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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찬의 의미와 유익 
본문 고린도전서 11:23~29(신약277) 
날짜 2017-04-09 
설교자 전용표 목사 

 

 

  추도예식을 하면서 음식문제로 예식시간이 기니 잛으니 하는 문제로 형제지간에 싸움이 일어났습니다. 제사가 아니지만 그래도 아버지 추도예식인데 음식 가지 수가 적다는 지적에 발끈한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나서서 수습을 하고는 예배를 드렸지만 이번에는 예배시간이 너무 짧은 것 아니냐며 또 시비가 붙어 싸웠습니다. 여러분, 아버지 추도식에 음식 가지 수가 중요합니까, 예배시간 길이가 중요합니까, 무엇이 중요합니까? 둘 다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아버지의 뜻을 되새기는 것입니다.

 

 

 

1. 성찬의 의미

 

 

 

 성찬식(聖餐式)은 예수님께서 직접 제정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유월절 식사를 하시며 떡과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이것을 계속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고 그것을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세계 각 곳에서 이어오고 있습니다. 제가 중학생 때 처음 성찬에 참여했습니다. 성찬빵을 받아서 입에 넣었는데 살살 녹더라고요. 카스테라였습니다. 당시는 카스테라가 귀한 빵이어서 조그마하게 짤라주는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잔을 받았는데 달작지근 한 것이 정말 맛있었습니다. 한모금도 되지 않는 양이 여전히 아쉬웠습니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더 많은 때였습니다. 우리가 성찬에 참여할 때에 떡과 포도주가 의미하는 바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떡과 포도주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고 피를 흘리며 죽으신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눠주신 떡이 자신의 몸이고 잔에 담긴 포도주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자신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24, 25절입니다.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4,25)

 

 따라서 성찬에서 떡과 포도주를 받아먹는 자들은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그리고 그 죽으심이 우리에게 적용됨으로 우리의 죄가 사해지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죽으시는 십자가의 의미를 구약 제사에서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속죄제를 지내기 위해 소나 양이나 염소를 끌고 온 제사자(祭祀者)는 제물이 되어 죽을 짐승에게 안수를 해야 합니다. 안수는 전가(轉嫁)의 의미로서 제사자에게 있던 모든 죄가 짐승에게 옮겨진다는 뜻이며, 이제 짐승은 죄인인 제사자 대신 죽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소나 양으로 제사 지내더라도 이 의미를 모르고 제사 지내면 그 제사는 껍데기 제사가 됩니다. 의미를 알고 드려야 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가 받게 될 떡과 잔이 나를 대신해 죽으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찢으신 살과 흘리신 새언약의 피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받아야 합니다.

 노르웨이 어느 시골마을 교회 종탑에 어린양 조각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특별한 사연이 있습니다. 그 교회는 교인들이 예배당을 건축할 때 돈이 없어서 건축회사에 맡기지 못하고 교인들이 직접 일을 해서 예배당을 짓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을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교회를 건축하고 거의 다 지어져 갈 즈음 한 교인이 교회 종탑을 세우다가 그만 실수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두 그 사람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기적같이 살았습니다. 때마침 그 아래에로 지나던 양떼 위에 떨어진 것입니다. 양 한 마리가 깔려 죽고 대신, 떨어진 사람은 살았습니다. 대신 죽은 양을 기리며, 살아난 것을 감사하며, 그 일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그 사건을 기념하기 위해 어린양 조각을 사람이 떨어진 곳은 종탑에다가 세워놓은 것입니다.

떡과 잔을 받을 때 대신 죽으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를 기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성찬의 유익

 

 

 

 성찬의 유익(有益)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주기도문을 하루에 천 번을 외우기를 40일 반복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습니다. 40일은 예수님 40일 금식기도에서 따 온 것은 알겠는데, 천 번은 어디서 따 온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분은 주기도문을 하루 천 번씩 40일을 채우면 소원이 성취된다는 나름의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핵심은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그 일이 내가 먹고 사는 세상 걱정을 뛰어넘고, 내가 남을 용서하고, 내가 죄의 유혹을 이김으로써, 즉 다른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일, 나로부터 시작되는 일임을 고백하고 결단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 주기도문이 하루 천 번, 40일 반복하면 소원성취 되는 도깨비 방망이, 주문(呪文)이 되어버린 겁니다.

 성찬의 유익이란 것도 이런 식으로 엉터리로 생각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저 이 떡과 잔을 받아먹으면 그것이 무슨 복을 가져다준다든지 하는 생각은 너무나 잘못된 생각입니다. 어떤 종파(宗派)에서는 떡과 포도주가 입에 들어가는 순간 그것이 순식간에 진짜 예수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되어서 이것이 내 몸에 들어가면 내가 의로워지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을 유식한 말로 화체설’(化體說)이라고 합니다. ‘몸으로 변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거룩한 주님의 살이 되고 피가 된다고 믿기에 부스러기라도 절대 흘려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카스테라를 사용하지 않고 가래떡 얇게 썰어놓은 것처럼 딱딱하게 만든 전병(煎餠)을 사용합니다. 그것을 영성체’(領聖體)라 부릅니다. 그리고 포도주잔은 일반 성도들에게 주지 않고 사제(司祭)만 대표로 마십니다. 일반 성도들이 몇 방울 남기거나 잔을 떨어뜨리거나 하면 주님의 피를 함부로 대하는 잘못을 저지른다 하여서 그렇습니다. 성찬을 행하고 남은 포도주는 사제가 다 마십니다. 우리는 남은 빵과 포도즙을 사사로이 나눠 먹거나 하지 않고 땅에 곱게 묻습니다. 그것이 좋습니다.

