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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2017.07.18 14:23

양승훈전도사 조회 수:112

제목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본문 사도행전 1:1-11 (신약 187) 
날짜 2017-07-16 
설교자 전용표 목사 

 

  

 

  사람의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생김새를 가진 것이 손입니다. 뭉퉁한 손이 있는 반면 가늘고 긴 손이 있습니다. 거칠고 메마른 손이 있는 반면 가만있어도 손에 땀이 나서 축축한 손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살아온 인생도 손에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평생 시를 쓰며 살아온 사람의 손은 보들보들합니다. 평생 땅을 일구고 살아온 사람의 손은 거칠기가 나무토막 같습니다. 손톱도 제 모양을 잃은지 오랩니다. 그러나 정직한 손이지요. 트럼프대통령이 다른 나라 정상들과 악수를 할 때 일부로 꼭 쥐어서 기선을 제압한다고 그럽니다. 프랑스대통령과는 29초 동안 악수를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손을 대하는 올바른 예의는 아니지요. 사람이 악수를 할 때는 그 사람의 체온을 느끼면서 그 사람의 인생을 존중하고 축복하는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악수를 하면서 꽉 잡아서 기선을 제압한다는 것은 악수의 기본 의미와 반대되는 것으로 주먹을 쥐는 행위와 같은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이 기(氣) 싸움 할 때 주먹을 쥐고 치려는 시늉을 하지 않습니까? 주먹은 경쟁과 투쟁의 상징입니다. 주먹 쥔 사람과는 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주먹 쥔 손으로는 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편 손에는 물건을 올려놓을 수도 있고 물을 받을 수도 있고 햇빛을 가릴 수도 있고, 더우면 부채질도 할 수 있습니다.

