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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행전강해8 하늘나라에 핀 꽃 스데반 
본문 사도행전 6:8~15, 7:54~60 (신약 196) 
날짜 2017-08-27 
설교자 전용표 목사 

 

   휴가 때 처가에 갔는데 특이한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입주민이 모두가 이용하는 뒤뜰에 개를 데리고 나왔다가 개가 본 변을 치우지 않고 가자 경비 아저씨가 ‘모두가 이용하는 뜰이니 애완견의 변을 꼭 치워달라’고 정중하게 글을 써서 승강기에 붙였습니다. 아마 상습적으로 치우지 않았나 봅니다. 그러자 당사자로 보이는 입주민이 그 아래에다가 화가 잔뜩 난 글을 써 붙였습니다. ‘소량의 개똥 치우기도 거북하면 사직(辭職)하세요! 경비원은 입주민의 고용원입니다(개가 똥 싸면 개똥도 치우고 종처럼 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경비원 ‘짜르자’는 식으로 다른 입주민의 동조를 구하는 선동성 글을 써 붙였습니다. 그러자 그 아래에 입주민들이 답글을 줄줄이 나붙었습니다. “누구신데, 이렇게 무례하십니까? 주민 전체를 욕보이는 행동입니다.” “몇 호신가요?” “애완견 배변처리는 애견인으로서의 기본입니다.” “우리는 경비아저씨를 동등하게 생각하지 아랫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경비아저씨는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남편이고 오빠요 형님입니다. 우리가 하기 힘들어하는 일을 해주십사하고 돈을 드려 부탁해 모신 분입니다.” 순식간에 승강기 한쪽 벽면은 양심과 비양심이, 상식과 비상식이 부딪히는 소통의 장이 되었습니다. 경비아저씨가 얼굴이 하얗게 되어 짐을 주섬주섬 싸고 계실 때 주민 중 한 분이 짐을 풀어 제치면서 ‘이상한 사람 한 사람 때문에 그만두면 안 된다, 우리가 있지 않느냐?’며 만류하고 계셨습니다. 아저씨의 모습이 안쓰러웠지만, 그래도 기분 좋았던 것이 양심과 상식의 편에 서 있는 사람이 훨씬 많았다는 점입니다.

 여러분, 내가 차별하고서야 차별당할 때 차별의 부당성을 어떻게 이야기 합니까? 약자가 힘없이 당하고 있을 때 침묵하고서야 어떻게 나 어려울 때 사람들 나서 주기를 바란단 말입니까? 행동하는 양심이 세상을 바꾸고, 실천하는 신앙이 교회를 교회답게 합니다. 행동하는 양심, 실천하는 신앙인이 됩시다.

 성령의 강림으로 탄생한 예루살렘 교회가 내외부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상승기류를 타고 있을 때 이번에는 위협으로 끝나지 않고 실제로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박해가 찾아왔습니다. 스데반의 순교사건입니다. 이에 관한 기록이 6장 8절부터 7장 끝까지 상당히 깁니다. 그만큼 충격적이자 의미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 장면을 살펴보면서 행동하는 양심과 실천하는 신앙의 꽃으로 피어나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1. 영성과 지성을 겸비한 신앙인

 

 가난한 교인들에게 양식을 공평하게 나눠주기 위해 세운 일곱 명의 사람들 중 단연 돋보이는 이가 스데반이었습니다. 6장 8절을 봅시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8)

 

