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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욥기강해4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본문 욥기 21:1~34(구약781) 
날짜 2017-05-28 
설교자 전용표 목사 

 

  지난 주간 가슴 아프게 들었던 노래가 있습니다. 대중가수로는 유일하게 노벨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음유시인(吟遊詩人) 밥 딜런(Bob Dylan)천국의 문을 두드리며(Knockin’ on Heaven's Door)’라는 노래입니다. 노래 가사가 이렇습니다. ‘엄마, 내게서 계급장을 떼어 가세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어요. 어둠이 점점 다가와 이젠 아무 것도 볼 수 없어요. 내가 천국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엄마, 내 총을 땅에 내려놔요. 더 이상 그들을 쏠 수 없어요.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있어요. 나는 내가 천국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는 것을 느껴요.’ 징집당해 전쟁터에 나간 아들이 총에 맞아 죽어가면서 엄마를 생각하며 남긴 마지막 말을 노래한 노래입니다. 그 상황을 그리면서 들으면 눈물 나는 슬프고도 아픈 노래입니다. 저의 큰 아버지가 학도병으로 6.25전쟁에서 전사하셨기에 더욱 가슴 아프게 느껴진 노래입니다. 명분을 가지고 치르는 전쟁이지만, 대개 전쟁은 권력자들의 욕심과 계산으로 시작됩니다. 그 고통은 고스란히 무고한 수많은 젊은이들과 그 가족들이 감당합니다. 참 불합리하지요. 희생을 치룬 자들에 대해 끝까지 책임을 져주지 않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제 큰 아버지는 어수선한 시절 병적(兵籍)도 없이 징집당해 참전하셨기에 보훈혜택이라곤 전혀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 또한 불합리하지요. 세상에는 불합리하고 불의한 일들이 참 많습니다. 때로 이런 일들로 인해 우리는 신앙의 고민에 빠지기도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이신데 왜 세상이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시는가?

 하나님이 정의로운 분이라고 한다면, 왜 세상에서 악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이기는 일이 일어나고, 억울하게 당한 사람은 억울함을 시원하게 풀어주시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이 공의로운 분이라고 하면서 왜 때로 악인은 형통하고 의인은 고통을 당하게 내버려 두시는 것일까?

 오늘 본문은 욥이 이런 고민을 토해내는 장면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위로한답시고 내뱉는 말이 네가 죄가 있어서 그런 고통을 당하는 것이니, 진실하게 회개해라자꾸 이러니까 욥이 억울해 하면서 제기한 문제가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이라는 문제입니다. ‘내가 당하는 고난은 죄 때문이 아니다, 나도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하는지 몰라서 답답해 죽을 지경이다. 하나님 계신 곳을 알 수만 있다면 가서 직접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너희들은 선한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하면서 내가 겪는 고난이 지은 죄 때문에 받는 벌이라고 하는데, 너희 말이 다 맞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는 악인(惡人)이 형통하고 의인(義人)이 고난당하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거기에 대해서는 너희들이 뭐라고 하겠느냐?’ 이것은 친구들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일면 하나님을 향한 원망의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 이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1. 회의(懷疑) 속으로

 

 

 

 

 

 

 7~16절까지 욥은 악인이 형통하게 사는 모습을 말합니다. 7~13절까지 한 번 읽겠습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생존하고 장수하며 세력이 강하냐 그들의 후손이 앞에서 그들과 함께 굳게 서고 자손이 그들의 목전에서 그러하구나 그들의 집이 평안하여 두려움이 없고 하나님의 매가 그들 위에 임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수소는 새끼를 배고 그들의 암소는 낙태하는 일이 없이 새끼를 낳는구나(7~10)

 

그들은 아이들을 양 떼 같이 내보내고 그들의 자녀들은 춤추는구나 그들은 소고와 수금으로 노래하고 피리 불어 즐기며 그들의 날을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스올에 내려가느니라(죽을 때도 별 고통없이 죽는다는 말) (11~13)

 

 

