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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막시리즈1 동행 (듣기)

2017.01.10 23:30

양승훈전도사 조회 수:97

제목 성막시리즈1 동행 
본문 출애굽기 25:1~22 (구약119) 
날짜 2017-01-08 
설교자 전용표 목사 

 

  우리 첫째 아이가 어렸을 적에 공룡을 좋아하고 덤프트럭을 좋아하였습니다. 신문지를 둘둘 말아서 꼬리를 만들어주면 공룡처럼 걷고 공룡처럼 소리를 냈습니다. 또 트럭에 한참 빠졌을 때는 길가다가 큰 트럭이 주차되어 있으면 반드시 올라타서 트럭과 동질감을 느끼는 시간을 갖습니다.

 참 감사한 것은 지금은 자기가 사람인 것을 안다는 점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누구라고 생각하고 사느냐에 따라 인생이 큰 차이가 납니다. 나는 잘못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지 못한 채 스스로를 불행에 감옥에 가둔 채 평생을 삽니다. 자기가 사랑받는 사람, 축복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평생 ‘근거 없는 자신감’(시쳇말로 근자감;根自感이라고 함)으로 행복을 가꾸며 살아갑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하십니다. 고리도전서 3장 16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라고 나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자의식(自意識)을 가지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성전으로 산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관해서는 구약성경 중 성막에 관한 말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부터 살펴볼 성막에 관한 말씀이 이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부터 성막을 살펴보는데, 다 살펴볼 수는 없고 성막 안에 있었던 중요한 도구 여섯 가지를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성막은 8절에 나오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중에 거하시기 위한 집 내지 집무실의 용도로 만들어졌다는 점입니다. 그 안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며 하나님의 백성이 어떤 존재인가를 알려주는 여섯 가지 기구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덧입혀 주시는 하나님

 

 

 

 먼저 증거궤(證據櫃)를 살펴봅시다. 증거궤는 증거의 두 돌판을 넣어뒀다고 해서 증거궤, 또는 법궤, 언약궤 등으로 부릅니다. 증거궤 덮개에 날개를 편 그룹(Cherubim;천사) 둘을 조각해 두었는데, 이것을 은혜를 베푸는 장소라는 의미로 시은소(施恩所)라고 하고, 또 죄를 속하여 주시는 곳이라는 의미로 속죄소(贖罪所)라고 합니다.

증거궤가 실은 하나님의 통치의 보좌입니다. 이곳에 앉으셔서 이스라엘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죄도 사하여 주십니다. 그런데 감정대로 하지 않으시고, 증거궤 안에 넣어둔 돌판에 새겨진 법대로, 언약대로 하십니다. 먼저 10, 11절을 봅시다.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짜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너는 순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위쪽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금 테를 두르고(10,11)

 

 증거궤는 나무로 만든 뒤에 금으로 쌌습니다. 저는 중학생 때 이 부분을 읽으면서 ‘아하, 금이 모자라서 나무로 만든 뒤 겉만 금으로 둘러쌌구나! 금으로 통째 만들었으면 훨씬 더 가치가 있었을 건데...’하며 아쉬워한 적이 있습니다. 정확히 틀렸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커다란 금송아지를 만들고도 남을 만큼 금이 충분했습니다. 여기에는 굉장히 깊은 신학적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증거궤를 만든 나무는 조각목입니다. 조각용 목재라는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어로는 싯딤나무인데, 아카시아나무 종류에 속하는 나무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출애굽해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성막을 만든 곳은 시내산(Mount. Sinai) 아래 시내광야입니다. 그곳은 1년에 비가 30밀리미터도 오지 않는 척박한 땅입니다. 유일하게 자라는 나무가 싯딤나무입니다. 물이 없다보니 크게 자라지 못하고 가시가 많고 아주 딱딱합니다. 썩지도 않고 벌레도 먹지 않을 정도로 독한 나무입니다. 대신 내구성은 정말 좋습니다. 싯딤나무로 무엇을 만드려면 동가리 동가리를 모아야 겨우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조각조각 모아서 쓴다 해서 ‘조각목’으로 번역을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이 싯딤나무로 물건을 만들 때 얼마나 짜증이 났겠습니까? 그런데 이 싯딤나무가 바로 찌르는 가시가 많고 올곧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틀린 본성이 가득한 이스라엘백성, 자기들입니다. 민수기를 보면 먹을 것 부족하다고, 물이 부족하다고, 제 때 공급해주지 않는다고, 갖가지 이유와 목적으로 원망하고 심할 때는 반역을 행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여기에 금을 입혔습니다. 성경에서 금은 왕을 상징하며 순결함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은 원래 볼품없고 재목도 되지 못하는데 거기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거룩함과 순결함과 존귀함을 덧입혀서 증거궤로 쓰신 것입니다. 신약에 오면 예수그리스도로 연결됩니다. 하나님 앞에 도저히 설 수 없고 하나님을 담을 수 없는 죄 된 그릇인 우리들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정결케 씻으시고, 거룩하신 예수로 옷 입혀서 당신 앞에 서게 하실 뿐 아니라, 그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실 때에도 죄 많은 모습, 올곧지 못하고 뒤틀린 모습을 바로 보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습니다. 이것이 말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조각목인데 금을 입혀서 쓰신 사람이 모세고 요셉이고 다윗이고 바울이고, 오늘 저와 여러분입니다.

