 덧붙여져서 도저히 로마인들, 특히 로마군인들에게는 다가가지 못하는 마음의 장벽이 되고 있었던 것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의 상태였습니다.

 우리도 얼마나 많은 편견이 복음의 진보, 복음이 주시는 자유를 제한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나는 한 번 틀어지면 말 안 해!’ ‘나는 두 번 다시 안 봐!’ ‘여자가 이래야지 왜 저래?’ ‘남자가 돼서 그럴 수 있어?’ 갖가지 자기의 인생관, 자기의 가치관, 자기의 생활신조, 과거의 경험들, 이런 것이 또 하나의 편견과 장벽이 되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아픔을 가중시킵니다. 교회공동체에서도 ‘난 저 사람하고 같은 조하면 안 할꺼야!’ 여전히 이런 면들이 있습니다. 그게 아닌 줄 알면서도 그렇게 합니다. 놀라운 것은 베드로가 주님의 음성인 줄 알고서도 완강히 거절했다는 점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압니다,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 나 자신을 꺾을 때보다 자기합리화로 말씀을 꺾을 때가 많습니다. 신앙생활 하다 보니 어떤 부분은 이제 너그러워지고 편견도 깨어지고 했는데, 여전히 특정 부분만 부딪히면 마음의 벽이 전혀 허물어지지 않고 견고합니다. 그래도 몇 몇은 용서가 되었는데, 딱 한 사람만은 절대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은혜를 제한합니다. 복음의 풍성함을 제한합니다. 여기서 놓여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잘 바뀌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욱 감사한 것은 주님이 우리보다 더 지독하시고 더 질기시다는 점입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변화시켜 가십니다.

 코리텐붐 여사라고 있습니다. 덴마크 사람인데 2차 대전 때 유대인들을 숨겨준 것 때문에 가족모두가 체포되어 수용소로 갔습니다. 수용소 생활을 견디기 힘들 정도로 혹독하였습니다. 더욱 힘든 것은 수용소소장이 여자들을 불러 성(性) 희롱과 접대를 강요하는 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언니도 그 일을 당한 후 견디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코리텐붐은 끝까지 살아남았고 전쟁이 끝이 났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공부한 후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은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코리텐붐, 독일에 가서 전하여라!’ ‘주님, 목숨을 내놓으라면 하겠지만 독일은 갈 수 없습니다. 어머니와 언니를 무참히 죽은 나라입니다!’ 강권하시는 주님의 압박에 못이겨 독일로 갔습니다. 가는 교회마다 눈물로 회개하며 새로워지는 은혜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한 교회에서 간증집회를 마쳤을 때 사람들이 악수를 청하러 줄지어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 앞에서 한 사람이 걸어오는데, 수용소소장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코리텐붐을 알아보지 못하였으나 코리텐붐은 그 사람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가슴이 뜁니다. 속이 울렁거립니다. 사라진 줄 알았던 미움이 분노가 되어 치밀어 올랐습니다. ‘당신 이야기를 듣고 참회를 하러 왔습니다. 저의 손을 잡아주십시오!’ 얼어붙은 코리텐붐은 속으로 기도합니다. ‘주님, 도저히 이 자만은.... 이 자만은.... 어떻게 이 자를....?’ 그때 주님의 음성 같은 것이 들려옵니다. ‘나는 지금 너에게 용서할 것인가 말 것인가 선택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용서를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코리텐붐은 그 음성에 마음이 허물어졌습니다. 간증집회를 다니면서도 한쪽에 다하지 못한 숙제처럼 미뤄두었던 묵직한 덩어리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염없는 눈물이 흐르면서 그 자를 안아주었습니다.

 

 

 

맺는 말

 

 언젠가 주님은 우리 속에 응어리진 모든 것들과 장벽들을 허무실 것입니다. 그 날을 위해 주님은 포기하지 않고 때로는 우리를 감동이 도가니로 때로는 분노로 때로는 피할 수 없는 압박으로 몰아세우실 것입니다. 때로 우리가 불편할 수 있겠지만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편견을 벗고 복음의 자유와 풍성함을 누릴 수 있게 하실 것이며 편견 없는 자유의 복음을 전하는 도구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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