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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기강해19 라맛레히가 엔학고레로 (듣기)
2016.09.01 11:40
제목 | 사사기강해19 라맛레히가 엔학고레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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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사기 15:14~20(구약 388) |
날짜 | 2016-08-28 |
설교자 | 전용표 목사 |
교도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인쇄소라든지 구두방 양복점 목공소 등 감옥 안에도 여러 공장들이 있는데, 그 중에 목공소에서 몇 사람이 교도소부소장님이 부탁한 쌀뒤주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교도소 들어와서 목공기술을 배운 사람들입니다. 부소장 집에 갈 뒤주라 모양도 내고 예쁘게 만듭니다. 엊그제 들어온 노인(老人) 하나가 옆에서 지켜보다가 참견(參見)을 합니다. “뒤주는 모양보다도 높이가 중요해! 다리가 그렇게 짧아서야 어디 쓰나? 적어도 다듬이돌이 들락날락할 정도로는 높아야지! 그래야 통풍이 잘 돼서 쌀이 신선하게 보관이 되는 법이야!”
엊그제 들어온 신참이 참견하는 것이 못마땅했는지 무시하고 계속 만듭니다. 무시당한 노인은 혼자서 투덜거립니다. ‘야, 내가 평생 목수로 살았어, 이 손으로 집도 여러 채를 지었어!’ 그리고는 땅에 집을 그리는데 기초를 그리고 기둥을 그리고 벽을 그리고 맨 나중에 지붕을 그리는 것입니다. 집 그리라고 하면 보통은 반대로 그리잖습니까? 이 노인 분은 진짜 집을 지어본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실제 집을 짓는 순서대로 그린 겁니다.
지난주에 겨레와 나라를 생각하는 신앙을 조금 생각했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나라와 민족을 걱정하고 나라와 민족을 건강하게 세우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기도하며 힘써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나 혼자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나라가 망하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의해 병합되었을 당시 일반 국민들이 유흥이나 일삼고 타락했던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 국민들은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정치하는 이들이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고 공평(公平)과 정의(正義)를 무너뜨려 힘없는 나라를 만들어버리니까 이웃나라가 기회다 하고 집어 삼켰던 것입니다. 그때부터 국민들은 더 없는 착취와 수탈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IMF사태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살던 사람들이 국가 부도사태가 나자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고 노숙자가 된 경우가 속출했습니다. 최근 들어 나라 곳곳이 어수선하고 국민들의 삶이 더 없이 힘들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나 개인이 잘 되고 복 받고 하는 좁고 이기적인 신앙의 틀을 벗어던지고 이웃과 사회를 염려하고 나라와 겨레를 생각하는 신앙으로 신앙의 폭을 넓혀나가야 합니다. 지금의 위기(危機)는 어쩌면 그런 신앙을 가지라는 하나님의 준엄하신 음성입니다.
1. 이스라엘의 노예근성과 병든 양심을 일깨워야 하는 삼손
지난 주 말씀을 잠시 복습하면서 오늘 말씀으로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삼손은 아무도 협력하지 않는 가운데 압제자 블레셋에 맞서 고군분투(孤軍奮鬪)합니다. 그 방법이 기상천외하고 변칙적(變則的)이었던 것은 함께 싸워줄 사람이 없어 정규전이나 정면승부를 벌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대표지파인 유다지파는 3천명의 별동대를 모으지만, 삼손을 돕기는커녕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에게 넘겨줍니다. 지난 40년 동안 블레셋의 통치에 길들여지고 식민지근성(植民地根性)에 찌든 유다사람들 눈에 삼손은 독립투사가 아닌 세상을 소란스럽게 하는 사회불순분자 내지 테러리스트일 따름입니다. 삼손이 파렴치하고 반민족적인 짓거리를 일삼는 유다지파와 맞서 싸우지 않습니다.
