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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강해3 참된 위로자

2017.05.22 22:46

양승훈전도사 조회 수:71

제목 욥기강해3 참된 위로자 
본문 욥기 4:1~(구약763) 
날짜 2017-05-21 
설교자 전용표 목사 

 

  미국 뉴욕의 지역신문사에 말을 들어드립니다라는 광고가 실렸습니다. 5분 간 어떤 말을 해도 다 들어준다는 광고였는데, 놀랍게도 유료전화였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용을 해서 큰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일본의 어느 대기업에서는 사원들이 스트레스를 풀 수 있도록 화풀이 전화라는 제도를 시행했다고 합니다. 철저하게 비밀보장을 하고 무슨 말이든지, 직장 상사나 동료 회사방침에 대한 어떤 불만이나 욕도 맞장구치면서 들어주는 전화였는데, 이 또한 불티났다고 하네요. 덕분에 사원들의 스트레스지수가 많이 내려갔을 뿐 아니라 작업능률까지 향상되었다고 합니다.

 

 욥기를 읽다보면 참 힘든 것이 첫째로는 너무 길어요. 둘째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럴 때는 끊어 읽기를 해야 합니다. 욥기는 1,2장은 욥이 고난당하게 된 사건이 나오고 38~42장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정리하시는 장면과 욥이 회복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 사이에 있는 3~37장까지는 욥과 친구들 사이에 벌어진 논쟁(論爭)입니다. 이 논쟁 부분이 어렵습니다. 도대체가 무엇에 대한 논쟁인지? 그걸 파악하기가 쉽지 않고, 또 한 가지는 욥과 친구들이 말을 할 때 핵심만 간단히 말하지 않고 장황하게 말을 하기 때문에 또 어렵습니다. 논쟁은 총 3라운드로 진행됩니다. 1라운드는 3~14장까지입니다.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네가 고난당하는 이유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죄를 안 짓고야 어떻게 이런 고난을 당할 수 있겠는가?’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욥은 자기는 죄를 짓지 않았다며 펄쩍 뛰면서 억울해 합니다. 2라운드는 15~21장까지인데,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네가 죄를 안 지었다면 네 자식들이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죄 없는 사람이 이런 고통을 당할 리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욥은 죄가 없어도 고통당하는 사람 있고, 죄가 있어도 잘 먹고 잘 사는 사람 얼마든지 있다.’면서 맞대응 합니다. 3라운드는 22~31장입니다. 여기서는 친구들이 아예, 자기들이 임의로 판단해서 , 네가 지은 죄는 이런 것이다라며 죄 목록을 작성해서 제시하기에 이릅니다. 그러자 욥은 도대체가 지혜란 무엇인가에 대해 말을 하지요. 그러다가 옆에서 지켜보던 엘리후가 끼어들어서 하나님에 대해 지혜로운 말을 하면서 훈계합니다. 이것이 욥기의 몸통부분의 흐름입니다. 오늘은 욥의 친구들이 찾아와서 욥을 위로한답시고 내뱉은 말들이 오히려 욥에게 큰 상처가 되었다는 점을 살펴보면서 진정한 위로자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엘리바스는 욥에게 고난 앞에서 너무 쉽게 허물어진다고 다그치고 있습니다. 3~5절을 읽겠습니다.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3~5)

 

 

 이전에 여러 사람을 교훈하고 가르쳤던 네가 고난 앞에서 그리 쉽게 무너지다니? 왜 남에게 가르치던 대로 너는 행치 않느냐? 이러는 겁니다.

 