 악인인데 자식도 많고 자식들이 잘 되기도 합니다. 흔히 생각하듯이 자식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지도 않고 평안하기까지 합니다. 기르는 짐승들은 새끼도 잘 낳고 증식(增殖)합니다. 재산이 계속해서 늘어난단 말이지요. 무슨 생일이다 명절이다 기념일이다 해서 자식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하고 춤을 추면서 부모를 즐겁게 해 줍니다. 얼마나 부러운 가정의 모습입니까? 그렇다고 죽을 때 비참하게 죽느냐? 그렇지도 않아요. 행복하게 지내다가 잠깐 사이에 죽습니다. ‘구구팔팔이삼사의 복을 누립니다. 24장에도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이 나오는데, 거기 보면 의인은 부지런히 땀 흘려도 악인에게서 빌어먹는 처지를 벗어나지 못하고, 가난하여 벗은 몸으로 온 밤을 지새워야 하며, 가진 것이 없다보니 자식들까지 빼앗겨야 하는 비참한 신세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세상에 있다 이겁니다. 여기서 욥은 어느 정도, 아니 실은 뼈에 사무치는 불만이 있는 것입니다. 왜요? 자기가 직접당하고 있거든요. 하나님 보시기에 의롭게 산다고, 죄 짓지 않고 산다고 얼마나 철저하게 살았습니까? 그런데 결과는 저주스런 고난입니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입니다. 그런데 평소 악을 행하던 사람들은 자기처럼 고난을 당하지 않고 평안히 지내거든요. 누구에게 제일 불만이 생기겠습니까? 공의의 하나님이라고 믿었던 바로 그 하나님입니다.

 욥이 고난당하기 전, 동방의 의인이요 거부로 살 때, 악인이 형통하고 의인이 고난당하는 불합리한 세상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졌을까요? 알기는 알아도 지금처럼 뼈저리게 느끼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자기가 직접 겪어보니 세상이 얼마나 불합리한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된 것이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고민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성주에서 참외농사를 짓는 어떤 성도가 있습니다. 이 분이 신앙의 회의(懷疑)에 깊이 빠진 적이 있습니다. 자기는 주일이면 천금(千金) 같은 시간 내서 예배드리고, 남들 도와주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참외 한 박스에 4만원 밖에 못 받는데, 옆의 누구는 다방 아가씨 불러다가 추태(醜態)도 부리고 아주 못 됐게 살아가는데도, 참외 한 박스에 5~6만원 받는 것입니다. 그런 일을 몇 해 연거푸 겪고 나니 하나님이 계시면 도대체 이러실 수 있는가?’하는 신앙의 회의가 들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알을 깨고 신앙이 성숙해가는 과정입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사상가이자 저술가로 꼽히는 C. S. 루이스는 하나님을 마냥 좋으신 분으로만 아는 사람은 아직 치과에도 한 번 가 보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의 유치원도 졸업 못한 사람이란 뜻입니다. 루이스는 고통에 관해 놀라운 통찰을 담고 있는 책을 두 권 썼습니다. 한 권은 40대에 쓴 고통의 문제란 책이고, 한 권은 노년에 쓴 헤아려 본 슬픔이란 책입니다. 젊어서 쓴 책에서는 하나님을 좋으신 하나님이라 묘사한데 비해 노년에 쓴 책에서는 하나님을 나쁜 하나님이라고까지 했습니다. 자기가 겪은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처럼 선하게 살았던 사랑하는 아내가 암으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은 참 잔인하실 때도 있고 하나님은 참 불합리하실 때도 있다는 사실을 몸소 겪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루이스가 신앙이 없어서 하나님을 나쁜 하나님이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은 때로 잔인한 일을 주시기도 하고, 때로 천사처럼 살던 사랑하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데려가시기도 하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2. 늦춰진 정의에 익숙해지기

 

 

 

 

 

 

 막상 나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난을 당하고 있고, 나보다 악하게 산 사람은 형통하게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놓지 말아야할 것은 하나님께서 공의롭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공의의 실현을 연기시키시기도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17~19, 넘어가서 30절을 읽읍시다.

 

 

악인의 등불이 꺼짐과 재앙이 그들에게 닥침과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들을 곤고하게 하심이 몇 번인가 그들이 바람 앞에 검불 같이 폭풍에 날려가는 겨 같이 되었도다 하나님은 그의 죄악을 그의 자손들을 위하여 쌓아 두시며 그에게 갚으실 것을 알게 하시기를 원하노라(17~19)

악인은 재난의 날을 위하여 남겨둔 바 되었고 진노의 날을 향하여 끌려가느니라(30)

 

 

 결국 하나님께서는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이 심판이 바로바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고민스러운 것이고 힘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공의를 늦추실 때 거기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이것이 비결입니다.