우리가 삼손의 싸움을 두 가지 측면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삼손은 블레셋과만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적과도 싸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 안에 뿌리내리고 있는 노예근성(奴隸根性)과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양심(良心)입니다. 설사 삼손이 블레셋을 물리친다 해도 노예근성과 탐욕적인 양심이 깨어지지 않는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히려 삼손을 원망할지도 모릅니다. 광야길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길들여진 노예근성을 해결하지 못하니까 구원해줘도 애굽생활이 그립다고 투덜거리지 않았습니까?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외부의 적인 블레셋을 이긴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부에 뿌리내리고 있는 블레셋생활을 즐기면서 이중적으로 살아가는 습성(習性)을 깨뜨려 새로운 정신 새로운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모두가 블레셋의 지배를 당연히 여기며 그들이 만들어놓은 질서 속에 안주(安住)하고 그들이 떨어뜨리는 콩고물을 차지하기 위해 굴종(屈從)의 삶을 살 때 삼손은 미친 듯이 저항하고 싸웁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시위(示威)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저항하고 싸우다 죽을지언정 세상 앞에 비굴하게 굽실거려선 안 된다! 거짓과 타협한다든지 한 움큼 이익을 위해 양심을 팔아선 안 된다! 블레셋은 우리가 섬길 자가 아니라 우리가 싸워야할 적이다!” 결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모습으로 타협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양심에 망치질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해야할 일이 바로 무엇인가하면 위선적이고 이중적으로 살아가는 가는 그리스도인들의 무뎌진 양심부터 깨우는 일입니다. 바르게 하다가 배신을 당하더라도 맞서 싸우지 않고 온유함을 유지하면서 포기하지 않고 해야 합니다. 삼손도 자기를 붙잡아 적들에게 넘기는데도 맞서지 않는 온유함으로 대처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더 이상 군중 속에 숨어 그리스도인의 색깔을 감추고 살지 마십시오. 당당히 ‘나 교회 다녀! 나 그리스도인이야!’ 선포하고 사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십시오. 그리스도인답게 향기나는 삶을 살려고 삼손처럼 저항하듯 사십시오. 우리가 그렇게 설 때, 거기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에, 주변의 굳은 양심들에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합니다.
제가 신병훈련을 받을 때 우리 소대에 서울 뺀질이 경상도 뺀질이가 있었습니다. 경상도 뺀질이는 서울 뺀질이 곁에 갖다대지도 못하겠더라고요. 서울 뺀질이는 교회 다니는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동 중에 군가를 크게 불러야 하는데, 이 친구는 립싱크만 합니다. 소리가 작으면 앞으로 굴러 뒤로 굴러 기합을 받는데도 소리를 보태지 않고 혼자 립싱크만 합니다. 소대원들이 욕을 해도 요지부동입니다. 하는 말이 “나는 교회 찬양대에서 솔로를 하는 솔리스트인데 군대에서 성대를 다쳐서 가면 안 돼! 너희들 우리교회가 얼마나 유명한 교회인지 알아? 절대 안 돼!” 소대원들이 욕을 하고 뭐라해도 안 되던 친구가 “그래? 그렇구나! 그래도 우리 믿는 사람이 더 희생하고 더 섬겨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겠니?”라고 말하는 또 다른 기독교인에 의해 양심이 흔들리면서 소리를 지르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변화를 일으킨 친구는 상규라는 친구였는데, 당번이 아닌데도 물을 떠옵니다. 신발정리를 합니다. 그렇게 하는 모습을 보니까 양심이 찔린 것입니다.
2. 나귀 턱뼈로 이룬 승리에 도취하는 삼손
마침내 삼손이 레히 근처에 진을 친 블레셋 진영에 포박(捕縛)당한 채 무기력하게 끌려오자 블레셋 사람들은 승리의 환호성을 내지릅니다. 바로 그때 여호와의 신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십니다. 삼손을 두 겹으로 꽁꽁 묶었던 밧줄이 불 탄 삼과 같이 끊어졌습니다. 땅바닥에 뒹굴던 나귀턱뼈 하나를 집어든 삼손은 칼과 창으로 중무장하고 덤비는 블레셋 병사들과 맞서 싸우는데 그날 싸움에서 블레셋 병사 1천명을 쓰러뜨리는 전과(戰果)를 올립니다. 14,15절입니다.