 사람이 어디 그렇습니까? 막상 자기가 당해보면 정신을 못 차립니다. 정답대로 안 됩니다. 아는 목사님이 자기 집에 장례가 터졌는데, 기본적인 것을 전부 놓치는 것입니다. ‘목사님, 부고는 띄웠습니까? 화장을 하시려면 대구나 김천이나 어디 화장장 알아보셨습니까?’ ‘아니, 아직, 깜빡하고 있었어!’ 나중에 장례 끝나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그렇게 장례집례하고 했는데, 막상 내 부모님 돌아가시니까 머리가 까맣게 되는 것이 하나도 생각나는 게 없더라!’ 그러는 겁니다. 이게 사람입니다. 제가 부교역자 시절에 어려움 당한 교인에게 심방을 가서 방 안에만 들어앉아 있으면 우울증 걸립니다. 나가서 사람도 만나고 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권면을 하곤 했는데, 막상 제가 어려움을 당해 보니까, 사람 만나기 싫어지더라고요. 친구도 만나기 싫고 심지어 형제도 만나기 싫어져요. 자격지심(自激之心) 때문입니다. 그때 한 가지 깨달았습니다. ‘아하, 형편이 어려워지면 사람들이 떨어져나간다고 하는데, 떨어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담을 쌓게 되는 것이구나!’ 그래서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모범답안만 말하고, 정답대로 행동하라고 하는 것은 위로가 아니라 비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위로는 사람은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는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입니다. 어떤 제품을 사면 사용설명서를 읽어보고 쓰는 것이 안전한데, 너무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은 사용설명서 같은 것 읽어보지 않고 작동하다가 문제가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엘리바스와 친구들이 그러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지혜에 대해 너무 자신감이 있다 보니까 인간에 대해 깊이 이해하려는 시간이나 고난당한 사람에 대해 깊이 이해하려는 시간을 갖지 않고 불쑥 모범답안부터 내 미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을 보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돌로 쳐서 죽여야된다며 군중들이 예수님을 압박해 올 때에 예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무 대구하지 않으신 채 엎드려 땅에 뭔가를 쓰셨습니다. 사람들은 돌을 든 사람들의 죄를 쓰셨다고들 합니다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그 시간 주님께서 돌을 든 사람과 돌에 맞을까 공포에 떨고 있던 사람을 공히 깊이 꿰뚫어보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너희 중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은 깊은 인간 이해에서부터 나온 말씀이지 임기응변(臨機應變)의 처세술에서 나온 말씀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은 인간을 이해하는 일에 있어서 깊이가 있어야 합니다. 결국 지혜는 인간을 이해하는 깊이입니다.

 

 

 

 

 

 

2. 시대를 역행하는 교훈을 가지고 산 레갑 족속

 

 

 

 

 

 

 인간에 대한 이해가 얄팍하면 섣부른 자기판단(自己判斷)에 빠져서 상대에게 난도질을 가하게 됩니다. 나는 잘나서 내뱉는 말이 상대에게는 쓰라린 아픔이 됩니다. 오늘 엘리바스와 친구들이 내 뱉는 말을 한 번 봅시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7,8)

 

 

 “생각해 봐 이 사람아~! 죄 없이 망하는 사람 있던가? 죄가 쌓이고 쌓이면 무너져서 망하는 법일세! 정직한 사람, 의롭게 사는 사람이 왜 망한단 말인가? 악으로 밭을 갈고 거기다가 독을 뿌려대며 사는데 좋은 걸 거둘 리가 있는가? 하나님이 가만 놔두시겠는가? 한 번 하고 불면 금새 날아가고 마는 것 아니겠는가?” 말은 맞는 것 같은데, 가만히 들어보면 욥이 왜 망하고 고난당한다는 말입니까? 죄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죄가 있으니 당하는 거지, 이유 없이 이런 고난당하겠어?’ 마치 속 썩이는 자식으로 인해 힘들어 하는 사람 찾아가서 위로한다면서 다 부모 닮는 법이야! 누굴 닮았겠어?’라고 말하는 격입니다.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하루아침에 전 재산 다 잃고 자식 다 죽은 아픔과 몸에 병까지 얻어 완전히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사람에게 그게 다 네 죄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이 잔인함은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자기중심적인 확신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213절을 보면 엘리바스 빌닷 소발 이 세 사람은 욥이 큰 아픔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달려왔습니다. 와서 보니 욥의 참상(慘狀)이 너무 심하여 칠일밤낮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칠일밤낮을 욥 곁에 있으면서 뭘 했느냐? 욥을 분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정말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한 죄를 짓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저주스런 일이 하나도 아니고 몰아서 찾아올 수 있겠는가? 이건 틀림없이 하나님의 진노를 살만큼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틀림없어!’ 이렇게 된 것입니다. 물론 여기에는 선하게 산 사람은 복을 받고 악하게 산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권선징악(勸善懲惡)교리가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이 교리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다 들어맞는 교리는 아닙니다. 시편 37편이나 73편에서 믿음의 사람이 고민하듯이 악인이 잘 되고 복을 받는 경우도 세상에는 틀림없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욥의 친구들이 욥의 아픔에 진정으로 동참하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은 채 그저 단순한 논리로 분석만 해 댔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날 때부터 소경 된 자를 보고 예수님께 물었었지요? “주님,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자기 죄 때문입니까, 부모 죄 때문입니까?”(9:2) 소경으로 태어난 것이 자기 죄 때문이라면 얼마나 자신이 저주스럽겠습니까? 부모 죄 때문이라면 얼마나 원망스럽겠습니까? 아무짝에도 도움이 안 되는 궁금증이고 교리입니다. 두 번 죽이는 일입니다. 왜 소경으로 살아온 그 아픈 삶을 보려하지 않고 누구 죄 때문일까, 원인분석을 합니까? 너무나 자기중심적(自己中心的)인 이런 마음이 타락한 인간의 본성 중 하나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보면 노력하지 않아서 저렇게 살지 이런 생각! 입이 좀 거친 학생을 보면 애가 질이 나빠 이런 생각! 열심히 살았지만 어렵게 살 수 있습니다. 그 아이가 날 때부터 질이 나빴던 것이 아니고 거친 환경에서 살다보니 어려서부터 어른들의 거친 말을 일찍 배웠을 수 있습니다. 질이 나쁜 아이가 아니라 상처를 많이 받은 아이인 것입니다. 신영복선생이 옥고를 치를 때 감옥에서 많은 사람을 만났습니다. 선생은 서울대 나오고 학교에서 교수로 교편도 잡고 하셨기에 엘리트사회에서 줄곧 살았던 사람인데 감옥에서 밑바닥에서 살다온 사람들을 만난 것입니다. 좀 도둑, 사기꾼, 강간범, 조폭 등 두루두루 만나서 마음의 문을 열고 소통해 보니까 다들 가슴 아픈 사연들 하나씩은 다 있더랍니다.

