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설교

  • home
  • 주일설교

자라게 하시는 이

2017.05.09 19:08

양승훈전도사 조회 수:78

제목 자라게 하시는 이 
본문 열왕기하 23:24~30(구약603) 
날짜 2017-05-07 
설교자 전용표 목사 

 

 

  어떤 목사님이 좋은 분재(盆栽)를 하나 선물 받으셨습니다. 아직 완성된 분재가 아니라 철사로 칭칭 동여매어서 모양을 잡아가고 있는 분재였습니다. 목사님은 모양 잡기 위해 동여매 놓은 철사를 다 풀고는 나무를 바깥 정원에다가 심어주었습니다. 철사에 감겨 온 몸이 뒤틀려 있는 분재가 너무 불쌍해 보였다고 합니다. 그때부터 구불구불했던 나무가 쪽 바로 자라더랍니다. 유치원 아이들에게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얼음이 녹으면 뭐가 되지요?” 뜻밖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봄이 되지요!” 계산이나 꾸밈이 없는 대답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아이들에게 어른들은 자기가 원하는 인생을 주입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아이들의 인생이 구불구불해집니다. 어른들은 자기가 못다 이룬 꿈을 이루기를 바라면서 자꾸 강요하기도 하고, 자식이 어렵게 살게 될까봐 강요하기도 합니다. 바르게살기를 원해서 건전하게 교훈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드뭅니다. 부모가 원하는 대로, 어른들이 원하는 대로 이리 구부리고 저리 구부리는데, 정말 바르게 구부린 것인지,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는 나중에 가서야 깨달아집니다.

 오늘 어린이주일을 통해서 우리가 자녀들을 대하거나 다음세대를 대하는 자세를 한 번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6:4)고 하셨으니, 내가 내 교훈 내 철학 내 인생관을 주입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는가를 돌아보면서 주의 교훈과 훈계를 심어주려는 쪽으로 더 가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는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16:3)고 하셨으니, 우리가 정당한 노력을 다 한 후에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에 맡길 줄 알아야하는데, 내가 과연 자녀를 대하면서 이런 자세였는가를 돌아보아야할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교훈보다는 자꾸 내 인생관을 주입(注入)하게 되는 것도, 노력을 기울인 후에 결과까지 내가 만들어보려는 욕심을 놓지 못하는 이유도 하나입니다. 불안(不安) 때문입니다. 그 불안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이지요.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서 내 자녀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다음세대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신뢰(信賴)하는 믿음을 갖기를 바랍니다.

 

 

 

 

 

 

1. 성군 요시야의 개혁

 

 

 

 

 

 

 오늘 말씀은 남쪽 유다왕국 말기에 불꽃같이 타올랐던 개혁군주(改革君主) 요시야에 관한 말씀입니다. 요시야는 8세인 주전 641년에 즉위하여 주전 60939세의 젊은 나이로 전사(戰死)하기까지 31년간 통치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아몬이고 할아버지는 므낫세였고 증조할아버지는 그 유명한 히스기야였습니다. 증조할아버지 히스기야는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왕이었지요. 그러나 할아버지 므낫세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므낫세는 50년이라는 긴 세월을 통치하였습니다만, 기나긴 통치기간 동안 히스기야의 개혁을 송두리째 뒤엎는 우상화 정책을 써서 혹세무민(惑世誣民)하였으며, 가혹한 착취로 무죄한 피를 많이 흘리는 가렴주구(苛斂誅求)를 일삼았습니다. 나라를 수습불가한 지경의 만신창이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아버지 아몬은 분별없이 할아버지 므낫세의 정책을 그대로 따르다가 불만이 많아진 신하들에게 암살당하였습니다. 아버지가 암살당하는 충격적 사건을 겪고 자란 사람이 요시야입니다. 백성들에 의해 여덟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왕위에 오른 요시야는 스물여섯 살이 되던 해에 성전을 수리하다가 발견한 율법책의 내용을 듣고는 옷을 찢으며 회개를 하지요. 그때부터 나라를 개혁하는 일에 뜻을 품고 본격적으로 박차(拍車)를 가합니다. 우선 훼파된 성전을 수리하면서 우상을 거둬치우는 작업을 펼칩니다. 할아버지 므낫세와 아버지 아몬이 세워두었던 온갖 우상들과 신전들, 나아가서는 예루살렘 주변의 모든 산당들까지 훼파하였습니다. 더 나아가 이미 멸망한 북이스라엘의 지역까지 가서 우상 신전들을 훼파하였고, 여로보암이 세운 벧엘 제단과 산당을 훼파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우상숭배의 여파로 중단되었던 유월절 절기를 대대적으로 지켰습니다. 모세오경이 말씀하는 대로 나라를 개혁하려고 애쓴 만큼 요시야는 힘센 자가 약자를 억압하거나 착취하지 못하도록 막고, 공평한 분배가 이루어지도록 애쓰고, 사회 곳곳에 부정부패를 뿌리 뽑고 공정함과 정의가 뿌리내리도록 하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요시야에 대해 성경기자는 전무후무(前無後無)의 평가를 내립니다. 25절을 한 번 봅시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을 다하며 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따라