 

 

 

둘째. 동행하시는 하나님

 

 

 

 성막도 그렇지만 증거궤도 들고 다니는 용도로 만들어졌습니다. 12~14절을 봅시다.

 

 금 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쪽에 두 고리 저쪽에 두 고리를 달며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싸고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12~14)

 

 증거궤 상자 네 귀퉁이에 고리를 만들어 달고 거기에 채를 꿰어서 제사장들이 메고 다닐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이건 메고 다녔다기보다는 모시고 다녔다라고 하는 것이 맞겠습니다. 나중에 보면 가는 방향이나 이동의 때를 구름기둥이 모두 정했고 이스라엘은 다만 증거궤를 메고 따라 다녔습니다.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행사하시고 이스라엘은 수종(隨從)드는 식이었으니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신전은 한 곳에 거대하고도 화려하게 짓습니다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하나님의 집은 이동 가능한 천막이었습니다. 하나님 임재의 상징물인 증거궤도 이동 가능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솔로몬시대가 되면 솔로몬이 이방의 여느 신전처럼 붙박이 성전을 짓지만 그때에도 열왕기상 8장 27절에 보면 솔로몬이 이렇게 밝힙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왕상8:27)

 

 하나님은 어느 한 곳에 잡아둘 수 없는 분임을 붙박이 성전을 짓는 솔로몬 자신도 잘 알았던 것입니다. 고대의 사람들은 지역신(地域神) 개념이 있었습니다. 영어로는 로컬 갓(local god)이라고 합니다. 산에 사는 신은 산에서 싸울 때만 도와줄 수 있고 물에 사는 신은 물에서 싸울 때만 도와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역을 뛰어넘어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여호수아는 이 증거궤를 메고 요단강을 건너고, 이 증거궤를 메고 철옹성 여리고를 무너뜨립니다. 하나님은 어디서든지 만군의 주가 되시고, 어디서든지 그 백성과 함께 하시면서 도와주시는 분임이 드러난 사건들입니다. 그런데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똑같이 증거궤를 메고 나갔는데 승리하지 못하고 패배합니다.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왜 똑같이 증거궤를 메고 나갔는데 누구는 이기고 누구는 지는 것입니까?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모시고 다녔지만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을 끌고 다녔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왕 되신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그 앞에서 철저히 신을 벗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 앞에서 한 번도 신을 벗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영역을 죄로 더럽히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종은 신을 신을 수가 없었습니다. 신을 벗는다는 것은 종이 되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신 벗은 자와 함께 하십니다. 제가 말레이시아에 단기선교 갔을 때 말레이시아에서 가장 큰 이슬람사원에 가보았습니다. 그곳은 손을 씻고 신을 벗어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나오면 신을 신습니다. 우리도 교회 와서만 신을 벗으면 곤란합니다. 솔로몬이 대리석과 백향목으로 붙박이로 짓고 난 뒤 생겨난 병폐가 바로 하나님은 성전 안에만 계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성전에서만 신을 벗는 이중적 신앙(二重的 信仰)이었습니다. 그게 편합니다. 하나님을 성전 안에만 가둬두고 그분 앞에 나갈 때만 신을 벗었다가 나와서는 다시 신을 신고 내 마음대로 사는 것이 얼마나 편합니까? 그래서 성전 안에서는 제법 거룩하고 품위 있고 경건하고 겸손하게 합니다. 성전 밖에서는 자기마음대로 합니다. 마음대로 화내고, 짜증내고, 자기보다 아랫사람이면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괴롭히고 분풀이 하고 부려먹고 갑질을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식대로 대충 거짓을 섞어가면서 수단을 부리고, 처세를 부리기도 합니다. 성직자에서부터 모든 교인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이런 식으로 외식하는 자들이 되면 성전은 역겨운 가면무도회(假面舞蹈會) 장소가 되고 회칠한 무덤이 됩니다. 그곳에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여러분, 내 속에 하나님께서 임하셨다면 어디든지 성전입니다. 어디든지 내가 신을 신고 행세할 수 있는 곳은 없습니다. 그래서 진정 예수로 거듭나서 거룩하신 예수로 덧입고, 거룩하신 성령을 모시고 성전 된 사람은 항상 종(Duolos)입니다.