삼손이 레히에 이르매 블레셋 사람들이 그에게로 마주 나가며 소리 지를 때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게 갑자기 임하시매 그의 팔 위의 밧줄이 불탄 삼과 같이 그의 결박되었던 손에서 떨어진지라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을 내밀어 집어들고 그것으로 천 명을 죽이고(14,15)
하다못해 돌도끼라도 돼야지 나귀턱뼈가 뭐란 말입니까? 사람은 자꾸 객관적인 조건을 따지고 거기에 얽매이지만 관건(關鍵)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느냐 하지 않느냐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나귀 턱뼈로도 중무장한 블레셋 군대를 이기기도 합니다. 하찮은 것도 하나님 손에 붙들리면 이렇게 쓰임 받고 큰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나귀턱뼈가 누구입니까? 삼손 자신입니다. 모세가 마른 나무지팡이로 홍해를 가르고 이적을 행하는데, 그 마른 나무지팡이가 곧 모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이 마른지팡이이고, 나귀 턱뼈라는 사실을 망각(忘却)하고 삽니다. 나보다 잘 난 사람 앞에 초라함은 느낄 줄 알면서도 자기 존재가 하나님 앞에 원래가 나귀 턱뼈라는 사실은 느끼지 깨닫지 못합니다. 특히 큰일을 해냈거나 성공을 거뒀을 때, 업적을 이뤘을 때는 더 그러합니다. 나뀌턱뼈가 아니라 전설적인 명검 엑스칼리버나 된 것처럼 여깁니다.
삼손도 그러했습니다. 죽기살기로 싸울 때는 몰랐는데, 다 싸우고 보니 자기혼자서 천 명을 쓰러뜨린 겁니다.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승리에 스스로도 도취됩니다. 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16절입니다.
이르되
나귀의 턱뼈로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음이여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 명을 죽였도다
하니라(16)
우리 말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여기서 주어는 ‘나’입니다. “내가 나귀 턱뼈로 천 명을 죽였다, 내가 1대 1000으로 싸워 이겼다!” ‘하나님’은 없고 ‘나’만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없고 ‘내가 한 일’만 있습니다. 이 노래를 부른 뒤 삼손은 나귀 턱뼈를 내던지고 그곳을 ‘라맛레히’라고 이름 짓습니다. ‘라맛레히’는 ‘턱뼈의 언덕’이란 뜻으로 ‘오로지 나귀 턱뼈 하나로 적의 시신이 산을 이룰 만큼 승리를 이룬 곳’ 정도의 의미입니다. 자신에 대한 무한한 자부심(自負心)과 자랑이 한껏 들어있는 이름입니다. 자신이 나귀 턱뼈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이후 삼손은 밀려오는 갈증(渴症)과 탈진(脫盡)에 맥없이 쓰러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18절을 봅시다.
삼손이 심히 목이 말라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께서 종의 손을 통하여 이 큰 구원을 베푸셨사오나 내가 이제 목말라 죽어서 할례받지 못한 자들의 손에 떨어지겠나이다 하니(18)
이 큰 승리와 구원을 베푸신 분이 누구라고 고백합니까? 하나님! 주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이 있은 후 하나님께서는 삼손의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우묵한 곳을 터뜨려 샘물이 솟게 하셔서 삼손이 마시고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라맛레히를 자랑하는 삼손에게 엔학고레를 허락하셔서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한순간도 살아 갈 수 없고, 승리할 수도, 사명을 이룰 수도 없음을 깨우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명령받은 일을 다 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입니다’라고 고백하라고 하셨습니다(눅17:10). 지금껏 살면서 뭔가 이룰 수 있었고, 뭔가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하신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아니 나귀 턱뼈입니다. 우리말로는 ‘개뼈다귀’입니다. 이것이 성숙함입니다. 성숙함이란 ‘내가 평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정말 성숙해지면 자신을 나귀 턱뼈라고 여깁니다. 조나라에 활쏘기를 잘하는 기창(紀昌)이라는 사람이 천하 명궁(名弓)을 넘어 신궁(神弓)이 되려고 노력을 합니다. 베틀에 누워 실북이 왔다갔다해도 눈을 감지않기를 2년하니까 송곳으로 찌르려고 해도 눈을 깜짝이지 않는 경지가 됩니다. 이를 한 마리 잡아 실에 묶어 창틀에 달아두고 뚫어지게 쳐다보기를 3년 하니까 2백보 떨어진 곳의 나뭇잎이 수레바퀴만큼 크게 보입니다. 뭐든지 쏘면 맞춥니다. 자기의 활솜씨에 한껏 고무되어 있을 때에 감승((甘蠅)이라는 활의 고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 고수 앞에서 자신의 활 솜씨를 과시하는데, 화살 하나로 날아가는 기러기 열 마리를 떨어뜨립니다. 