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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행전강해6 세속화의 위기를 이겨내며 
본문 사도행전 5:1~11 (신약 193) 
날짜 2017-08-13 
설교자 전용표 목사 

 

  대교약졸(大巧若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최고의 기교는 서툴고 어눌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 최고의 명필로 추사(秋史) 김정희를 꼽습니다. 추사가 남긴 작품들 중 서예가들이 주저 없이 최고의 작품으로 꼽는 것이 죽기 3일 전 쓴 봉은사 현판 ‘판전(板殿)’이란 글씨입니다. 직접 보면 어린아이 글씨처럼 서툴고 어리숙합니다. 전혀 기교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추사가 죽기 전 어린아이가 되어 썼기 때문입니다. 무심무욕(無心無慾)의 마음이 되어 쓴 그 어리숙한 글씨가 추사 김정희의 최고의 역작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자꾸 화려함을 추구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무장하는 이유는 시대적 흐름이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빈약한 영성이 자리하고 있어서입니다. 가진 영성이 빈약하고 진리의 힘이 약해지니까 자꾸 겉에 집착하고 프로그램으로 치장도 하고 말들이 화려하고 세지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의 작품이 아닙니다.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조직을 짜고 해서 만든 곳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교회는 성령님의 작품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적을 위해 성령께서 친히 만드신 모임입니다. 그 목적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고, 그 수단은 복음이고, 그 일꾼은 복음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성령께서 친히 불러 모으신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입니다. 우리가 다 성령께서 불러서 온 사람들입니다. 교회가 가장 교회다울 때는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자 노력할 때입니다. 가장 위대한 교회는 크거나 작거나 이 일을 충실히 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교회에는 안팎으로 위기(危機)가 찾아옵니다. 밖으로는 세상의 완강한 거부와 핍박입니다. 이 경우 교회가 정말 교회답게 하고 있을 때 당하는 것만 핍박임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교회답지 않을 때 세상으로부터 오는 비판과 공격은 핍박이 아니라 하나님의 준엄한 질책입니다. 자정능력(自淨能力)을 잃어버리니까 최후 수단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안으로는 세속화(世俗化)의 유혹입니다. 세속화는 교회 안에 세상적인 것이 하나씩 파고 들어오는 것으로써 세상이나 교회나 다를 바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핍박보다 더 위험한 것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본문이 밖으로부터의 핍박이었습니다. 앉은뱅이를 고친 일로인해 복음이 왕성히 전파되자 당대 실권력자들인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이 교회를 공격했습니다. 교회는 이를 담대하게 잘 이겨냈습니다. 외부적인 핍박을 이겨내자 이번에는 내부적으로 교회를 위기로 몰고 가는 사건이 두 가지 발생합니다. 첫 번째는 5장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이고, 두 번째는 6장에 나오는 헬라파와 히브리파와의 갈등 사건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사건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살펴보겠습니다.

 

 

 

 

 

 

1. 초대교회는 하나님과 물질의 자리가 분명했습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말이 있듯이 좋은 일 뒤에 좋지 못한 일이 따르고 좋지 못한 일 뒤에 좋은 일이 따르는 법입니다. 초대교회의 비극적 사건 중 하나인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도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초대교회의 은혜로운 분위기 뒤에 일어났습니다. 4장 32~35절을 봅시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도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4:32~35)

 

 

 성령으로 충만해진 초대교회 성도들은 소유욕을 이겨내고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자기의 땅을 팔아서 도왔습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분위기였습니다. 그러데 여기에 자세히 보시면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표현한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성취가 아니라 관계입니다. 삶의 성공은 세 가지 관계를 통해 결정됩니다.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이고, 둘째는 사람과의 관계이며, 셋째는 물질과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물질은 돈만이 아니라 돈, 명예, 권력 등을 다 포함하는 통칭(統稱)입니다. 이 세 관계 중에서 머리 위에 둘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사람은 옆에 둬야할 대상입니다. 나보다 힘 있다 해서 그 앞에 굽실거리며 그를 머리 위에 둬서도 안 되고, 나보다 힘없다 해서 그 앞에 우쭐거리며 그를 내 발 아래 둬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령을 받아 거듭나고 제대로 깨달은 사람이라야 가능합니다. 대부분 사람은 물질을 머리 위에 두고, 힘 있는 사람을 머리 위에 둡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발아래 둡니다. ‘거꾸로’ 살기 때문에 인생이 비극이 될 때가 많은 것인데,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더 큰 비극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물질을 팔아 사도들 발 앞에 두었습니다. 물질이 있어야할 위치를 제대로 깨달은 것입니다. 또한 사람의 위치도 제대로 깨달았습니다. 본문은 ‘사도들에게 바쳤다’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머리 위에 둘 대상이 아님을 제대로 안 것입니다.