여호와께로 돌이킨 왕은 요시야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 (왕하23:25)

 

 

 

 

 

 

2. 노력이 물거품이 되는 아픔 속에서

 

 

 

 

 

 

 그러나 우리는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두 가지 안타까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이토록 청춘을 불사른 요시야의 불꽃같은 개혁으로도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끄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사실입니다. 26절을 봅시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유다를 향하여 내리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하게 한 그 모든 격노 때문이라 (왕하 23:26)

 

 

 할아버지 므낫세가 50년 동안 해놓은 해악질이 너무 커서 요시야가 아무리 바르게 해도 극복하기 어려웠던 것입니다. 한 집안도, 교회도, 국가도 이런 사람이 나오지 말아야 합니다. 한 번 해악질 해 놓으면 몇 십 년, 아니 백년 이백년이 가도 회복이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두 번째는 다윗과 동급의 평가를 받은 성군(聖君) 요시야가 일찍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29절을 봅시다.

 

 

요시야 당시에 애굽의 왕 바로 느고가 앗수르 왕을 치고자 하여 유브라데 강으로 올라가므로

요시야 왕이 맞서 나갔더니 애굽 왕이 요시야를 므깃도에서 만났을 때에 죽인지라 (왕하 23:29)

 

 

 당시 신흥강대국 바벨론과 전통적인 강대국이던 앗수르와 애굽의 연합국 간의 전쟁이 한창이었는데, 유다 왕 요시야는 바벨론과의 동맹관계여서 바벨론을 도와 애굽의 군대를 막기 위해 출정했다가 그만이야 애굽의 왕 느고에게 변()을 당한 것입니다. 이때가 주전 609년입니다. 이 대목은 읽는 모든 이의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왜 요시야 같은 왕이 일찍 죽어야 하는가? 왜 하나님께서는 개혁을 완수할 때까지 요시야의 생명을 지켜주시지 않았는가? 왜 개혁이 중단되도록 내버려두셨는가?

역사에는 이런 안타까운 장면들이 참 많습니다. 악인이 의인을 이긴 사건, 의인이 악인으로 둔갑(遁甲)하고 악인이 의인으로 둔갑한 사건, 정말 바른 사람은 실패하고 악한 사람은 성공하는 사건. 그로인해 나라와 민족 전체가 몇 십 년 후퇴해 버리는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나곤 합니다. 조금 좁혀서 우리의 삶을 생각해봐도 그토록 노력을 기울여 최선을 다했는데, 실패 한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참 괴로운 일이고 괴로운 시간들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우리가 붙들어야할 하나님이 있습니다.