 손에는 사람의 감정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주먹을 쥐게 되고, 기쁠 때는 박수를 칩니다. 긴장이 되면 떨립니다. 기도할 때 손을 모으든지 손을 들든지 하는 간절함이 손에 표현됩니다. 어떤 손이 아름답습니까? 기도하는 손이 아름답습니다. 어떤 손이 강합니까? 주먹손이 강한 것 같지만 가장 강한 손은 기도하는 손입니다. 주먹손은 남에게 상처를 남기지만 기도하는 손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도 살립니다. 결국 이 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내 인생이 아름다울 수가 있고 추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손이 기도하는 손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40일간 지상에 머무시며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비전’을 심어주시고, 예루살렘에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당부하신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 하늘로 승천하셨는데, 그 장소가 감람원이라고 나옵니다. 감람원은 올리브나무가 있는 동산입니다. 예루살렘 성밖 800미터 정도에 있습니다. 안식일에 갈 수 있는 거리가 2천 규빗, 900미터 정도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나 길갈까지 가서 승천하셨으면 제자들은 안식일 허용거리를 어기게 됩니다. 이런 사소한 것에 예수님의 매력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1.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환송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락방에 모여 그때부터 기도하기를 시작합니다. 13절입니다.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13)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고 하였습니다. 원문에는 오로지가 없습니다만 힘쓰더라는 말 속에 오로지라는 강한 의미가 들어있기에 번역할 때 ‘오로지 기도에 힘스더라’고 한 것은 의미를 잘 살린 번역입니다. 그들은 오로지 기도에 힘썼습니다.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는 말은 모든 것을 단절하고 기도에만 전념했다는 말입니다. 친구가 불러내면 나가고, 궁금할 때마다 핸드폰 만지작거리고 해서는 ‘오로지 기도에 힘’쓸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기도에 힘쓰려면 핸드폰이나 정신을 흐리게 하는 문명의 이기들과 단절해야 합니다. 예배에 와서도, 수련회에 가서도 핸드폰을 켜 놓고 인간의 메시지를 수신하려는 사람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수신할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현대문명은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장애물’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순교는 핸드폰과 TV 앞에서 죽는 것입니다. 오로지 기도에 힘쓰려면 잡념을 잠재우고 하나님께만 집중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세대는 영적집중력(靈的集中力)이 제로에 가까운 세대입니다. 한 자리에 앉아서 5분이고 10분이고 30분이고 1시간이고 집중해서 뚫어내는 고도의 영적집중력을 발휘할 때 강력한 성령의 임재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는 말은 그들이 본질적인 것을 구했다는 뜻입니다. 어떤 대형교회 특별새벽기도회 표어가 이렇습니다. “부모의 새벽기도 자녀의 평생축복, 자녀의 새벽기도 부모의 노후대책, 아내의 새벽기도 남편의 영적성공” 4·4조 운율에 맞춰 센스 있게 지은 표어입니다. 그런데 세상과 단절한 채 오로지 기도에 힘쓴 제자들이 과연 ‘자녀의 평생축복, 부모의 노후대책, 남편의 영적성공’을 위해 기도했을까요? 이런 것을 가지고 기도했다면 그들이 예수를 위해 순교했을 리가 없습니다(이재철목사의 ‘사도행전’에서 발췌). 그들이 기도한 장소가 다락방입니다. 헬라어 원문에는 영어의 ‘the’에 해당하는 정관사(το)가 붙어 있습니다. ‘그 다락방’이라는 뜻입니다. 그곳이 다름 아닌 제자들이 예수님과 마지막 만찬을 가진 곳이기에 ‘그 다락방’이라고 한 것입니다. 서로 발을 씻기지 않고 높은 체 허세를 떨던 그때의 부끄러운 기억과 다른 이에게 뒤질세라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그 비겁한 외침이 양심을 사정없이 찌르는 장소입니다. 그 찔림을 가지고 제자들이 드린 기도는 ‘예수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세상에 예수를 전파하며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믿음과 용기, 지혜와 거룩함을 달라는 기도’였음에 틀림없습니다. 예배당과 달리 온갖 유혹과 욕망의 법칙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결단하고 포기하고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기도 없이 불가능이요, 성령에 붙들리지 않고서는 불가능입니다. 성령에 붙들려야 합니다.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는 것은 낮아질 대로 낮아졌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21장 18절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를 찾아와 다시금 사명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남이 나를 띠 띠워 데리고 다닌다는 것은 주인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종이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충만’이란 성령에 붙들려 내 마음대로 못 사는 것입니다. 본능과 욕망에 따라 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가만 놔둬도 본능 좇아, 욕심 좇아 삽니다. 그러나 주님 뜻대로 사는 것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내 자아를 이겨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말씀과 기도로 자신을 쳐서 성령께 복종시킬 때 가능합니다. 종이 되어야 참 자유를 얻는 이 역설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신비입니다. 자유롭게 욕체의 욕망을 좇아 사는 자유자가 되어서는 절대 참 자유를 맛볼 수가 없습니다. 비참함과 허무함의 종노릇하는 악순환에 빠져 괴로울 뿐입니다. 오로지 말씀과 기도를 쇠사슬로 하여 나 자신을 묶어 성령께 복종시킬 때 놀랍게도 영혼의 희열과 함께 참자유가 찾아옵니다. 주님은 낮은 곳에 임하십니다. 가장 낮은 곳 마굿간에 임하셨습니다. 누가복음 3장 1~2절에 보면 누가가 세례요한을 소개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열다섯 해 곧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의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 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여기에는 요한 외에 7명의 이름이 등장하는데 그들은 황제요 분봉왕이요 대제사장들입니다. 당대 최고의 지위를 가진 실력자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곳은 지체 높은 그 양반들이 아니었습니다. 빈들에 거한 세례요한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흉내도 낼 수 없는 낮고 낮음이 세례요한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제자를 비롯한 120명의 성도들은 자신에게 절망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낮아졌습니다. 기도가 거듭될수록 자신의 비참함과 한계를 더욱 절실히 깨닫고 가슴을 치며 땅바닥과 일체가 된 자들입니다. 낮은 마음에 성령이 임하십니다.

 

 

 

 

 

 

2. 다 성령의 충만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오로지 기도에 힘을 쏟기를 10일 간 하였을 때 성령의 강력한 임재가 마가다락방을 습격하였습니다. 그날은 오순절 날이었습니다. 오순절은 보리와 밀 추수를 마치고 지키는 절기로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하나입니다. 마가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성도들은 성령을 부어주시겠다는 약속을 붙들고 더 깊이 더 깊이 기도하였습니다. 드디어 오순절 날이 되었을 때에 자신들도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놀라운 경험이었던지 2~4에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2~4)

 

 

 급하고 강한 바람은 폭풍이라는 말과 동일한 말로서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성령의 강습(强襲)이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이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었다는 것은 용광로처럼 뜨거운 성령의 역사였다는 의미입니다. 폭풍과 불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실 때 동반되는 현상들입니다.