 그렇게 제대로 깨달은 자들 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는 구브로 출신의 성도였는데, 어려운 처지의 이들을 보면 긍휼한 마음이 복받쳐 견딜 수 없는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바나바가 자신의 밭을 팔아서 가난한 성도들을 도울 때 매우 순수한 동기로 하였습니다. 어떤 더 큰 축복이나 칭찬 명예를 바란 것이 아니었습니다. 순전히 성령께서 주시는 사랑의 마음으로 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름이 아니라 ‘위로의 사람’이란 뜻의 별명입니다. 이름은 요셉입니다. 불쌍한 사람 보면 못 본 체 넘어가지 못하고 꼭 도와주고, 위로해 주는 요셉의 모습을 보고 감동받은 사람들이 ‘저 사람은 위로의 사람이야!’하고 부르던 것이 이름처럼 굳어진 것입니다. 바나바의 헌신적인 섬김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그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물질의 자리를 제대로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이것이 발아래 두었다고 표현한 이유입니다. 아무도 공(功)을 위해서 봉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봉사하는 교회! 자기가 했으면서도 애써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이 하신 일로 만들어버리는 거룩한 익명성(匿名性)의 교회! 그러면서 헌신한 자들을 외면하지 않고 칭찬할 줄 아는 교회! 칭찬은 있으되 교만이나 군림은 없는 교회! 이런 교회가 진정 수준 높은 교회요, 능력이 있는 교회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능력입니다. 우리 반계교회가 이런 교회되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은 교회의 거룩성을 파괴하는 행위를

용납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초대교회에 공을 세우고 이름을 내려는 풍토(風土)가 파고들기 시작합니다. 순수하지 못한 동기로 이런 일에 동참하는 이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였습니다. 바나바에 대한 교회의 칭찬에 한껏 고무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기들의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고 사도들 발 앞에 가져갑니다. 이때 베드로는 칭찬이 아닌 충격적인 질책을 쏟아 붇습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는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맙니다. 먼저 3, 4절을 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3,4)

 

 

 베드로가 아나니아를 꾸짖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땅 값을 다 바치지 않았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속였기 때문입니다. 4절을 보면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라고 했습니다. 땅도 네 것이고, 땅 판 돈도 네 돈인데, 네가 그것을 가난한 성도를 위해 쓰든 안 쓰든 네 자유가 아니냐? 누가 강요하더냐? 그리고 일부만 쓰든 전부를 쓰든 그것도 네 자유가 아니냐? 이 말입니다. 초대교회는 헌금 강요하는 교회가 아니었거든요. 헌금 강요는 타락한 교회의 모습이지 정상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지적하는 문제는 땅 판 값에서 일부를 드리면서 전부를 드린 것처럼 속였다는 것입니다. 실제 자신의 모습보다 더 의롭고, 더 헌신적이고, 더 착하고, 더 믿음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자 속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람이라면 모두가 이런 마음이 조금씩은 있지 않습니까? 좀 더 똑똑해 보이고 싶고, 좀 더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고, 좀 더 신앙 좋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 말입니다. 우리가 죄된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런 마음들이 조금씩은 다 있습니다.