 자녀 셋을 둔 어떤 권사님이 자녀들을 다 키워놓고 난 뒤에 상담심리를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 공부를 하면서 첫째 딸을 키우면서 상처주고 잘못한 것이 깨달아져서 마음이 아파 울기도 하고 회개도 하셨다고 그래요. 첫째를 키울 때는 맞벌이해 가면서 정신없이 키웠겠지요. 열심히 살았지요. 남들만큼 해주기 위해 허리띠 졸라매고 했지요. 그런데 상담심리 공부를 해 보니까 자기가 잘못한 것이 그렇게 많이 보이더라는 거예요. 자기가 실패했다고 느껴지더래요. 얼마나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을까요? 어렵게 결심하고 첫째 딸을 찾아가 용서를 구했습니다. “내가 너를 키우면서 너에게 너무 많은 상처를 줬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엄마를 용서해 다오!” 딸은 갑작스럽고 일방적인 엄마의 태도에 선뜻 마음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살다가 깨달아졌는데, 이미 내 손을 멀리 벗어난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이 자식의 문제일 때 더 힘들고 마음이 아픈 법이지요. 이미 버스 지나갔기 때문에 끝일까요? 아닙니다. 그때 우리가 붙들어야할 분이 바로 하나님이세요. 어떤 하나님을 붙들어야 합니까? 긍휼을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눈물로 뿌린 씨앗이 헛되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 앞에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인생이 좌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3. 뜻밖의 곳에서 열매 맺게 하시는 하나님

 

 

 

 

 

 

 

 요시야의 개혁은 실패한 것 같이 보입니다. 하지만 요시야의 개혁은 전혀 뜻밖의 시간, 뜻밖의 장소에서 꽃을 피웁니다. 시간이 꽤 지나 유다가 망한 후 바벨론 땅에 포로로 끌려갔던 사람들을 통해서입니다. 성경을 저 훌쩍 뛰어넘어 다니엘서 1장을 한 번 봅시다. 18절입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1:8)

 

 

 다니엘뿐 아니라 다니엘의 세 친구인 하나냐(사드락) 미사엘(메삭) 아사랴(아벳느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나중에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불구덩이에 들어가기를 마다하지 않지요. 모함하는 자들이 다니엘을 책잡기 위해 속속들이 뒤를 캐봤지만 무슨 부정이나 비리가 털끝만큼도 발견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박세리를 보고 자라서 훌륭한 골프선수가 된 이들을 일컬어 박세리키즈라고 부르곤 하는데, 다니엘과 세 친구는 요시야키즈(kids)라 부를 수 있습니다. 요시야가 서른아홉의 아까운 나이로 개혁을 완수하지 못하고 죽은 뒤 4년이 지난 주전 605년 세계의 패권(覇權)을 장악한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은 주변 나라들 정복에 본격적으로 돌입합니다. 자기를 도왔던 유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이 때 느부갓네살은 유다에서 많은 전리품과 함께 쓸 만한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가는데, 여기에 다니엘과 세 친구가 끼어있었습니다. 그때 나이가 12~15! 포로로 잡혀간 유다 사람들에게 희망의 아이콘(icon)이 되었던 인물 다니엘과 세 친구는 다름 아닌 요시야의 개혁 때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람들입니다. 말하자면 요시야에게서 주일학교교육을 받았던 주일학교출신들로서 요시야 왕의 신실한 모습의 영향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자라난 사람들입니다.

 다니엘과 세 친구가 보여주었던 우상 앞에 무릎 꿇지 않고 왕 앞에서도 굴하지 않던 신앙의 절개는 다름 아닌 요시야 왕의 모습이었습니다.

 권력자의 자리에 올랐어도 그 어떤 비리에도 연루되지 않을 정도로 보여주었던 의로움과 정의로움은 다름 아닌 요시야의 모습이었습니다.

