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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행전강해5 어떤 위세에도 굴하지 않으며 
본문 사도행전 4:1~22 (신약 192) 
날짜 2017-08-06 
설교자 전용표 목사 

 

 

 

 초등학생 때 봤던 무협만화에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어떤 스승 아래서 무술을 배운 두 제자가 있었습니다. 어려운 과정을 견뎌내고 이제 누구와 겨루어도 될 만큼 무림의 고수가 된 두 제자가 하산하게 되었을 때 스승은 제자 둘을 시험합니다. 방문 위에 묵직한 나무토막을 달아 방문을 열면 떨어지게 해놓고는 하나씩 들어오게 한 것입니다. 첫 번째 제자는 쏜살같이 몸을 날려 피하였고, 두 번째 제자는 번개같이 칼을 빼서 나무토막을 베어 두 토막을 냈습니다. 그때 스승은 두 번째 제자를 꾸짖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무토막이 아니라 쇳덩어리였다면 너는 어떻게 되었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초등학생 어린나이에 스승의 말을 다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만 성인이 되어 살아가면서 이해가 되었습니다. 세상에는 뛰어난 고수들이 넘쳐나는 곳으로 나의 알량한 재주를 믿고 함부로 하다간 크게 당하는 수가 있음을 겸손히 인정하고 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고수란 자기의 솜씨를 믿고 아무하고나 맞서는 자가 아니라 함부로 맞서지 않고 사는 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분별하고 사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이고 이 분별이 없이 사는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용기가 있어야합니다만 용기가 겸손을 잃어버리면 그 용기가 자기를 해치게 됩니다. 이런 용기를 만용(蠻勇)이라 합니다. 진정한 용기는 맞설 때와 맞서지 않아야할 때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진정 두려워해야할 대상을 두려워할 줄 알고, 두려워하지 말아야할 대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고친 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자 베드로는 또 다시 그들에게 회개하여 구원받을 것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 사두개인들이 몰려와서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갔습니다. 으름장을 놓으며 위협하였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오히려 담대히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예수 이외 다른 이로써는 구원 받을 수 없음을 당당히 전합니다. 제사장 무리는 베드로와 요한에게 예수 이름으로 그 어떤 말도 하지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합니다만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라면서 굴하지 않는 영적 기개(氣槪)를 떨칩니다.

 

 

 

 

 

 

1. 착한 일로 당하는 고난이라야 합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사람이 일어난 것을 보고 몰려든 사람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복음을 전합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으니 회개하여 돌이켜 죄사함을 받으라’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께서 기이한 일을 베풀어주실 때마다 그것을 자신들의 과시거리로 삼지 않고 오로지 예수를 전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한결같이 회개를 촉구하는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한참 전하고 있을 때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몰려와서 베드로와 요한을 잡아 갔습니다. 2절을 봅시다.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하여 (2)

 

 

 이들은 예수를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 싫었습니다. 여기 싫어하다는 말(δίαπονεω)은 보통 싫어한 정도가 아니라 견딜 수 없을 만큼 속이 뒤틀리고, 분이 폭발했다는 말입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한 앉은뱅이가 고침 받은 일은 속이 뒤틀리고 분이 폭발할 일이 아니라 놀라고 기뻐해야할 일일 것인데, 이들은 심기가 불편하고 견딜 수 없을 만큼 화가 났습니다. 이유는 자기들이 잡아 죽인 예수를 전하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은 당대 최고의 실권자였고, 성전 맡은 자는 성전 총괄책임자로서 유대역사가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서열2위의 권력자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부와 정치권력을 다 소유한 전통적인 권력집단입니다. 이들에게 예수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선동가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독한다는 죄목을 걸어 빌라도의 손에 맡겨 잡아 죽였는데, 베드로와 요한이 나타나서는 기인한 일을 행하면서 그 예수가 살아났다며 전하니 심기가 불편하고 화가나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잡혀 온 베드로와 요한이 위축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기세(氣勢)가 등등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저 무리들이 예수를 잡아 죽이던 장면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고, 자기들이 그 앞에서 공포와 두려움으로 비겁하게 도망쳤던 일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이번에는 전과 다릅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당당히 말하는데, 9절 이하를 보십시오.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9,10a)

 

 

