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8.02 20:16
양승훈전도사 조회 수:91
TV에서 본 내용입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가정집에 곰 두 마리가 담을 넘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기르는 조그마한 개 한 마리가 튀어나오더니만 두 마리의 곰을 향해 쏜살같이 달려가면서 짖어댑니다. 조그마한 개가 당차게 짖어대면서 덤비니까 곰 두 마리가 당황해서 혼비백산 도망을 치는데 한 마리는 이내 달아나버렸고, 한 마리는 이리 도망가고 저리 도망가고 하다가 결국은 담을 넘어서 달아나버렸습니다. 집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보다 훨씬 큰 곰을 향해 덤벼드는 용기를 발휘한 강아지는 정말 본질에 충실한 강아지라 할 수 있습니다.
때로 사람들 중에는 본질을 망각한 경우들이 있기도 합니다.
올 초 작고하신 우리시대의 정신적 지주이자 양심으로 불리셨던 故 신영복교수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독재정권 때 간첩조작사건에 휘말려 억울하게 누명 쓰고 20년 2개월을 감옥 사셨고 나와서는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로 후학들을 양성하셨던 분입니다. 이 분이 쓰신 <담론>이라는 책을 요즘 보고 있는데 거기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교수님이 수감생활을 하실 때 같은 교도소에 우리나라에서 손가락 안에 드는 조폭두목이 있었답니다. 감옥에서도 위세당당(威勢堂堂)하게 지내는데, 고위검사가 정기적으로 접견(接見)을 오더랍니다. 검사가 조폭두목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조폭두목은 자기지역에 젊은 검사가 새로 부임해 오면 좋은 곳에 초대해서 융숭히 대접을 한 후 고가(高價)의 선물을 챙겨주고, 갈 때에는 덩치들 한 100명을 검정양복 입혀서 좌우로 도열시킨 다음 90도로 절을 시킨다고 합니다. 그렇게 몇 번만 하면 젊은 검사는 조폭두목을 ‘형님’이라고 부르면서 친해진다고 합니다. 그런 식으로 검사를 길들여 나간다고 자랑삼아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여러분, 검사는 나라 안의 어둠의 세력이 들끓지 못하도록 막아내는 것을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사명(使命)으로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검사가 운동을 못 하거나 노래를 못 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검사의 본질적 사명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검사가 어둠의 세력들이 판을 치도록 내버려둔다거나 나아가서 어둠의 세력들과 결탁(結託)을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비판 정도가 아니라 벌을 받아야 합니다.
어떤 역사학자는 말하기를 ‘순수(純粹)의 시대’가 있고 ‘형식(形式)의 시대’가 있으며 ‘탐욕(貪慾)의 시대’가 있다고 합니다. 뭐든지 초창기 개척멤버들은 정말 순수한 동기와 순수한 열정으로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는데 그 때가 순수의 시대입니다. 그 다음 세대들은 순수한 동기와 열정은 오간데 없고 그저 형식적으로 행하면서 살아가는데 그 때가 형식의 시대입니다. 형식의 시대도 지나면 그 다음부터는 오로지 탐욕으로 서로 뜯어먹으면서 제 것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살아가는 시대가 찾아오는데 그때가 탐욕의 시대라고 합니다. 탐욕의 시대가 되면 본질은 사라지고 이익만 추구하는 사람들로 넘쳐나게 되며 ‘~답지 않은 사람들’ 천지가 됩니다.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않고 자식이 자식답지 않고, 어른이 어른답지 않고 청소년이 청소년답지 않으며, 정부가 정부답지 않고, 국민이 국민답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사사기에는 정확하게 이 세 시대가 다 들어있습니다. 사사기에는 옷니엘, 에훗, 드보라, 기드온, 입다, 삼손, 이렇게 여섯 명의 대(大)사사와 삼갈, 돌라, 야일, 입산, 엘론, 압돈 이렇게 여섯 명의 소(小)사사가 나옵니다. 소사사는 대부분 2~3줄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기록이 짧습니다. 그래서인지 소사사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설교자들도 대사사는 많이 설교하지만 소사사에 관한 설교는 잘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하는 소사사 여섯 명의 기록이 실은 사시기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합니다. 첫 번째는 소사사들의 기록은 사사기의 시대를 구분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사기 기자는 소사사를 중간 중간에 배치해서 사사시대를 초기, 중기, 후기, 말기, 이렇게 네 시대로 구분을 짓습니다. 두 번째는 소사사들의 이야기는 사사시대 지도자들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어떻게 변질되어갔는가를 보여주는 역할을 합니다.
1. 오로지 자기를 위해서 산 사람들
구체적으로 한 번 들어가 볼까요? 먼저, 입산입니다. 8,9절 읽습니다.
그 뒤를 이어 베들레헴의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그가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을 두었더니 그가 딸들을 밖으로 시집 보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밖에서 여자 삼십 명을 데려왔더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칠 년이라(8,9)
입산은 사사가 되어 아들이 30, 딸이 30, 도합 60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많은 아들딸들 모두 한 가닥 하는 집안에 시집장가 다 보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판검사, 변호사, 의사에게 시집장가 보냈단 말입니다. 정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복을 받았지요? 다음은 엘론인데, 엘론은 10년 간 사사로 다스렸다는 기록 외엔 다른 기록이 없습니다. 그 다음은 압돈입니다. 13,14절 읽습니다.