 스데반은 양식 나눠주는 일을 위해 뽑은 일곱 명 중 한 명입니다. 사도가 아닙니다. 본문에 집사(執事)라는 말은 없지만 성경전체를 종합해 볼 때 이들이 집사의 직분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저 양식 나눠주는 일을 위해 세움 받은 일곱 집사 중 한사람인데 성령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이 일어났습니다. 병자가 낫고 귀신이 쫓겨나가는 일이 일어났다는 말입니다. 큰 기사와 표적은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일어나던 것인데 스데반 집사에게도 일어난 것입니다. 직분은 집사였지만 믿음은 사도들과 동급(同級)이었습니다. 기사와 표적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말씀도 잘 전했습니다. 7장에는 스데반이 공회에 잡혀가 심문받으면서 한 설교가 실려 있는데, 일단 사도행전에 실린 그 누구의 설교보다 분량 면에서 압도적입니다. 그리고 그 설교에서 구약을 자유자재로 인용하면서 반대자들을 압도하였습니다. 10절을 보면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스데반은 영성과 지성을 겸비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신앙은 직분(職分)이 아닙니다. 직분 따는 것을 신앙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한국교인들에게 있는데 잘못된 풍토입니다. 신앙은 직분이 있으나 없으나 예수 닮아가는 것이고 예수처럼 사는 것입니다. 기독신문에 실린 설문조사 결과를 보고 적잖이 고민스러웠습니다. 기독교 불교 천주교인들에게 왜 신앙생활 하는가를 물어봤더니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천주교 불교 신자들이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 신앙생활 한다고 대답한 것이야 이해가 가는 바이나,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대답했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내 영광을 위해 살도록 가르치지 않고 하나님 영광을 위해 살도록 가르치고, 복 받는 비결 가르치지 않고 예수 닮도록 가르치는 종교인데, 어떻게 해서 그 대답은 보이지도 않는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닮으려고 애쓰다보면 거기에 마음의 평안도 따라오고, 거기에 생활의 안정도 따라오고, 때가 되면 직분도 따라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뒤바뀌면 안 되는 겁니다. 말씀을 듣고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고 하다보면 예수를 닮아가게 되고 예수를 닮아가게 되면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통해 크고 작은 일들을 해 나가시는 겁니다. 그런 평신도가 많아야 교회가 살고 기독교가 삽니다.

 안동IC에서 빠져 안동으로 들어가다 보면 왼쪽 편에 일직교회라고 보입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고 그 교회 목사님도 모릅니다만 제가 그 교회 이름을 기억하는 것은 그 교회 종지기로 수십 년을 살다 돌아가신 집사님 한 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일제 때 부모님이 징용을 당해 가난하게 살다가 몸에 병이 들었고 평생 병을 달고 살아서 몸무게가 평생 37kg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깨달은 대로 소박하게 살아갑니다. 주변에 있는 자기처럼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을 진심으로 사랑합니다. 심지어 강아지가 똥 싸놓은 것을 보고,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는 거기에도 마음이 가는 분이였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지극히 사랑합니다. 배운 것 없는 분이 깨달은 것을 글로 써냅니다. 그 글들이 유명해졌습니다. 2007년 69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강아지 똥’ ‘우리들의 하나님’의 작가 권정생 집사님입니다. 권정생은 아명(兒名)이고 본명은 권경수입니다. 교우들이 ‘경수집사, 경수집사’하고 불렀습니다. 쥐가 드나드는 단칸방 흙집에 살면서 월 5만원으로 생활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변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돌아가신 후 정리하다보니 책 인쇄비가 매월 1억이 들어오고 있었고, 통장에는 10억이 들어있었습니다. 자신에게 한없이 가난하고 남들에게 부요하게 사셨습니다. 지금 그 돈으로 작은 재단을 설립하여 어린아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이 분의 지인들이 말합니다. ‘경수집사는 죽어서도 전도하고 사랑을 베풀고 있어!’ 오늘 우리가 스데반집사처럼 병을 고치고 권능을 행하지는 못해도 저마다 작은 예수가 되어 세상 한 켠을 주님의 사랑으로 수놓으며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2. 찔려서 이를 가는 사람들

 

 스데반의 활동으로 믿는 자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달갑잖게 여긴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핍박하기 시작합니다. 논쟁으로는 당해낼 수 없자 여럿이서 공모(共謀)하여 스데반을 공회에 고발해버립니다. 공회에서 여러 증인들을 세워 스데반을 심문하지만 스데반은 전혀 주눅 들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이 되어서(6:15) 역사에 남을 설교를 합니다. 사도행전에 실린 설교로는 가장 긴 설교이고, 내용면에서나 논리적인 면에서 베드로와 바울의 설교를 압도하는 탁월한 설교입니다. 말씀과 성령이 충만하여 명주실처럼 뽑아내는 스데반의 설교는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했으며 유대인들의 위선적 신앙과 잘못된 성전교리를 밝히 드러내고 깨뜨리는 회개의 설교였습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너희 조상들은 하나님께서 구원자를 보내주셨어도 항시 원망하고 불순종하였는데, 너희들도 너희 조상들처럼 똑같이 항상 성령의 역사를 거스른다는 것입니다. 51절을 봅시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51)

 