 ‘최순실게이트로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최순실씨의 딸 정유라가 권력의 압력으로 이화여대에 입학한 후 수업에 들어오지도 않자 담당교수가 최하의 성적을 주었습니다. 그러자 총장이 불러서 압력을 가했다고 하지요. 공교롭게도 최하의 성적을 준 교수는 독립운동과 민주화에 앞장섰던 함석헌 선생의 따님이라고 합니다. 억울하지요. 압력과 불이익을 당하던 그 몇 년 간의 시간은 그야말로 악이 지배하는 시간이자 하나님의 공의는 사라진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악이 지배하는 시간이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공의가 어둠을 물리치는 시간이 찾아오고야 맙니다. 비록 지금은 불의가 판을 치고 불의한 사람이 나보다 올라가고 나를 괴롭힌다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공의의 실현을 잠시 뒤로 미루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견뎌내야 합니다.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죽하면 시편 73편을 보면 시편을 쓴 성도도 넘어질 뻔 하고 미끄러질 뻔하였다”(73:2)고까지 고백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악인의 형통함 때문에 그를 부러워하거나 불평만 늘어놓는 인생에 빠져들어서는 안 됩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37:1)

 

 

 내가 알아차릴 수 있는 수준에서 하나님께서 공의를 실현하신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다 알 수 없습니다. 다 알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 바로 욥의 친구들의 교만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들이 다 신앙적인 말 같고 맞는 말 같이 들렸지만 나중에 하나님께 크게 꾸지람을 듣지 않습니까?

 사무엘하 3장을 보면 북이스라엘 실권자였던 아브넬이 요압에게 암살을 당해 제거되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울이 통치할 때 그 옆에서 권력을 누리면서 백성들을 착취하는 일에 앞장섰던 아브넬이 사울이 죽자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허수아비 왕으로 세워 권력을 향유합니다. 결국 다윗에게 패하게 될 것을 미리 내다보고는 다윗에게 나라를 갖다 바치고 그 공을 인정받아 계속해서 권력을 누리겠다는 심산(心算)으로 다윗을 찾아왔다가 요압에게 암살당한 것입니다. 요압은 의로운 사람이냐? 요압은 아브넬과 꼭 닮은꼴입니다. 요압은 공()3이라면 과()7이었던 인물입니다. 북에 아브넬이 있었다면 남에 요압이 있었습니다. 둘 다 이리저리 옷을 갈아입어가면서 권력을 놓치지 않는 처세의 달인이자, 권력의 화신(化身)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넬의 악행을 다윗의 손으로 갚지 않으시고 닮은꼴의 악인 요압의 손으로 갚으셨습니다. 오묘하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의 형통에 유혹되어 부러워하거나 내 신세를 탓하거나, 내가 말씀대로 살아온 정직한 삶을 무의미하다고 비하할 것도 없고, ‘내 손으로 악을 갚아 주리라며 무협지의 주인공이 될 필요도 없습니다. 늦춰진 하나님의 공의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의 공의의 밝은 빛이 어둠을 물리치고 세상의 변화를 일으키실 것입니다.

 

 

 

 

 

 

맺는 말. 회의를 넘어 확신으로

 

 

 

 

 

 

 마지막으로 한 가지 나누고 마치려 합니다. 우리가 불의가 성공하고 악인이 형통하는 세상을 살 때 회의에 빠질 때가 있지만 그것은 확신으로 가는 하나의 관문이라는 사실입니다.

 불의가 성공하고 악인이 형통하는 세상을 경험하면서 실망하고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 의심스럽고, 하나님이 정말 공의의 하나님인가 회의가 생기고 할 때, 이것이 곧 감사의 제목입니다. 왜냐? 주님은 넓은 길 가지 말고 좁고 협소하지만 좁은 길 가라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습니다. 넓은 길은 이익(利益)을 추구하는 길이고, 좁은 길은 의()를 추구하는 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익을 생각하면서 삽니다만 하나님께서는 고난을 통해 우리가 추구해야할 것은 이익이 아니라 의라는 것을 일깨우십니다.

 

 여러분, 억울할 때 분할 때 주님께서 우리의 발걸음을 좁은 길로 이끌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길에서 만나주시고 그 길에서 당신의 영광을 나누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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