 인간의 욕망을 제어하시는 이러한 성령의 역사는 때로는 불의 혀처럼 경험되기도 하고 때로는 비둘기처럼 경험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실 때 하늘이 갈라지고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시는 것을 보셨습니다. 그때 성령은 비둘기같이 경험되어졌습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용광로와 같은 뜨거움 속에서 경험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새벽 적막함보다 더 고요함 속에서 경험될 수도 있습니다. 데이비드 브레이너드는 들판에서 밤이 늦도록 깊이 묵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깊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였고, 아르헨티나의 영적지도자 후안까를로스 오르티즈는 방 안에서 홀로 앉아 깊이 사모하는 가운데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였습니다. 홀로 기도해도 10일간 지속적으로, 오로지 기도에 힘쓰면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함께 모여 뜨겁게 기도하는 가운데 내 속에 잠재되어 있던 응어리들이 분출하면서 터져 나와 치유를 맛보며 성령의 충만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령충만의 체험을 의도적으로 유도하는 거짓된 감정의 조작도 있습니다. 감정을 극도로 자극하여 종교적 흥분상태로 몰아넣는 것인데, 그렇게 되면 대뇌피질에 자극이 일어나서 어떤 황홀한 경험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기독교역사 속에 일어난 진실한 부흥과 성령충만의 역사는 의도하지 않은 것들이었습니다. 그저 말씀 앞에 찔림을 받고 깊이 회개하고 새로워지기를 열망하는 가운데 일어난 자연스러운 결과들이었습니다. 18세기 요한웨슬레로 인해 일어난 부흥과, 1904년 웨일즈부흥과 1907년 평양부흥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렇게 일어난 부흥은 반드시 동반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높이는 현상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이들이 성령의 충만을 받고 각각 다른 언어로써 하나님의 역사를 말하기 시작하자 오순절을 맞아 세계 각처에서 찾아온 순례객들이 듣고는 놀라워합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11b) 진정한 성령의 역사는 자신을 높이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을 철저히 깨뜨리고 죽는 과정을 거쳤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높입니다. 생각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면 저절로 그렇게 됩니다. 두 번째는 하나 되는 현상입니다. 오늘 말씀에 제자들이 각각 다른 언어로 말하자 세계 각처에서 온 순례객들, 곧 바대, 메대, 엘림, 메소보다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 리비아, 로마에서 온 사람들이 모두가 알아듣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20세기 후반 동시통역기가 개발되기 전 이미 2000년 전 성령께서 친히 동시통역기가 되셔서 바벨탑 이후 갈라졌던 인간의 언어를 하나로 통일시켜 주신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성령은 하나 되게 하시는 영(엡4:3)입니다. 진정한 성령충만을 경험하면 미워했던 자신이 부끄럽고 풀지 못했던 자신이 원망스러울 뿐, 남을 향한 원망과 미움이 사라집니다. 앙금이 사라집니다. 세 번째는 말씀에 대한 더 깊은 갈망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경험한 베드로의 설교는 자신들이 체험한 것에 대한 경험담이 아니라 구약의 말씀으로 이 현상을 설명하고 예수의 그리스도 되심을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행2:14~36).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를 경험한 초대교회 성도들이 더 힘써 한 것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그 가르침 위에서 교제하고 기도하는 일이었습니다(행 2:42). 성령충만을 경험할수록 신비체험 공동체로 변모해 간 것이 아니라 말씀공동체로 변모해 갔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네 번째는 사회변혁이 동반되는 현상입니다. 진정한 성령충만은 반드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로 이어집니다. 바울이 전도하는 곳마다 우상이 철폐되며, 귀신들린 사람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아 착취를 일삼는 구조적 사슬이 끊어지는 일이었으며, 억울하게 옥살이 하는 사람들의 옥문이 열리는 일이었습니다. 웨슬레의 부흥으로 인해 산업혁명 이후 말할 수 없이 타락의 길을 가던 영국사회가 변화되었습니다. 평양부흥으로 인해 평양은 술집이 자발적으로 폐업을 하고 도둑이 사라진, 당시 세계 유일의 도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진정한 성령충만은 기독교인과 교회만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온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충만을 사모하고 받아야 합니다.

 

 

 

 

 

 

맺는 말

 

 

 오합지졸이요 무기력하던 제자들, 부활하신 주님을 여러 차례 만나고서도 여전히 자기 나라 자기 것에만 골몰하던 편협한 생각의 소유자들이던 제자들이,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고 떨쳐 일어나 세상 한 가운데 사랑의 공동체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합리적 사고로는 설명이 불가합니다. 오직 성령의 강력한 강습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예수가 내 삶의 구주일 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 소망이 되심을 확신하는 길도 성령의 임하심으로 가능합니다. 무기력한 신앙생활에 새로운 활력을 되찾는 것도 성령의 충만으로 가능합니다.

 비가 그치고 본격적인 찜통더위가 찾아오면 사람들은 의욕이 꺾이고 축 처져 지내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을 부여잡고 성령의 충만을 구하며 나아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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