그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그에게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된 지 팔 년이라(13,14)
압돈은 아들이 40명이나 되었으니 입산보다 자식복(子息福)이 많았습니다. 거기다가 손자도 30명이나 보았습니다. 손자 하나만 있어도 좋아들 하는데, 30명이나 되었으니 웃음이 끊일 날이 없었을 겁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아들 40명, 손자 30명, 도합 70명에게 모두 나귀를 타게 해 주었답니다. 요즘으로 치면 리무진자가용을 한 대씩 뽑아줬다 이 말입니다. 주님 일 감당하니 이렇게 복을 받아요. 부러우면 지는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 아들을 30명 40명 낳고 딸을 30명 낳고 하려면 도대체 부인이 몇 명이나 되었을까요? 한 20명은 족히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많은 아들들에게 나귀를 탈 수 있게 해 줬답니다. 벤츠리무진이나 에쿠스리무진 몰고 다니려면 얼마나 잘 살아야합니까? 나귀를 탔다는 것은 왕족(王族)의 삶을 누렸다는 뜻입니다. 옷니엘이나 에훗, 드보라는 목숨 걸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고는 무엇 하나 챙기는 것 없이 바람과 같이 사라졌는데, 이 사사들은 이스라엘을 구원했다는 기록은 하나도 없고, 얼마큼 소유하고 얼마큼 누리면서 살았는가를 자랑하는 기록만 수북이 남겼다 이 말입니다. 이렇게 많은 아들딸들이 다 왕족처럼 호의호식(好衣好食)하고 리무진 타는 생활을 유지하려면 도대체 백성들로부터 세금은 얼마나 거뒀을까요? 이제는 미디안이 약탈꾼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사들이 약탈꾼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사사인데 대적들과 싸워서 이스라엘을 구원해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왜냐? 적들과 정략결혼(政略結婚)을 통해 사돈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9절에 입산이 딸 30명을 밖으로 시집보내고 아들 30명을 위해서 밖에서 여자를 데려왔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통혼을 금지하신 가나안족속들과 결혼시켰다는 말입니다. 지도자들인 자기들이 먼저 앞장서서 이방통혼을 일삼으면서 사사로서 감당해야할 ‘본질적 사명’(本質的 使命)은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여자들 꽁무니를 쫄쫄 따라다니면서 기를 쓰고 그들과 결혼하려 드는 막장 사사가 된 것이 갑자기 된 것이 아닙니다.
순수의 시대, 성령의 시대가 가고 나니 모두가 탐욕스러워져서 사명은 오간데 없고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사시대 말기의 신앙이고 삶이었습니다.
2.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공동체가 타락의 길로
이러한 사사들의 일탈(逸脫)에 물꼬를 튼 인물은 기드온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뿌려놓은 타락과 탐욕의 뿌리는 두고두고 공동체를 힘들게 만드는 저주의 고리가 됩니다. 기드온 한 사람이 사명 감당하고 깨끗이 물러났더라면 그 이후 사사들도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을 것인데, 기드온이 전리품도 챙기고 명예도 챙기고 왕노릇 하겠다는 자식이 나올 정도로 권력도 챙기니까 이후에 등장하는 사사들도 그래도 되는가보다 하고 하나같이 챙기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세월이 흐르자 사사라는 사명의 자리가 특권(特權) 누리는 자리로 둔갑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도자로부터 백성들까지 사명은 오간데 없고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사명보다는 특권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소설가가 있었습니다. 이 작가가 사용하는 만년필이 있는데, 작품을 쓸 때 이 만년필로 쓰고, 외출을 할 때는 옷에 꽂고 다녔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계적인 작가를 만날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하고 손이라도 한 번 잡아보고 싶어 하고 그 만년필로 싸인이라도 받고 싶어 했습니다. 이 작가의 서재에 있는 연필이며 지우개며 자며 가위들은 모두들 작가의 만년필을 부러워했고 만년필은 서재에만 들어가면 자신을 뽐내기 바빴습니다. 어느 날 국왕이 이 작가에게 보석이 박힌 새 만년필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때부터 작가는 국왕으로부터 받은 만년필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종전에 쓰던 만년필은 알고 지내던 고물상 주인에게 줘버렸습니다. 고물상 주인은 만년필로 그날 들어온 고물의 양을 기록하는데 사용했습니다. 만년필은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일을 했는가를 떠들어댔지만 아무도 들어주는 이가 없었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전1:31)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치 있을 때는 주님 손에 붙들려 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지시하는 위치에 있다? 그러면 나는 다른 사람을 부려서 일하는 역할을 하나님께 부여받은 것뿐입니다. 내가 지시하는 자리에 있다고 해서 지시받는 사람보다 인격이 더 뛰어나다고 할 수 없고, 가정에서 더 좋은 남편이나 아버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부림을 받는다? 내가 그 사람보다 못 난 사람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자리 그 역할을 주셨을 뿐입니다. 