그랬더니 그 분은 아무 말 없이 활도 안 잡고 눈빛으로 쳐다보기만 했는데도 저 멀리 날아가던 독수리가 뚝 떨어집니다. 그때 기창은 크게 뉘우치고 그 스승 밑에서 공부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옵니다. 무표정한 얼굴에 졸렬한 모습이 되어 돌아옵니다. 고향에 돌아와 40년을 살다 죽었는데 활을 한 번도 잡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죽기 얼마 전 그 지역 현감이 어디서 명궁을 하나 구했습니다. 기창을 집으로 청해서 활을 보여줍니다. 명품 감정을 받고 싶었던 것이지요. 놀랍게도 기창은 그것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를 모릅니다. 신궁의 경지(境地)는 자신이 활을 잘 쏜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더 나아가서 활이 뭔지도 모르는 경지(境地)입니다. 완전히 평범한 범인(凡人), 어린아이로 돌아온 것입니다. 솜씨나 업적을 뽐내고 싶은 것은 아직 성숙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성숙한 사람은 자신을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죽을 때 천하만인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다고 합니다. 일국의 왕으로 살았지만 마지막은 자신은 평범한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모습이었습니다. 큰 공을 세우려는 욕심, 큰 업적을 이루려는 욕심을 부리면 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상처받습니다. 역사에 기록된 영웅들은 많은 사람을 죽이고 희생시킨 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내가 특별하지 않아도 하나님만 특별하시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비워 평범한 자로 자처하는 겸손한 그릇을 통해 일하십니다.
3. 인생의 고비 때마다 엔학고레를 베푸시는 하나님
삼손은 다른 사람보다 능력이 출중한 사람이었습니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항상 하는 주제곡이 ‘내가 떨쳐 일어나 어떻게 어떻게 하리라’였습니다만 마지막 죽을 때가 되어서야 ‘하나님 이번 한 번만 저를 강하게 하여 주십시오!’ 하나님의 능력이고 역사임을 고백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 살아온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 이루려고 했으면 몇 무더기나 쌓았겠습니까? 산더미는커녕 반무더기도 쌓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리저리 꼬여버린 인생은 산더미처럼 쌓였겠지요. 우리가 여기까지 온 데는 ‘엔학고레’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삼손은 갈수록 여건이 힘들어졌습니다. 동족이나 가족으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하는 정도를 넘어서 동족 손에 붙들려 잡혀갑니다. 여우 300마리 가지고 싸우다가 겨우 나귀턱뼈 가지고 싸우게 됩니다. 그러나 여건이 힘들어지고 어려워질 때 하나님께서는 엔학고레의 은혜를 베푸셔서 또 한 고비 넘어가게 하셨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엄마가 쓴 사연입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아들이 세 살 때부터 아프기 시작하였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병수발을 들었지만 남편은 2년 후 야속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가 다섯 살이었습니다. 한참 아빠를 찾고 한참 아빠와 놀아야할 때 아이는 아빠의 빈자리를 느끼며 자라야 했습니다. 남편 없이 아이를 키우는 것이 힘든 것보다 사랑하는 아이에게 아빠의 공백을 느끼게 하는 것이 더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키웠습니다. 기도로 키웠습니다. 그렇게 아이는 4년 동안 자라서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습니다. 공부를 참 잘합니다. 어려운 사람을 보면 그저 지나치는 법이 없습니다. 도와주고 가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잠자리에 들지 않습니다. 홀로 고생하시는 엄마를 위해서 고사리 손을 모으고 기도를 합니다. 침대에 앉아 기도하는 아들의 모습을 볼 때에 엄마는 녹록치 않은 세상살이가 주는 삶의 무게와 종일 쌓인 직장생활의 스트레스가 눈물이 되어 흘러내립니다. 이 젊은 엄마에게 초등하교 2학년 어린 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의 엔학고레입니다.
하나님 주시는 엔학고레의 은혜가 있어야 가정이 섭니다. 국가와 민족이 섭니다. 이 은혜를 나귀턱뼈와 같다는 겸손한 심령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에게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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