 

 

 

셋째. 말씀으로 동행하는 인생

 

 

 

 증거궤 안에는 돌에 새겨진 하나님 말씀이 들어있습니다.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 순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한 그룸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16~22)

 

 증거의 두 돌판 곧 하나님의 말씀을 넣어둡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하시겠다고 합니다. 우리가 움직이는 성전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속을 채우지 않고는 결코 성전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광야시대의 성막도, 솔로몬이 지은 성전도 중심부인 지성소(至聖所)에 증거궤가 있었습니다. 사실상 성막이 성막인 이유가 이 증거궤 때문이고, 성전이 성전 될 수 있었던 것도 이 증거궤 때문입니다. 이 증거궤가 없으면 그건 다른 건물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평범한 건물일 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속에 말씀이 있느냐 없느냐가 나 자신을 판가름 짓습니다. 하루를 시작하면서 내 속에 말씀을 채우고 시작한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이 같을 수가 없습니다. 꾸준히 말씀을 대하면서 말씀으로 속을 채우고 살아온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인생의 문제를 만났을 때 같을 수가 없습니다.

 몽골이나 티벳에 가면 불교의 일종인 라마교가 있습니다. 라마불교 사원입구에는 마니차(摩尼車;manicha)라는 것을 만들어 세워놓습니다. 둥글게 만든 통 안에 그들의 불교경전을 넣어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예전에 한 번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라마교 신자들은 사원에 들어갈 때마다 줄줄이 세워둔 마니차를 돌리면서 들어갑니다. 그러면 그 속에 있는 경전을 한 번 읽은 것으로 공력(功力)을 인정받는다고 믿습니다. 우리로 치면 창세기 마니차부터 요한계시록 마니차까지 한 번 씩 다 돌리면 사원에 들어갈 때 성경일독한 것이 됩니다. 여러분, 마니차 많이 돌린 사람이 진짜 라마교신자입니까, 그 속의 경전의 내용을 깨닫고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이 진짜 라마교신자입니까?

이것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인생의 보화(寶貨)가 무궁무진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마르지 않는 샘처럼 계속 쏟아지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 속에 다 넣어두시고는 캐갈 사람 캐 가고, 길어갈 사람 길어 가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새우깡에는 손이 자꾸 가는데 인생의 보화가 가득한 말씀에는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드라마 시간 되면 리모콘에는 손이 잘 가는데 영혼을 풍족히 해주는 말씀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신앙은 대박이 아니라 누적(累積)입니다. 체질과 같은 것입니다. 운동장에 나가보면 운동장 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무에 대고 화풀이 하는 사람도 있고, 파워워킹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간혹 뒤로 걷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젊은 사람 중에 처음 나온 사람은 거의 표가 납니다. 들고 뜁니다. 걷는 사람들 다 추월하니까 순간 기분이 좋기도 합니다만 10분을 못 가고 주저앉습니다. 매일 도는 사람들은 여전히 자기 페이스대로 돌고 있습니다. 당장의 호기(呼氣)로 인생이 되는 것 아닙니다. 꾸준히 말씀으로 채운 사람, 체질을 기른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 있어서 여간한 세파에 쉽사리 흔들리지 않습니다.

 

 

 

맺는 말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동행하시겠다고 하셨고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문제는 내가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나와 동행하심을 깨닫고 나 또한 주님과 동행하는 길은 영원하신 주님의 말씀을 내 속에 담고 말씀체질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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