 이 당당함은 어디에서 옵니까? 먼저 자기들이 행한 일이 착한 일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본인들이 당하는 고난이 예수의 이름으로 행한 착한 행실 때문에 당하는 애매한 고난임을 알았기에 불안이 아닌 감사한 마음으로 당하니까 당당한 것입니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벧전2:19)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착한 행실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할 사명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명대로 살다가 당하는 핍박과 고난 앞에서는 굽히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살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라면 굽혀야 합니다. 지금 2군사령관과 그 부인이 사병 몇 사람을 당번병, 공관병으로 데려다가 갑질을 행한 것으로 떠들썩합니다. 종 부리 듯 했다합니다. 과일이 썩었다고 집어 던졌다네요. 자기 아들에게 부침개를 챙겨주는 것을 잊어버렸다고 얼굴에 부침개를 집어 던지며 모욕적인 언사를 일삼았다네요. 심지어 전자 팔찌를 손에 채워 필요할 때마다 호출하며 늦게 오면 화를 내며 야단을 쳤다고 합니다. 무슨 짐승 훈련시키는 것도 아니고, 그게 뭡니까? 들켰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게 아니라 들키지 않았더라도 문제가 아닐 수 없는 문제입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들이 교회를 다니는 장로요 권사라는 점입니다. 뉴스를 접하고 너무나 화가 나고 비통했습니다. 도대체 한 사람을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종이나 짐승처럼 대하는 그 의식수준이 어디에서 온 것일까? 도대체 그들은 기도할 때 어떤 하나님, 어떤 예수님을 마음에 그리고 느끼며 기도한 것일까요? 사병들에게 욕설을 일삼고 집어 던지고 할 때 그들에게 예수님은 계시기나 했던 것일까요? 교회 안과 밖에서 완전히 다른, 이런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삶을 사는데도 지금까지 전혀 제재를 받아본 적도 없고, 이런 삶을 사는 사람이 전혀 걸러지지 않고 교회 지도자 반열에 올랐다는 사실은 이 문제가 개인적 차원을 넘어 한국 주류기독교 전체의 문제임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더 심각하고 비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착한 일로 인해 시기질투를 받아 어려움은 당할지언정 죄가 있어 반대에 부딪히고 비판을 받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선한 편에 설 때 우리는 당당할 수가 있고 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2. 신앙의 팩트를 마련하십시오

 

 

 제사장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막강한 권력의 실세들이면서도 갈릴리 어촌 출신의 배우지 못하고 아무 힘도 없던 베드로와 요한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 도 하나의 이유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 때문입니다. 14절을 봅시다.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14)

 

 

 베드로와 요한이 잡혀서 심문을 받고 있는 공회는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이 주도하는 곳입니다. 전술하였듯이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정치 종교적으로 백성을 선도하는 자들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손을 대지 못하는데, 이유 중 하나는 병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 옆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의 이름이 권세 있는 이름이라는 빼도 박도 못하는 산 증거였던 것입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팩트(fact)였습니다. 팩트야말로 가장 위력적인 방패요 공격무기입니다. 16절에도 보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자기들도 부인하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적들도 부인할 수 없는 팩트! 이것이 초대교회와 초대성도들의 힘이었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의 이름으로 병 나은 사람, 예수의 이름으로 물건을 팔아 나눈 사람, 예수의 이름으로 삶이 변화된 사람들이 예수가 생명이요 진리임을 증거하는 팩트들이었습니다.

 어떤 단체나 제도 같은 것을 보면 발전과정(發展過程)을 거치는데, 대략 세 가지 단계를 거칩니다. 순수의 단계, 형식의 단계, 변질의 단계가 그것입니다. 순수의 단계는 순수한 동기와 열정으로 가득하여 거기에는 그들이 목적하는 바가 얼마나 올바른 것인가를 증명할 수 있는 증거들, 곧 팩트들이 넘쳐납니다. 하지만 형식의 단계로 접어들면 열정은 식어지고 형식만이 남습니다. 순수한 동기와 열정으로 시작된 일들이 순수한 동기와 열정은 오간데 없고 형식만 남아서 껍데기만 돌아갑니다. 그런데 변질의 단계로 접어들면 이보다 더 형편없어 집니다. 아예 노골적이 됩니다. 순수한 동기와 열정이 없음에도 있는 것처럼 포장을 해서 모든 것을 장삿속으로 이익을 위해 합니다. 계산적입니다. 가장 화려합니다. 그러나 가장 썩었습니다. 오늘 우리 한국교회는 순수의 단계가 지나간 지 오래 되었고 이제는 형식의 단계를 넘어 변질의 단계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시대에도 엘리야 뿐 아니라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두신 것처럼, 이런 시대에도 시간을 거슬러 사는 참된 신앙인과, 참된 교회를 남겨두셨습니다. 그 칠천 속에 여러분이 우리교회가 들어가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에게 그 누구도 공격할 수 없는 증거를 마련하려면 변화된 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말씀을 믿는 말의 종교입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땅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믿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그분의 말씀을 좇아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그러기에 진정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자들은 말의 변화가 우선적으로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이 바뀌기란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말이 바뀌었다? 놀라운 증거가 됩니다. 말이 바뀌시기 바랍니다. 험담이나 자랑, 신세타령의 말을 십자가에 못 박고, 덕을 세우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말,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앞당기는 말이 입에서 나오도록 하십시오.

 또한 변화된 씀씀이가 있어야 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은 아직 진실로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사자에게는 죄송하지만 최근 있었던 좋은 미덕이 있어 소개합니다. 우리교회에서 협력하고 지원하는 교회가 다섯 곳 있습니다. 평균연령 70이 넘는 교인 20명 내외의 작고 어려운 교회들입니다. 그렇다고 거기서 사역하시는 분들이 부족한 분들이냐?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위대한 목사님들입니다. 그분들을 뵐 때마다 마음에 부담이 항상 있던 차에 그분들 모시고 식사대접하고 휴가철인데 휴가비에 보태시라고 다문 얼마라도 봉투에 담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런 저의 뜻을 누가 알고 그 비용 일체를 지원해 주셨습니다. 목사님들 부부동반으로 모시고 식사를 대접하고 커피도 대접하고 봉투도 전달하는데 얼마나 분위기가 좋고 천국 같은지요. 한 목사님이 그러십니다. ‘전목사, 나 이곳에 와서 9년 만에 휴가비 처음 받아본다’ 가슴 아프면서도 감동적이고 감사한 인사였습니다. 남몰래 섬기는 주머니가 있을 때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변화된 씀씀이가 있어야 합니다.