지금 성찬의 유익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지는 성찬의 유익은 무슨 미신적인 방법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란 말씀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찬의 유익은 '오직 믿음'(Sola Fide)입니다. 믿음으로 성찬의 유익이 우리에게 임합니다. 어떤 믿음이냐?

 

 먼저는 내가 죄인(罪人)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는 믿음입니다. 28, 29절을 읽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27,28)

 

 죄인이 죄인 되지 않고 죄가 죄로 인정되지 않는 곳에는 은혜(恩惠)란 있을 수 없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하는 법입니다. 내가 죄인임을 철저히 자각하는 사람이라야 성찬의 유익을 깊이 맛보게 됩니다. ‘죄란 이런 것이다, 이런 것이다라고 여러 사람이 제 각각 말을 할 수 있지만, 우리 장로교의 신앙고백서인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에서는 죄를 두 가지로 정리해서 말합니다. 첫째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있어서 부족한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먼저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 죄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어기는 것만 죄라고 여기지만, 알고도 행치 않거나 행하는데 있어 부족한 것도 죄입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라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책임 명령은 구약에서 가장 중요한 명령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이 명령을 지키는 사람을 보통사람보다 선을 더 행한 사람으로 칭송하고 떠받들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명령을 행하는 자를 지극히 평균적인 사람으로 보시고, 행하지 않는 자를 죄인으로 보신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어기는 것도 죄입니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고 하셨으며,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이미 간음한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런가 하면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이런 명령에 대해 인간인 이상 지키기가 불가능한 말씀이라며 항변합니다만 이것은 아담 이후 인간이 자신의 죄에 대해 갖는 합리화의 습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어떤 분이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섰더니 하나님이 책 세 권을 보여주더랍니다. 자기 죄를 기록한 책이었습니다. 한 권을 펼치니 평생 행동으로 지은 죄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듬성듬성 기록이 되어 있어서 아하, 내가 죄를 많이 짓지는 않았구나!’ 안심을 했답니다. 두 번째 책을 펼치니 거기에는 자기가 말로 지은 죄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흰 바탕이 안 보일 정도로 빽빽하더랍니다. 세 번째 책을 펼치는데, 빽빽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바탕 자체가 까맣더랍니다. 하얀 점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놀라서 이것이 무엇이냐 물으니 이것은 네 마음이다고 하더랍니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육으로 난 사람은 결코 마음의 죄에 대해 민감하지 않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어디까지나 육입니다. 육적인 일만 생각하고 육적인 것만 움켜쥐고자 평생 애쓰고 또 육적인 죄만 깨닫습니다. 이것이 육적으로 난 자의 한계입니다. 성령이 조명하시면 죄가 죄로 드러납니다. 꽤 괜찮던 내가 정말 추하기 그지없는 죄인으로 여겨져 가슴이 쓰라리고 깊은 한숨만 연속으로 터져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얼마나 죄에 대해 무딘 마음으로, 나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살아왔습니까? 성찬은 이러한 자신을 살필 수 있는 기회이기에 은혜입니다.

 또한 아들을 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감사하는 믿음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을 위해 아들을 내어주신 이해할 수 없는 성부하나님의 사랑의 결정체입니다. 우리가 성찬식을 통해 그리스도의 찢기신 살과 흘리신 피를 대할 때마다 아들의 살을 찢고 아들의 피를 쏟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성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감사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요즘 기독교를 비판하는 젊은이들은 아들을 죽이고 다른 사람을 살린 하나님은 잔인한 하나님이지 사랑의 하나님일 수 없다고 합니다. 유럽의 산골에 관광버스 한 대가 관광객을 가득 태우고 산악지대 관광을 마친 후 마을로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버스가 갑자기 속도가 붙기를 시작합니다. 운전수가 아무리 노력을 해보았지만 속도를 늦출 수 없었습니다. 브레이크가 터져버린 것입니다. 내리막이 끝나고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는 갈래 길이 나타났는데, 오른쪽 길에는 버스를 기다리는 또 다른 관광객들 여럿 이 서 있고 왼쪽 길에는 어린 아이 하나가 가방을 메고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 아이는 운전수의 아들이었습니다.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었습니다. 운전수는 핸들을 왼쪽으로 틀었고 아이는 버스에 깔리고 버스는 무사히 설 수 있었습니다. 버스에 탄 승객들과 오른쪽 길에 서 있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운전수는 자기 아들의 희생을 선택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아버지의 행동은 잔인한 행동인가요, 숭고한 행동인가요? 누가 이 아버지를 잔인하다 손가락질 할 수 있단 말입니까?

 

 

 

맺는 말

 

 

 성찬식은 나를 대신해서 그리스도께서 살을 찢고 피를 흘려 대신 죽으신 것을 믿는 믿음과 이 사랑을 베풀어주신 성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감사하는 믿음으로 참여하는 예식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랑을 받은 자로서 다시는 죄에 종노릇한다든지 세상이 아무리 각박하게 돌아간다 할지라도 사랑 없는 냉혈인간(冷血人間)으로 산다든지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새롭게 하는 예식입니다. 그럴 때 성찬은 그 사람에게 말로 다할 수 없는 큰 유익이 됩니다. 이 은혜가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임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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