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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도행전강해4 예수 중심의 교회 
본문 사도행전 3:10 (신약 190) 
날짜 2017-07-30 
설교자 전용표 목사 

 

 어떤 분이 일본 다녀오면서 단무지를 선물로 주신 적이 있습니다. 단무지도 선물이 되는가 했는데 섣부른 생각이었습니다. 태어나서 단무지 줄어드는 것에 그토록 마음 아파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전통방식으로 숙성시켜 만들어낸 단무지는 공장에서 속도전으로 대량생산한 단무지와는 비교 불가한 깊은 맛이 났습니다. 공장제 대량생산의 유혹을 뿌리치고 전통을 고수해 온 장인의 고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단무지 하나를 만들어도 본질을 붙들어 만들면 단무지가 예술이 됩니다. 본질(本質)을 붙들면 놀라운 결과가 찾아옵니다.

 조선 연산군 때 ‘정봉’이라는 지조 곧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연산군이 폭정을 일삼자 왕의 잘못을 지적하는 직언을 하였던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입니다. 결국 연산군에게 찍혀 귀향을 가게 되었으나, 중종반정(反正)으로 연산군이 폐위되고 새로운 임금이 들어서자 구사일생으로 복권(復權) 되고, 중종반정의 공신 성희안의 추천으로 청송부사(靑松府使)가 되었습니다. 정봉이 청송부사로 가 있을 때 영의정이던 성희안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잣과 꿀을 좀 보내달라는 편지였습니다. 조선시대 청송은 석청과 잣의 명산지였습니다. 정봉은 이렇게 답장을 써 보냈습니다. “잣은 높은 산꼭대기에 있고 꿀은 백성들의 벌통 속에 있는데 그것들을 지켜주어야 할 내가 어디 가서 그것들을 구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영의정 성희안은 그 편지를 받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정중하게 사과의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임금도 영의정도 정봉을 함부로 대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정봉이 본질을 좇아 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출세를 위해 힘 있는 자에게 아부나 하는 인물이었다면 조금 더 빨리 출세는 했을지 몰라도 사람들이 우습게보았겠지요. 본질을 붙든다는 것이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든 그 일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그것을 붙잡고 가면 시간이 지나면 놀라운 결과가 찾아오고 누구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에도 곁다리를 붙들려 해서는 안 되고 본질을 붙들어야 합니다. 교회도 본질을 붙들어야 합니다. 시대가 복잡하고 혼탁해지면 본질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리게 됩니다만 그럴수록 본질에 대한 고민을 더욱 깊이 하면서 본질을 깨닫고 붙드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야 삽니다.

 성령의 강림과 말씀의 선포로 시작된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하루에 3천명 회개하고 돌아오는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만 그 성공에 들뜨지 않고 본질을 추구해 갑니다. 오늘 본문은 초대교회의 능력의 원천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사건기록입니다.

 

 

 

 

 

 

1. 앉은뱅이의 변화

 

 

베드로와 요한은 제 구시 기도시간에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유대인은 오전 9시, 오후 3시, 오후 6시, 하루 세 번 기도를 하는데, 제 구시면 오후 3시를 말합니다. 성전 미문(美門)에는 구걸하는 앉은뱅이가 하나 있었는데, 이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보고는 구걸을 합니다. 3절입니다.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3)

 

 

 여기서 보다는 말은 ‘에이도’(είδω)인데, 의미 없이 멀뚱멀뚱 쳐다보았다는 뜻입니다. 한 푼 주고 갈 마음 있으면 몇 푼 던져주고 가라는 눈빛입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걸어보지 못한 사람으로서 4장 22절을 보면 나이가 40인 것으로 보아 40년 구걸 인생을 살아 온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구걸하는 일밖에 없었으니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이 사람이 성전 출입구에 40년 있으면서 한 번도 하나님을 만난 적도 없고, 예배다운 예배를 드려본 적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앉은뱅이’이라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육신적인 앉은뱅이인 동시에 이 사람은 하나님과 한 번도 동행해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성전 가까이 있어도 신앙생활다운 신앙생활 해 본적 없었다 이 말입니다. 살기 위해 몇 푼의 돈이 필요하다보니 거기에 온통 매여서 정작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 사람을 보고 베드로와 요한의 마음이 동하기 시작합니다. 견딜 수 없는 마음이 일어나 쳐다봅니다. 앉은뱅이는 무엇을 주려는가보다 하고 잔뜩 기대하는 마음으로 쳐다보는데,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그럽니다.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실망이 이만저만 아닙니다. 기대했던 돈, 명예, 자리가 오지 않으면 실망이 큽니다만 이런 실망을 겪어야 주님을 만날 가능성이 커집니다. 돈, 명예, 자리가 기대한 대로 와버리면 심령의 가난함을 가지기가 그만큼 힘들어집니다.

 실망하고 있던 사람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힘주어 말합니다.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6) 말과 동시에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손과 발에 힘이 들어가면서 일어나 걷기 시작합니다. 너무나 놀라고 기뻐 걷다가 뛰다가 소리를 지르며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성전 미문에만 앉아있었지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성전 안으로 들어가 찬송을 한 것입니다. 어떤 형식이 없어도 그 자체가 살아있는 예배였습니다. 지난 40년의 악몽 같은 인생에서 벗어나는 감격이 있었고, 바뀔 것 같지 않던 인생이 변화되는 놀라움이 있는 예배였습니다.

 여러분, 변화는 일어납니다. 바뀌지 않던 인생도 바뀔 수 있고, 바뀌지 않던 사람도 바뀔 수 있습니다.