 가장 강력한 증거, 팩트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삶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에 보면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하시면서 ‘선한 양심, 선한 행동’을 가질 것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욕하고 비방하는 자들이 스스로 부끄러움을 당하도록 하여 비방을 멈추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하십니다.

 

 

 

 

 

 

3. 예수를 모퉁이 머릿돌로 삼으십시오

 

 

 베드로와 요한이 힘과 권력을 가진 자들 앞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당히 복음을 전할 수 있었던 또 다른 이유는 베드로의 설교 속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11~12절입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11, 12)

 

 

 이 말은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거침없이 전하는 가운데 한 말인데, 거침없이 한 말이라고 마구잡이로 한 말이 아니라 구약의 시편 말씀을 정확히 인용하여 지금 일어난 상황을 정확하게 해석하여 한 말입니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은 시편 118편 22절에 나오는 다윗의 고백을 인용한 말입니다. 거기서 다윗은 자신이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 머릿돌이 된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버리고 형제들이 버려 짐승처럼 떠돌며 살아왔지만 하나님께서 요긴하게 들어서 민족을 블레셋의 압제로부터 구원해 내는 왕으로 삼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 시편을 예수님께 적용하고 있는 겁니다. 성령으로 새롭게 된 후에 보니 이 구절이 곧 예수님을 예언하는 말씀으로 깨달아진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멸시하고 모욕하고 버렸습니다. 귀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베드로 자신도 거기에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자기도 예수를 부인하고 버렸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셔서 만인을 구원하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모퉁이 머릿돌은 건물을 지탱하는 가장 중심이 되는 주춧돌입니다. 요즘에야 머릿돌이 언제 지었는가 기록하는 장식용이지만 옛날에는 머릿돌이 빠지면 건물이 무너집니다. 이는 곧 예수가 빠지면 내 인생이 의미 없고 예수와 관계가 흐트러지면 내 인생이 흐트러지고, 예수가 없으면 나도 없는 거나 마찬가지라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병 낫고 구원받은 사람이 산 증인으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자기들의 모퉁이돌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 입니까? 스스로가 모퉁이 돌이라고 생각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성경전문가들이요, 종교전문가들입니다. 거기다가 대를 이은 귀족가문으로 막강한 부와 권력을 가진 자들입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깨어지지 못한 인간의 진면목(眞面目)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똑똑하다고 여길수록, 가진 것이 많을수록, 직책이 높을수록,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춧돌이 되려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스스로가 주춧돌이라 여기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굽히지 않습니다. 개미가 트럭과 맞서다가는 자기만 밟힐 뿐입니다.

 이미 너무 프로가 되면 간절함과 절박함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 앞에서는 언제나 이제 갓 시작하는 아마추어의 마음이라야 합니다. 예수만이 내 인생의 주춧돌이라는 고백을 날마다 가슴 떨리게 하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 없이 시작하는 하루가 불안하고 예수 없이 걸아 가는 길이 고통스럽게 느껴져야 합니다. 그런 체질(體質)이 되어야 합니다. 성취하지 못할까 하는 불안이 아닌 예수 없는 방법으로 이룬 성취와 성공에 불안을 느끼고 죄의식을 가질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가 내 인생의 모퉁이 돌 머릿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와 함께 시작하고 예수와 함께 끝마치려고 애쓰며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모퉁이 머릿돌로 삼는 사람은 그 어떤 환경과 그 어떤 위세 떨치는 사람이라도 흔들 수 없고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약한 지렛대로 너무 무거운 돌을 들려고 덤볐다가는 지렛대가 부러지듯이 만약 억지로 뽑으려고 덤볐다가는 자신이 부러지고야 말 것입니다.

 

 

 

 

 

 

맺는 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당대 최고의 실세였지만 갈릴리 어부들을 굴복시키지 못하였습니다. 백기를 들고야 말았습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모퉁이 머릿돌이라 여기면서 자기보다 더 힘센 로마 앞에서는 굽히면서도 만왕의 왕이신 예수 앞에서는 굽힐 줄 모르던 자들이었습니다. 세상의 원리대로 사는 것의 한계가 이것입니다.

 예수가 모퉁이 머릿돌이 된 사람은 주님을 두려워할 줄 압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는 언제나 굽힙니다. 주님 앞에서 진정 굽히는 사람은 세상 나가서는 겁날 것이 없어집니다. 어떤 지위 어떤 회사 어떤 사람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당당함으로 믿음의 발자취를 남깁니다. 여러분이 이런 발자국의 주인공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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