 그렇지만 본문말씀이 가르치고 있는 바는 적어도 하나님의 교회를 이런 죄된 본성이 마음껏 활개치고 휘저을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교회는 거짓된 세상의 모든 것들과 사람들을 변화시켜 하나님 나라로 만들어가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아나니아를 향하여 누구를 속였다고 합니까? ‘네가 성령을 속이고....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사람을 속이려 했는데 베드로는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하나님이 속는 분은 아니지요. 하나님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 성령이 소멸되다시피 한 사람은 사람만 신경 쓰이지 하나님이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신경 쓰여야 되고 하나님의 사랑이 느껴지면서 동시에 하나님이 두렵기도 해야 정상입니다. 사람만 신경 쓰이고 사람에게만 인정받으면 되고, 사람 위에만 높아지려 드는 것은 아직 온전히 거듭나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많아지면 그 교회는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가 되기 어렵습니다. 세상이나 똑같기 때문입니다. 세상이나 교회나 똑같아지는 것이 세속화(世俗化)입니다. 교회가 세상보다 더 거룩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는 것이 세속화입니다. 교회에 와서 세상과 전혀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면 그 교회는 이미 세속화가 많이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교회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만큼 커지지만 교회의 거룩성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만큼 유지됩니다. 교회의 능력은 바로 이 거룩성으로부터 나옵니다. 재정력도 사람의 숫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진리의 말씀으로 남이 볼 수 없는 마음까지도 단속해내는 사람들이 모이고 모여 만들어내는 교회의 거룩성이야말로 세상을 변화시켜 놓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요 능력입니다. 성전에서 예배하다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만나고는 두려움에 고꾸라진 이사야와 물고기 잡다가 만난 분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경험하고는 공포와 전율에 휩싸여 털썩 주저앉아버린 베드로 같이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서 엎드러지고 자복하는 예배자가 교회에는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두려움이 교회를 교회답게 합니다. 교회가 이러한 거룩성을 잃어버리면 세상을 변화시킬 능력을 잃게 될 뿐만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갖 조롱과 멸시를 당하게 됩니다. 여호수아 7장에 나오는 아간을 보십시오. 아간 한 사람의 거짓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여리고를 무너뜨리던 그 위세를 하루아침에 잃어버렸고, 조그마한 아이성 사람들에게 패하여 조롱을 받게 되지 않았습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서야겠지만, 특별히 교회의 지도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굳게 서야 합니다. 지도자의 자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잃어버리기 가장 쉬운 위험한 자리이며 더 나아가 교회의 거룩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천만한 자리입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더욱 자신을 쳐서 성령의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이는 삶을 살아야할 필요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을 위해서도 그렇고 교회를 위해서 더욱 그렇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이해를 하였다면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베드로의 준엄한 질책을 듣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은 사건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시도를 교회의 거룩성을 허무는 사탄의 심각한 침투로 규정하셨습니다. 제2, 제3의 아나니아 삽비라가 등장할 경우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니라 공을 다투고 세력을 다투면서 온갖 이합집산(離合集散)과 암투가 판을 치는 곳으로 전락하는 것은 불을 보듯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은혜가 영혼을 살리고 삶을 변화시킵니다.

 

 

 

 

 

 

3. 서로 꾀하여 신앙의 순수함을 지켜야 합니다

 

 

 남편이 급사(急死)한 사실을 모르고 삽비라 또한 베드로의 추궁 앞에 회개치 않고 거짓으로 일관하다가(8) 급사하게 됩니다. 이때 베드로는 삽비라를 향해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라고 합니다. 9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9)

 

 

 함께 꾀하였다는 말은 ‘쉼포네오(συμφωνεω)’인데, ‘함께 소리지르다, 함께 말하다’는 뜻으로 말을 맞추었다는 뜻입니다. ‘우리 이렇게 이렇게 했다고 말을 합시다. 누가 물어보면 나도 그렇게 말할테니 당신도 그렇게 말하시오!’ 참 안타까운 부분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데 함께 하지 않고 악한 일을 하는데 함께 하였습니다. ‘함께’ 모의하여 짝퉁헌신을 하는 짝퉁신앙인, 짝퉁 인격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둘 중 하나만이라도 영적으로 깨어있었더라면 이런 비극적 심판의 주인공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진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나머지 사람은 시간 지나면 그 사람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쇠붙이는 자성(磁性)이 강한 것에 가서 붙는 법입니다. 저의 둘째 형님은 교회를 드문드문 나가는 형식적인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주일예배 빠지는 일은 흔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진실히 영접하고 믿는 신앙과는 거리가 멀었지요. 그런데 형수를 만나 살면서 달라졌습니다. 주일되면 사모하는 마음으로 진실하게 예배를 드리고 경건히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만나면 주일날 들은 목사님 설교에 관한 이야기를 심심찮게 합니다. 변화의 원인은 형수의 진실한 신앙입니다. 그 말이 진실하고 그 행동이 진실하고 그 인격이 진실합니다. 결국 그 진실한 신앙에 끌려 진실한 신앙생활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입니다. 우리 둘째 형님 인생에서 최고의 선물은 형수님 만난 것이라 감히 단언합니다. 당사자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돕는 배필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이 더 진실해지도록 돕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라도 진실한 신앙으로 꾸준히 나아가야 합니다. 꼭 부부지간이 아니더라도 성도지간에 함께 선한 일을 도모하고 함께 진실한 신앙을 도모하는 관계들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진실한 참신앙으로 바로 서면 옆사람이 변합니다. 변화의 출발점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함께 할 때 시너지(synergy;상승)효과가 일어나는 관계,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맺는 말

 

 

 교회는 걷잡을 수 없는 세속화의 위기에 놓여있습니다. 더디 가도 좋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습으로만 가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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