 본성자체가 불순종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부를 하고 있는데, 스데반은 오히려 진실한 성령의 역사를 항상 거스르는 자들이라고 말하니까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스데반의 설교는 두 번째로 성전은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49,50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이르시되 하늘은 나의 보좡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냐 이 모든 것이 다 내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49,50)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곧 하나님입니다. 아니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는 성전을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거기다가 스데반을 고발하고 돌로쳐 죽이는데 앞장 선 자유민들이라 불리는 이 사람들은 성전이 더없이 중요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로마장군에게 징용으로 끌려갔다가 풀려나서 자유를 얻어 돌아온 자들이었는데, 생활터전이 없으니까 주로 성전 순례객들 상대로 여관이나 식당업을 하면서 먹고 살았습니다. 성전이 먹고 사는 길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하나님은 성전에 계시지 않고 어디에든 다 계신다고 하니까 듣기 좋을 리가 없지요.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렸지만 뉘우치기보다는 이를 갈았습니다. 54절입니다.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54)

 

 찔렸다는 것은 스데반의 설교가 틀리지 않고 맞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뉘우치고 회개하기보다는 이를 갈며 분노하였습니다. 자신들이 겉으로는 신앙적이지만 속으로는 욕심도 많고 계산도 많고, 인간적인 마음으로 신앙생활 할 때가 많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누군가 마치 그것을 훤히 들여다보는 것처럼 말할 때, 꼭 지적받는 기분이 들어서 화가 나고 싫은 것입니다. 그러나 실은 그때가 정말 은혜 받을 때입니다. 거기서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 새로운 삶의 길이 열리는 은혜가 임합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똑같이 마음에 찔렸지만 기분 나빠하지 않고 ‘형제여, 우리가 어찌할꼬?’ 하였을 때 살 길을 열렸던 것입니다.

때로 보면 그날 설교를 죽을 쒔는데 오늘 은혜 받았다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것을 볼 때 은혜는 스스로가 받는 것입니다. 준비된 심령이 될 때 하나님께서는 죽 쑨 설교를 가지고도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은혜 베풀자에게 은혜 베푸십니다.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림까지 받았지만 결국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기분 나쁜 소리를 하는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았습니다. 자기들 살 길을 열어줄 유일한 사람을 향해 돌을 들었습니다.

 

 

 

3. 예수를 닮은 스데반

 

이때 스데반은 땅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았습니다. 55절입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55)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였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가지고 살아야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 보지 않고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평소에 신앙생활 그런대로 하는가 싶더니 결정적인 순간에 사람 쳐다보다가 망쳐버리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스데반은 평소에 성령충만으로 주님만을 바라보며 살던 신앙의 내공이 쌓인 사람인지라 이 공포의 순간에도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본 것입니다. 그랬더니 승천하신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것이 보였습니다.

 보통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는 것으로 나오는데 여기서는 독특하게도 주님이 서 계십니다. 내 아이가 달리기 시합을 하는데 어떻게 태연히 앉아서 볼 수 있습니까? 일어서서 응원을 하면서 봅니다. 그러다가 아이가 부딪혀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마음은 이미 튀어나갑니다. 주님께서도 앉아계시지 못하고 일어서서 응원하시는 것입니다. “스데반아, 조금만 더 버텨라!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라! 마지막 관문이 심히 고통스러울지라도 이겨내야 한다! 억울하고 고통스러울지라도 이 영원한 생명에 비할 바가 아니니 나를 바라보며 인내 하여라!”

 스데반은 해처럼 빛나는 광채를 발하며 서 계신 주님을 향하여 마지막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간구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그때 고통의 절정에서 드리신 주님의 기도가 들려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고통의 절정에서 외치신 사랑의 외침, 용서의 외침이 가슴팍을 때리는 순간, 죽음의 고통을 이기는 은혜가 밀려옵니다. 예수의 사랑이 밀려옵니다.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7:60) 마지막은 차라리 희열이었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힘을 주십니다. 내가 하는 게 아닙니다. 순종하면 감당할 능력은 주님이 주십니다. 능력은 주님께 있습니다. 십자가가 밖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가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맺는 말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내가 곧 예수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이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가 내 안에 내가 예수 안에, 예수가 나고 내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저마다 이 믿음, 이 정신으로 살아 작은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하늘에서 한송이 예수의 꽃으로 피어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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