 죽음의 위기에 처한 친구를 위해서도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의리와 신의는 다름 아닌 요시야 왕이 마지막까지 보여주었던 모습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어떻게 해서든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남몰래 기도하던 모습, 흘러갑니다. 자존심 꺾어가며 정직한 땀 흘려 살아가던 모습, 흘러갑니다. 아는 것 많이 없어도 주님 한 분 붙들고 몸부림치던 모습, 흘러갑니다. 배운 것 적고 서툴고 실수해도 중심(中心)하나 분명했던 것, 흘러갑니다.

 당시에는 실패로 보였지만 결코 실패로 끝이 나지 않았습니다. 눈물로 뿌린 씨앗, 열매 없이 사라지는 것을 차마 보지 못하시는 하나님께서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지금도 저와 여러분의 가정을 위해 일하십니다. 자녀들을 위해 일하십니다. 다음세대를 위해 일하십니다. 눈물로 뿌린 씨앗, 반드시 싹이 트고 자라게 하십니다.

 나라와 민족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인의 억울한 죽음도 결국에는 열매 맺게 하시고, 꺾여버린 정의의 몸부림도 결국엔 보상받게 하실 것입니다. 왜곡된 역사의 물줄기도 결국 바르게 바르게 흐르게 하실 것입니다.

 

 

 

 

 

 

맺는 말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축복하고자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실패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실패를 딛고 일어설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나에게 힘이 되어줄 사람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의 힘이 되어주기 위해 동분서주 다니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기 이름 석자를 세상에 새기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세상에 새기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약자에게 큰소리치는 것을 강인함으로 착각하지 아니하며

약자에게 고개 숙일 줄 아는 강인함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기를 축복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고전 3:6)

번호 제목 본문 날짜 설교자
358 열왕기상 강해7 이스라엘의 분열 (듣기) 열왕기상 12:1~20(구약534)  2017-03-26  전용표 목사 
357 열왕기상 강해8 여로보암의 어리석음 (듣기) 열왕기상 12:25~33(구약536)  2017-04-02  전용표 목사 
356 성찬의 의미와 유익 (듣기) 고린도전서 11:23~29(신약277)  2017-04-09  전용표 목사 
355 부활의 증인 사도행전 14:19~28(신약212)  2017-04-16  전용표 목사 
354 욥기강해1 사심 없는 신앙 욥기 1:1~22(구약761)  2017-04-23  전용표 목사 
353 욥기강해2 깨어진 할렐루야 욥기 2:1~10(구약761)  2017-04-30  전용표 목사 
352 아름다운 가풍(家風) 예레미야 35:14~19(구약1110)  2017-05-14  전용표 목사 
» 자라게 하시는 이 열왕기하 23:24~30(구약603)  2017-05-07  전용표 목사 
350 욥기강해3 참된 위로자 욥기 4:1~(구약763)  2017-05-21  전용표 목사 
349 욥기강해4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욥기 21:1~34(구약781)  2017-05-28  전용표 목사 
348 욥기강해5 하나님의 침묵이 길어질 때 욥기 23:1-17 (구약 783)  2017-06-04  전용표 목사 
347 욥기강해6 하나님과 화해하기 욥기 35:1-16 (구약 795)  2017-06-11  전용표 목사 
346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사도행전 1:1-11 (신약 187)  2017-07-09  전용표 목사 
345 욥기강해8 회복의 하나님을 만나다 욥기 42:10-17 (구약 804)  2017-06-25  전용표 목사 
344 맥추절의 감사 출애굽기 23:14-17 (구약 116)  2017-07-02  전용표 목사 
343 욥기강해7 동문서답 하나님을 만나다 욥기 41:11-42:6 (구약 802)  2017-06-18  전용표 목사 
342 사도행전강해3 성령의 창조물인 교회 사도행전 2:36-47 (신약 189)  2017-07-23  전용표 목사 
341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사도행전 1:1-11 (신약 187)  2017-07-16  전용표 목사 
340 사도행전강해4 예수 중심의 교회 사도행전 3:10 (신약 190)  2017-07-30  전용표 목사 
339 사도행전강해5 어떤 위세에도 굴하지 않으며 사도행전 4:1~22 (신약 192)  2017-08-06  전용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