 진정한 위로는 함께 느끼고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됩니다. 어줍 잖은 말로서 위로하려다가 오히려 역효과 날 수 있습니다. 그저 마음으로 그 사람을 이해하려 들고 그 사람의 형편을 함께 느끼려고 노력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 자체가 위로입니다. 공감(共感)보다 더 큰 위로는 없습니다.

 마가복음 1장에 보면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찾아 나왔습니다. 성한 사람들의 돌팔매질을 각오하고 찾아 나온 발걸음입니다. 어렵게 입을 땝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원하시면누가 저 같은 나병환자에게 관심을 가져주겠습니까? 누가 저 같은 저주스런 인생을 불쌍히 여겨주겠습니까? 그렇지만 저는 정말 이 저주스런 인생에서 벗어나고 싶은데 당신이 저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시다면 어떻게 좀 고쳐주시면 안 될까요? 그때 예수님은 긴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은 스플랑크니조마이, 내장이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셨다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나병환자로 살아오면서 겪었을 그 모진 아픔을 함께 느끼신 것입니다. 그래서 손을 내밀어 나병환자 몸을 어루만지셨습니다. ‘이 몸을 가지고, 얼마나 냉대를 받고 얼마나 힘들었느냐? 그때 나병환자는 지나간 인생이 치유(治癒)되었습니다. 히브리서는 주님이 우리와 한결 같이 함께 고난과 시험을 당하신 분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청년시절 읽었던 책 중에 어느 이슬람 영인의 회심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슬람이 강한 지역에서 어떤 여인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였습니다. 집에서 쫓겨나고 집안에서도 쫓겨났습니다. 살해 위협도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그래도 신앙을 꼿꼿이 지켰습니다. 어느 날 친척 언니의 남편이 죽어서 조문을 하러 갔습니다. 용기를 내어서 간 것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친척 언니도 달가워하는 눈치는 아닙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남편을 잃은 그 언니의 심정을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많은 조문객들이 다녀가는 어수선한 분위기였지만 이 분은 친척 언니 옆에서 말없이 흐느껴 울면서 오랜 시간 앉아 있었습니다. 장례가 다 끝나고 며칠이 지난 후 친척 언니가 찾아왔습니다. 손을 잡고는 고맙다고 합니다. 그때 많은 사람이 다녀갔지만 내 마음에 진정한 위로가 되었던 사람은 너 하나뿐이었다고 합니다. 옆에서 말없이 울우주었을 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고 합니다.

 

 

 

 

 

 

맺는 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우리를 깊이 이해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하셨습니다. 우리 또한 세상에 나가서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 삶을 통해 세상을 위로하는 자로 살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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