모든 자리는 본질적으로 감당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청소부는 청소부의 사명이 있고, 사장은 사장으로서의 사명이 있고, 목사는 목사로서, 집사는 집사로서, 부모는 부모로서, 자식은 자식으로서의 사명이 있습니다. 이것을 망각하고 내 자리가 곧 나의 능력이라고 착각을 하게 되면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도덕적해이(道德的解弛)에 빠지게 되고,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을 비관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모두가 사명과 역행(逆行)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요. 내 삶의 자리에 맞는 본질적인 사명을 수행할 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눈길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걷지 말기를
오늘 내가 걸어간 길이 훗날
이 길을 걸어갈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의 말씀입니다. 북이스라엘과 남유다의 역사를 볼 때 북이스라엘은 시작부터 여로보암이 우상숭배의 씨를 뿌려놓으니까 이후로 등장하는 왕들은 하나같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습니까? 남유다는 그래도 다윗이 보여준 모범이 있으니까 이후 등장하는 왕들 중에 다윗정도는 되지 않더라도 다윗을 닮으려는 노력들은 하더란 말입니다. 여러분, 싸우는 교회에 싸우는 후손들이 나오고, 은혜로운 찬양이 있는 교회에 찬양 잘 하는 후손들이 나오며, 이기적인 교회에 이기적인 후손들이 나오고, 섬기는 교회에 섬기는 후손들이 나옵니다. 선한 자는 그 선한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먼 훗날 올바르게 사는 성도들에게 물었을 때 ‘이것은 오래 전 어느 집사님이 하시던 것을 제가 본받아 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때 여러분의 이름이 거론되어지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께서는 필터와 같은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이 누구 하나 나서서 삐 뚫어진 물꼬를 정상으로 되돌려 놓은 이가 없다는 점입니다. 한 사사라도 ‘이런 것은 잘못 됐으니 나는 그렇게 하지 않으련다’라고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렸다면 삼손같은 사람은 나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안타까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레미야 5장 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멸망을 막아설 의인 한 사람을 찾으신다 하셨는데, 사사들 시대 후반부로 가면 그 한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 몸에는 자연치유력이란 것이 있어야 하고, 어떤 단체나 조직에는 자정능력이란 것이 있어야 합니다. 20대에는 밤샘을 해도 하룻밤 자고 일어나면 회복이 됩니다만 50대 넘어서면 밤샘피로가 오래 갑니다. 타고난 건강을 맹신한 나머지 너무 무리하면 자연치유력도 망가지는 수가 있습니다. 더 이상 회복이 안 됩니다. 깊은 병이 찾아오는 것입니다. 조직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정능력을 가진 사람이 그래도 한 두 사람은 남아있어야 합니다.
전에 한 번 드렸던 말씀이지만 불교에는 이판승(理判僧)과 사판승(事判僧)이 있습니다. 불교가 얼마나 썩었습니까? 조계종 종무원장 자리를 차지하려고 조폭을 동원해서 싸우지 않습니까? 1500년 쌓아놓은 어마어마한 재산다툼이 대단합니다. 그런데도 불교가 망하지 않고 지금까지 버티는 이유가 이판승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판승은 죽기 살기로 수도정진을 하면서 세속에 물들지 않으려고 몸부림 치는 승려들입니다. 성철같은 이가 대표적인 이판승입니다. 이판승이 타락해서 돈 밝히고 세상 밝히면 그때 뭐라고 합니까? “이판사판공사판”이라 하지요. 이판승이 불교가 뿌리채 썩는 것을 막아낸 필터들이었습니다.
중세기독교가 타락했어도 서구기독교가 1000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수도승들 때문이었습니다. 중세기독교는 얼마나 타락했는지 성직자들이 첩을 두고 살면서 낳은 사생아에게 재산을 물려주기 위해서 암투를 벌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래도 타락하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살면서 그리스도처럼 되고자 했던 수도승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수도승들이 최고로 치는 영광은 오상(五傷)의 영광입니다. 오상은 주님께서 십자가 달려 죽으실 때 받은 머리, 오른 손, 왼 손, 옆구리, 포갠 다리, 이렇게 다섯 군데 상처자국입니다. 수도승들은 얼마나 주님을 닮고 싶어 했는지 주님께서 받으신 다섯 가지의 상처자국까지 닮고 싶어 했습니다. 아니, 주를 위해 살다가 받는 아픔과 상처를 최상의 면류관으로 여기면서 살았습니다. 그 신앙이 중세기독교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멸망을 1500년 동안 막아냈던 힘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교회에서나 사회에서 필터가 되십시오. 세상 사람들의 양심을 깨우는 주님의 지팡이가 되십시오. 제가 군에 있을 때 만났던 김일병이 있습니다. 고참들이 술을 마실 때에도 밤에 야한 비디오를 볼 때에도 김일병의 눈치를 힐끔힐끔 봅니다. 김일병은 너무나 진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어디에 있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는 보기 드문 신앙인이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잠자는 양심을 깨우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모습입니다.