 

 

 

 

 

 

2.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이 변화의 시작이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예수 이름을 붙드는 것에서부터 왔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무엇이었습니까? 6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6)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그들에게는 은과 금이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있는 유일한 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붙들 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예수 이름에 권세가 있습니다.

 비참한 교회는 은과 금도 없고 예수 이름도 없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비참한 교회는 예수 이름은 없으면서 은과 금의 힘을 믿고 큰소리치는 교회입니다. 가장 행복한 교회, 가장 능력 있는 교회는 은과 금은 없어도 예수 이름으로 기뻐하며 만족하는 교회입니다. 목사님, 은과 금도 있고 예수 이름도 있으면 되잖아요? 그것이 심히도 힘이 듭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만큼 힘이 듭니다. 일단 은과 금이 생겨버리면 예수 이름만 의지 하는 순박하고 절박한 신앙이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미국 텍사스의 한 교회 마당에서 유전(油田)이 발견이 되었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유전이 누구의 것이냐를 놓고 법정공방이 벌어졌습니다. 법원의 판결은 ‘유전이 발견되던 시점까지 교회에 등록한 교인들의 공동소유’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교회는 발견당시 등록교인 명단을 확정 짓고는 더 이상 교인을 받지 않기로 결의를 하였습니다. 새로운 성도가 오면 다른 교회 가라고 쫓아 보냈습니다. 혹시 ‘자기 몫이 줄어들까봐’였습니다. 교회는 망해버렸고, 교인들 신앙생활은 불행해졌습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도 예수 이름의 권세가 억만금의 돈보다 더 귀하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은과 금이 주어졌는데도 예수 이름을 의지하고 높이는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런 사람은 그야말로 특수한 은혜에 사로잡힌 사람입니다.

 예수 외에 의지할 것이 너무 많으면 예수 이름의 권세를 경험하기가 힘듭니다.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자각(自覺)하든 못하든 간에 오늘날 신앙인들은 권력, 명예, 물질 숭배에 찌들어 있습니다. 여기에 찌들어 있는 우리 시대는 예수 이름에 권세가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기가 매우 힘듭니다. 이미 은과 금의 효력을 피부로 경험했기 때문에 은금의 권세를 의지하는 습관이 발동합니다. 은금 의지하는 마음을 버려야 예수 이름의 권세를 경험합니다. 심령이 가난해져야 합니다.

 예수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는 심령이 되는 것이야말로 성령충만입니다. 교회가 교회로서의 본질을 지키려면 예수 이름의 권세 외에 의지할 것이 별로 없어야 합니다. 개인의 신앙도 예수 이름의 권세 외에 의지할 것이 없어야 신앙의 본질을 잃어버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의 권세를 경험하며 사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이름의 권세를 전적으로 붙들어 여러분의 삶에 변화의 역사가 경험되어지길 바랍니다.

 

 

 

 

 

 

3.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1절에 보니까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습니다. 붙잡았다는 말은 따라가다, 같이 행동하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 이름의 권세를 통해 40년 악몽 같은 삶에서 깨어나자 옛생활로 돌아가지 않고 제자의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베드로와 요한을 따랐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성전미문에 앉아있던 그 앉은뱅이임을 알아본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놀라워하며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하였습니다. 그때 베드로와 요한이 뭐라고 합니까? 12절입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12)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는 예수의 이름으로 이런 권능이 일어날 수 있음을 왜 모르느냐는 말이고,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는 우리가 한 일이 아니라 예수가 한 일이다,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 예수가 주인공이라는 말입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신앙은 ‘우리가 했다’라고 자랑하고 포장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고 목청껏 외쳤습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신앙은 ‘나를 봐 달라, 나를 주목하라’고 외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꾸짖었습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신앙은 조금 능력이 나타나고 조금 유명해지면 ‘우리가 기도해서 받은 능력이다. 우리는 능력 받은 주의 종이다’ 말하면서 자기들을 차별화시키고 특별한 존재처럼 포장을 해댑니다만 베드로와 요한은 이 사건을 신분상승의 기회로 이용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주인공 행세도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가 잡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고, 그 예수의 이름이 이 사람을 고치신 것이다’(13~16)라고 오직 예수를 말할 뿐이었습니다. 톨스토이의 단편집을 보면 돈자루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부자가 돈을 담아두는 돈 자루가 있었습니다. 주인이 애지중지하니까 다른 물건들이 모두 부러워합니다. 사람들도 다 쳐다봅니다. 돈자루는 굉장히 기분이 좋고 뿌듯합니다. 그러다가 주인이 큰 사업을 한다고 돈을 다 가져가 투자를 하였습니다. 자루는 텅텅 비었습니다. 자루는 여전히 어깨에 힘을 주고 큰소리를 칩니다만 아무도 봐주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주인이 그 자루에 거름을 담았습니다. 냄새가 납니다. 모두가 눈살을 찌푸리며 피합니다. 우리가 다 이 자루와 같습니다. 능력을 발휘하고 재능을 발휘해도 주님이 필요해서 주셔서 쓰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맺는 말

 

 

 교회가 회개하고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성도도 회개하고 모든 일에 예수님이 주인공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면 19절의 말씀과 같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입니다. 새롭게 되는 날은 ‘유쾌하게 되는 날’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를 죽이고 내가 살아서 얻은 기쁨은 순식간에 증발하고 말지만 내가 죽고 예수가 살아서 얻은 기쁨은 오래도록 심령을 적셔주는 샘물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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